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증진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기쁘게 할 생각입니다.”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 현해관(은퇴 사제 숙소)에서 강우일 주교가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강 주교는 지난 11월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느닷없이 ‘뜻있는 인생’에 대한 갈망이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용솟음쳤다. 결국 평범한 세상살이를 접고 사제의 길을 택했다. 로마로 유학 가서 신학을 공부할수록 머리통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예비 사제는 귀국을 1년 미루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생활했다. 신부가 된 그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 곁에 있고 싶었지만, 한국 천주교 수장은 그를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붙들어뒀다. 묵묵히 보좌만 하던 사제가 가슴속 온기를 본격적으로 끄집어낸 것은 2002년 제주교구장이 된 뒤였다. 강우일 주교는 지난 18년 동안 4·3 피해자 보듬기,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4대강 대운하 반대 등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지난 11월 제주교구장을 정년퇴임한 강 주교를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의 현해관(은퇴 사제 숙소)에서 만났다.
‘으뜸되는 가르침’(종교의 본래 뜻)을 받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생명 존중 및 평화를 위한 행보를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단호하게 실천해온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혼탁함,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우울을 떨쳐낼 수 있는 따뜻한 연대와 희망도 찾고 싶었다.
강우일(76·이하 호칭 생략) 주교는 2002년부터 지난해 11월 퇴임할 때까지 18년 동안 천주교 제주교구를 이끌어왔다. 제주교구는 한국의 16개 교구 중 규모가 가장 작다. 그러나 작은 동네의 사제가 내는 목소리는 섬 속에 갇히지 않았다. 바다 건너 반도 전체에 울려퍼졌으며, 가톨릭 울타리를 넘어 사회 구석구석까지 울림을 줬다. 그가 내놓은 사랑과 평화의 말은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죽비였지만,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였다. 그는 몇 년 전 한 시사주간지가 한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 인물 중 만나보고픈 사람 1위(작고한 인물 제외)를 차지하기도 했다.
―퇴임 뒤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정해진 출근을 우선 안 하니까 아주 자유롭고요, 찾아오시는 분을 만나거나 부탁받은 원고를 쓰는 등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주로 많습니다. 운동 부족이 안 되도록 가끔 테니스도 치고, 한 주에 한 번씩은 세 시간 정도 숲길을 꼭 걷습니다.”
―아직 맡고 있는 직책도 있지요?
“한베평화재단 이사장하고, 곧 내려놓을 겁니다만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평화일꾼이 되겠다”고 하시더니 둘 다 평화와 관련된 일이군요.
“네.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기쁘게 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베평화재단도 그렇지만, 강정마을의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는 국민들에게 평화는 절대로 무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 연대를 통해서 달성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완공이 됐지만, 오히려 기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평화 교육의 시발점이 될 수 있거든요.”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죄와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창립(2016년 9월)된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베트남전 종전 42주년인 2017년 4월 제주에 베트남 피에타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있는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는 문정현 신부가 받은 민주화운동 배상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각계 시민들이 낸 20억원의 후원금으로 2015년 9월 문을 열었다.
“제주에 와서 4·3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됐어요.” 지난해 11월17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에서 은퇴한 강우일 주교가 지난달 24일 오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제주교구 사제관(현해관) 뜰의 동백나무 앞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퇴임 미사 때 교우들이 ‘화해와 평화의 목자’라고 표현했던데, 딱 맞는 거 같아요.
“글쎄요, 제가 제주에 와서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이해와 사고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전혀 연고가 없는 제주에 가리라고는 상상을 못 해서 18년 전 처음 발령 때는 굉장히 황당하기도 했고, 어떻게 될 건지 걱정하기도 했죠. 그러나 아름다운 제주에 막상 도착해서는 아주 행복했어요. 사제가 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 명동에서 보내면서 최루탄 가스를 많이 마시는 등 그동안 소용돌이와 소란 속에서 고생했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이 이제 공기 좋은 데서 좀 살아보라고 포상을 주시는가 보다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의 여러 양상을 보니까 다들 과거에 입은 상처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더라고요. 그 원인인 제주 4·3에 대해서 차츰 알게 됐죠. 전체 인구의 1%밖에 안 되는 제주 사람들이 나머지 99%로부터 너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가 이분들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거죠. 지난 18년간 겉으로는 아름답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사실 편하질 않았어요.”
