[조현의 휴심정] 쉼과 깸
죄는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청년들의 희망을 앗아버리고, 두렵고 불안한 미래를 안겨주고도
그 고립감과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 사회 공동체에 있는지 모른다.
# ‘코로나19 바이러스’ 슈퍼전파자인 ‘신천지’가 뉴스의 초점이다. 신천지엔 주류 개신교단이 붙인 ‘이단’ 꼬리표가 달려 있지만, 기독교 언론이 아니라면 이런 표현을 쓰긴 어렵다. 신천지를 해산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단숨에 100만명을 넘을 만큼 ‘국민 밉상’으로 떠올랐다 해도 말이다. 로마 황제들에 의해 순교당한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가톨릭에 의해 화형당한 얀 후스를 비롯한 교회 개혁가들과 개신교를 연 마르틴 루터도 잔 다르크도 이단자였다. 기독교는 바로 ‘이단의 역사’였다. 따라서 이단이나 사이비는 기성 교단에 의해서 판명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열매, 즉 그들의 ‘도덕적 행위’로 판별할 수밖에 없다.
# ‘마녀사냥 당하고 있다’는 신천지의 하소연이 아니더라도 마녀사냥은 성난 군중이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선택지다. 역사적으로도 페스트 같은 전염병과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지배계층의 수탈로 삶이 피폐해진 가운데 희생양이 필요할 때 등장한 것이 마녀사냥이다. 중세 마녀로 몰린 이는 대부분 여성과 노인, 고아 같은 약자였다. 마녀사냥은 징역형 정도면 적당할 죄에 대해서도 민의의 이름으로 과잉 처벌을 낳기에 민주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마녀사냥을 할 때가 아니라 슈퍼전파자가 된 신천지가 가장 앞장서 사태 수습에 협조하도록 해 이 사태를 끝내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
# 기존 교회를 비롯한 기성 종교에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신천지엔 웬 청년들이 저렇게 많으냐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이 오직 집요한 신천지의 위장 선교 전략 때문이기만 할까. 이미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보여줬듯이 죄는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청년들의 희망을 앗아버리고, 두렵고 불안한 미래를 안겨주고도 그 고립감과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 우리 사회 공동체에 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신천지 안에서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기성 교회가 너무 물질 축복 내세 구원에만 매달리고, 기성 종교인들이 꼰대가 되어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지 못한 원인도 크다’는 신천지 연구자들의 견해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관련 기사: “신천지 진짜 문제는 ‘사기전도’로 의심사회 만든 거죠”)
# 2일 이만희 총회장의 기자회견에서 보았듯 그는 89살이란 나이에 걸맞게 노쇠했다. 그가 교인들에게 가르친 대로 영생할 가능성은 제로다. 구원받을 숫자로 14만4천400명을 제시하고, 여기에 포함되기 위해 가정도 일도 직장도 소홀히한체 삶을 교회에 올인하는 건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으로 볼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곳에 삶을 저당 잡힌 것일까. ‘신천지’밖 기성 교단, 기성 종교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그리스도교가 내세구원론을 펴는 것과 달리 신천지는 현세구원론을 펼친다. 신천지는 ‘개인비리와 세습으로 욕망에 가득 찬 대형교회 목사들이 말하는 내세구원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이미 기존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맘몬을 숭배한다’고 한 경고조차 무시한 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부채질한 것은 아닌가. 온 국민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데도 보수교회를 대변하는 한국교회언론회는 “예배는 교회의 존재 이유”라며 “교회의 예배보다 전철과 버스, 택시 운행을 멈춰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저기에 어디 구원이 있겠느냐’는 신천지의 논리를 뒷받침해줄 주장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대신 지금은 선한 행동이 절실한 때다. 재정적 손실을 기꺼이 감내하며 예배와 미사, 법회 중단에 동참하고, 대구로 의료지원을 하러 달려가거나 헌금과 기부금을 보내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들처럼 말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신천지 교육 수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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