―제주에 내려와서 사목 방향도 바뀐 건가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저이지만, 현대사의 궤적이랄까 맥을 다른 시선으로 이해하게 됐죠. 그전에는 단락별로 이해했다면 제주에 와서 현대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흐름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면, 아니면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4·3에 대해서는 제주에 와서야 깊이 알게 됐다고요?
“2003년에 정부의 ‘4·3 진상보고서’가 나왔는데, 그 보고서를 보면서 이게 엄청난 일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고 관련된 여러 자료를 자꾸 들여다보게 됐죠.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구 사제들 중에서도 관계가 안 된 집안이 없더라고요. 그 정도로 아픔과 상처가 컸는데 이상하게도 50~60대까지만 해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4·3을 잘 모르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4·3을 겪은 1세대들이 자기 가족이나 자손들에게 말을 안 했더라고요.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우니까 그걸 다시 말로 표현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한마디 했다가 붙잡혀가서 뭔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거였어요.”
제주 4·3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만 해도 1만4천명이 넘는다. 강우일은 2008년 제주 4·3 60주년 추모미사를 집전했다. 4·3에 대한 시민적 화해와 사회적 성찰의 시발이었다. 그는 또, 강정마을 군사기지 건설에 줄기차게 반대하는 등 평화의 섬 제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평화 기도문’(2007년)과 성탄절 ‘평화 메시지’(2008년), ‘평화 호소문’(2009년) 등을 통해 군사기지 건설에 대한 단순한 반대를 넘어 뭇 생명들의 공존과 상생이라는 생명평화운동으로 승화시켰다. 4대강 대운하 사업 반대, 원전 재검토 촉구 등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다수가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사제는 자유와 사랑의 이름으로 발화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2014년)을 두고서는 “불관용과 억압, 단죄와 처단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어둠의 시대를 통탄한다”고 비판했으며, 제주로 온 예멘 난민 논란(2018년)에 대해서도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외면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거부하는 범죄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강우일 주교는 제주교구장 시절 생명과 평화를 살리는 생명평화운동을 이끌었다. 4대강 대운하 반대는 그 일환이었다. 2010년 6월 경기 양평군 양수리성당에서 4대강 중단 촉구 미사를 마친 강우일 주교(오른쪽 셋째)와 최덕기 주교(오른쪽 넷째) 등 사제와 신도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천주교 생명미사 기도처까지 순례하고 있다. 양평/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제주로 오기 전 서울에 있을 때는 공개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요.
“그때도 마음속으로는 느끼는 것이 많이 있었죠. 그러나 70~80년대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와 소란 속에서 살다 보니까 정신적으로 지친 면도 있었고, 그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시는 처지였기에 제가 나서는 것이 맞지 않았죠. 추기경님이 해야 할 말씀을 다 하셨기도 했고요.”
강우일은 1974년 12월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 중림동성당 보좌신부로 잠깐 일한 뒤 곧바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비서, 서울대교구 교육국장·홍보국장 등으로 김 추기경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1985년 8월 난곡성당 주임신부로 나갔지만, 김 추기경은 그해 말 또다시 강우일을 불러들였다. 그후 2002년 제주교구장이 될 때까지 그는 명동성당에서 일했다.
―4대강 등 주요 사안은 개인 의견이 아니라 주교회의 결의로 반대했는데요.
“저희가 입장 표명을 할 때에는 최소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을 초대해서 강의와 질의응답 등 토론을 충분히 한 뒤에 합의하거나 결론을 내죠. 감성적으로 발언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처음 주교가 됐을 때만 해도 선배 주교님들 중에는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발언하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셨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아주 서늘해지곤 했는데, 세대교체가 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씩 깊어졌어요.”
―거리의 사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아픔과 갈등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신부들은 많이 계시지만, 고위 성직자로서 사회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줄곧 내온 분은 강 주교님이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주교회의 부의장과 의장(2008~2014년)을 상당 기간 하다 보니까 자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주교단이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니까, 주요 사안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도 참 고통스러운 일이거든요. 물론 주교 등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와 정치문제에 대해서 왜 발언을 하느냐며 비판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천주교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0~64년) 정신에 따른 당연한 활동이에요. 바티칸공의회의 결론은 교회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거든요. 김 추기경님이나 저나 모두 세계 교회의 그런 흐름 속에 있는 거죠.”
―‘빨갱이 사제’라는 등 터무니없는 공격도 많이 받을 때는 힘들지 않았어요?
“우리 신부들도 선거 때 등 부모님들하고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집에서 나누면 의견이 달라서 애를 많이 먹지요. 저도 그런 셈 쳤죠. 일일이 대응하기도 힘들고, 그런 비판은 저희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야죠.”
“고기를 적게 먹는 본래의 인간다운 식사로 사람들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24일 제주교구 은퇴 사제관인 현해관에서 인터뷰하던 중 강우일 주교가 코로나19로 불거진 지구생태계 회복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그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글(2012년, 제주교구 사회교리학교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잘 지켜지도록 하는 모든 일에 교회는 무관심할 수 없다”며 “교회는 세상의 정치·경제·사회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정의가 실현되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호소하고 경고하는 예언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발언의 근거로 바티칸공의회가 정한 사회교리를 들고 있지만, 그의 본성 깊숙한 곳에는 오래전부터 약자에 대한 사랑이 터잡았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경험은 이런 면을 보여준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삶을 살았던 샤를 드 푸코(1858~1916년) 신부를 따르는 국제 수도단체이다.
강우일이 1973년 로마에 있는 우르바노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다. 원래는 바로 귀국해야 했지만, 그는 한국 천주교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한테 1년 휴가를 청했다. “바로 사제 서품을 받으면 제가 머리통만 커져 있고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가슴에 온기를 좀 불어넣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1년 동안 그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사람들이랑 독일의 공장, 스페인 빈민가, 북아프리카 오지 등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원하던 온기를 얻었는지요?
“그렇게 대단한 건 없었는데, 처음에 간 곳이 독일이었어요. 하이델베르크하고 만하임 사이에 있는 라덴부르크라고 하는 조그만 시골 동네였는데, 거기에 석면을 만드는 큰 공장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석면이 얼마나 위험한 줄을 모르고 돈을 많이 준다니까 갔죠.(웃음) 거기 노동자가 주로 터키와 그리스, 스페인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였어요. 동양 사람은 저 혼자밖에 없었죠. 4개월밖에 안 있었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차별당하면서 일하는지를 그때 경험했어요. 떠날 때는 정말 이를 갈면서 ‘내가 이 독일에 다시 오나 봐라’고 생각했죠.(웃음) 어쨌든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해 밀리고 쫓겨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꽃피우진 못했어요.”
제주교구장 고위 성직 지냈지만
지난 18년 마음은 편하지 않아
상처받고 약한 이와 늘 함께 해
“더 다가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로마 신학대 마치고 1년 휴가 내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민중 속 삶
귀국 뒤 김수환 추기경 오래 보좌
“교회는 예수 삶을 늘 돌아봐야”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운데)가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2017년 7월31일 제주생명평화대행진 첫날 행진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강우일은 1945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2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4·19혁명(중3) 때 ‘집에 가서 가만히 있으라’는 학교 지침에 따라 일찍 귀가하면 오히려 종로에 나가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행진을 바라보면서 벅찬 기분에 젖기도 했지만, 또래에 비해 중·고교 시절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서울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였다. 앞서 일본으로 갔던 아버지 강영욱(2012년 작고)이 그를 도쿄로 불렀다. 강영욱은 경북 포항 근처의 강구에서 냉동수산업을 하다가 사라호 태풍(1959년)으로 시설을 잃은데다가 야당 정치인 출신의 장인 때문에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출 금지 등 정치적 탄압을 받자, 유학 때 살았던 일본으로 사업처를 옮겼다.
―처음에는 조치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죠?
“원래 신학과에 가려고 했는데 일본은 철학과를 졸업해야만 신학과에 진학하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래서 철학과 4년과 대학원 2년을 마친 뒤에 조치대학 신학과에 들어갔어요.”
―당시 이른바 명문고였던 경기고를 졸업했기에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왜 사제의 길을 택했어요?
“일본에 가서도 일반 대학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입학시험이 가까워오면서 뭔가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아주 물밀듯이 솟구쳤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와서 한 번 살다가 가는 인생인데 그냥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 구해서 사는 그런 뻔한 길을 가기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다가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갑자기 많이 하게 된 거죠. 그런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저절로 나왔다고요?
“저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대학 입시 한 달을 앞두고, 사회적인 성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그런 충동이 갑자기 일어나더라고요. 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때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에게 상의를 드렸죠. 아버지가 신앙심이 깊으셔서 매일 아침 새벽미사에 가면서 저를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신부님이 조치대 신학대 학장이셨던 게페르트 신부님을 소개해주셔서 그분과 상의하고 이 길을 걷게 됐죠. 조치대학 신학과에 들어가자, 거기서 로마로 가라고 해서 옮겼고요.”
―로마 생활은 어땠어요?
“서양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 논리체계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런 신학이 저한테는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신학을 배울수록 자꾸 머리통만 커지는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공부하라고 수업을 비워둔 매주 목요일에 저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본부에 가서 기도하고 수녀원 짓는 일을 도와주는 노력봉사를 했어요. 그게 로마 신학교 생활 중에 정신적으로 저 자신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샤를 드 푸코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됐죠.”
강우일 주교가 2013년 9월30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해군기지 건설 공사장 앞에서 열린 ‘제주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출범 2주년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런 면에서 보면, 난곡성당의 주임신부가 주교님이 본래 추구했던 사제의 모습에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아닐까 싶은데요.
“네. 정말 좋았습니다. 난곡은 서울에서 제일 가난한 지역이었지만, 거기 교우들하고 정말 가깝게 느꼈어요. 산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드리고 싶었죠. 기쁘게 지냈는데 갑자기 6개월 만에 다시 연락이 와서 그렇게 됐습니다.(웃음)”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낮은 데로 임하는 실천성 등의 성향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지향과 잘 맞는데, 사제단에 가입은 안 하셨죠?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9월에 발족했고, 저는 그해 12월에 신부가 됐어요. 제가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돼 추기경 보좌신부를 맡은데다가 제 성격상 나서서 뭘 하는 게 맞지 않아서 사제단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일방직 사건 등을 겪으면서 기도회에 참석하는 등 마음으로는 늘 함께했어요. 1978년에 민주노조를 하다가 회사 쪽에 의해서 똥물을 뒤집어쓰는 등의 탄압을 당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와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추기경 비서로서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힘없는 사람들을 정부가 마구 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가냘픈 여성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힘이 되어주지 않으면 누가 도울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강우일은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한국 천주교 최고 지도자가 될 1순위 후보로 늘 거론됐다. 그러나 1998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 이어 2006년과 2014년 후임 추기경 임명 때마다 번번이 로마 교황청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
―서울대교구장이나 추기경이 안 됐을 때 실망하지 않았나요?
“세간에 그런저런 기대나 얘기들이 있었지만, 저는 그냥 하느님의 뜻이거니 하고 받아들였어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2014년 7월29일 제주시 노형동의 한 공원에서 ‘2014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합류하기에 앞서 ‘팔레스타인 학살을 멈춰라! 우크라이나에 평화를!’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우일은 제주교구장 시절 주교회의 참석 등을 위해 서울에 오면 항상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2020년은 코로나 등으로 인해 유난히 힘든 한 해였어요. 사람들이 다 지쳐가고 있어요.
“올해의 어려움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세계가 동시에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서로 보듬고 연대하면서 이겨냈으면 합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인간이 얼마나 인간에게 소중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야 인간으로서 스스로도 채워가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잖아요. 그러나 저는 이 코로나 사태를 단순히 방역이나 경제 이런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를 잠시 출몰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바이러스의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고 있고 살고 있는 이 현대 문명의 시스템 전체를 향한 하늘의 질타와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백신으로 코로나19가 잡힌다 하더라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팬데믹을 다시 일으키는 현상이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죠. 현대 문명 시스템이라면, 우리들 삶의 형태를 바꿔야 한다는 뜻인가요?
“주교회의에서 생태환경위원회 책임을 지면서 저도 생태문제에 많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알게 됐는데, 지금 지구가 마지막 위기 단계에 와 있어요. 우리 모두가 기후변화로 그것을 체험하고 있잖아요. 우리 삶의 양태를 바꾸지 않으면, 그래서 근원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지구가 엄청나게 망가져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요.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게 하는 현대의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이런 위기를 더 가속화시키고 있죠. 온난화가 진전되면서 밀림과 툰드라 지대의 얼음 속에서 잠잠히 있던 바이러스들이 바깥으로 끌려나올 수밖에 없게 됐죠. 그런 환경을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잖아요. 탄소 배출을 중립으로 만드는 정도로는 지구 생태계 파괴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고 봅니다. 근원적으로는,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고 더 큰 집에 살고 더 큰 자동차를 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짊어지면서, 우리 모두가 좀 덜 쓰고 덜 먹는 식으로 현대 문명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먹는 것부터 본래의 인간다운 식사로 되돌아가야 해요.”
―인간다운 식사라면요?
“우리가 어릴 적에는 고기는 일 년에 제사나 생일 또는 큰 축일 때나 맛볼 수 있었을 뿐이에요. 근데 지금은 공장식 축산업이 되면서 회사에서 회식을 해도 다들 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어요.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죄 없는 닭과 오리가 집단 도살을 또 당하는데,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잖아요.”
―이미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욕망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
“결국 각자가 의식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요새 비건 등 채식 위주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표징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습관을 바꾸어가는 분들이 있으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먹거리 생활 패턴을 바꾸는 운동을 우리가 펼쳐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주교님의 식단은 어떤지요?
“저는 되도록 육식은 최소한으로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나오면 먹는데, 대부분은 채식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해 하느님께 죄송합니다.” 강우일 주교가 성탄 전날인 24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중 사제로 살아온 삶을 회고하다 생각에 잠겨 있다. 제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강우일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성찰과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개신교나 가톨릭 할 것 없이 한국 교회들이 건물 신축 등 외양 가꾸기 경쟁을 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세속화되는 그런 과정을 로마시대부터 계속 반복해왔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세상의 물결에 완전히 떠내려가지 않도록, 결국은 성직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초대교회를 이끌던 분들 즉,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셨던 삶을 성찰하고,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반복해야 합니다.”
―개신교 일각에서는 성소수자에게 축복을 준 목사를 징계하는 등 성소수자 차별을 여전히 하고 있어요.
“혼인과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 시노드(가톨릭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회의, 2014년)에서 제일 강조됐던 것은 혼인과 가정이 갖는 고유한 역할은 포기할 수 없지만,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성정체성에 관한 본성적인 성향을 존중해주어야지 그를 이유로 차별하거나 단죄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약한 이들과 늘 같이 있고 싶어했던 강우일은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긴 시간 머물렀으며, 교구장이라는 높은 자리에도 오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4·3 유족과 강정마을 주민, 세월호 유가족 등 “하소연할 데도 없이 내몰린 힘없는 사람들과 있을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높았으되 낮고자 했던 사제의 인터뷰 마무리는 자기 성찰이었다.
“저 나름대로는 몸부림치면서 살았지만, 정말 가난한 분들에게 좀 더 피부로 다가갔어야 했는데 그런 면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하느님 대전에 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주/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