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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얼마 안 남은 거 알아요, 그래도 이 더위 꺾이고 가시길요”

등록 2021-08-21 10:20수정 2021-08-21 21:49

[한겨레S] 남의 집 드나드는 닥터 홍
왕진 다니기조차 힘겨운 무더위, 체온조절 힘든 환자엔 더 큰 위협
코로나와 겹친 폭염 더 야속해…악순환 막으려면 생태 전환해야
출처 : 언스플래시
출처 : 언스플래시

폭염과 환자들

설명하기 어려운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다. 방문 진료를 하러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데 마치 코로나로 폐쇄된 사우나를 걸어다니는 듯했다. 추위도 더위도 무덤덤하게 지내는 편인데, 몸이 가벼운 편이라 비교적 여름에 더 자신이 있었다. 웬만큼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 진료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올여름에는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움직이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 보통은 선풍기를 20분 정도 돌고 꺼지도록 맞추어놓으면 아침까지 잠이 들었는데, 최근의 열대야엔 한 시간을 작동시켜놓아도 새벽에 깨서 또 한 시간을 돌려야 겨우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잠을 설치고 나서 쉬지 못한 채 일상을 반복하니 더 힘들었다. 유례없는 강추위와 폭염 때문에 방문 진료가 어려운 것을 넘어서 이제는 거동이 불편한 아픈 이들을 위해서 기후 위기 문제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움직이는 일이 힘들어 볼멘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실제 방문 진료를 하며 살펴보니 폭염은 그 자체로 노쇠와 질환으로 체온조절이 어려운 환자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와상 환자에게 또다른 위협 ‘폭염’

파킨슨, 폐렴, 욕창 등의 질환으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한 뒤 집에 계시는 현일(가명)님은 폭염이 이어지는 며칠간 위기를 겪었다.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주말 내내 보호자님들이 곁을 지켰다. 수차례 위기에도 어렵게 버티고 있었는데 별안간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오랜 투병으로 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보호자님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당황하였다. 나도 평소보다 더 자주 찾아뵙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고 누워 계시는 현일님에게 폭염은 그 어떤 질병보다도 큰 위협이었다. 닷새쯤 상태가 불안했는데, 방 안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고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하자 다행히 조금 회복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폭염으로 인한 기력 저하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폭염에 몸이 적응하고 또 폭염이 한풀 꺾여 호전되지 않았나 싶다.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분명 큰 고비였고 버티지 못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현일님뿐 아니라 폭염 속에 많은 어르신이 건강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특히 충분히 냉방을 하기 어려운 주거 취약 계층에게는 커다란 재난이었다.

경희(가명)님은 말기암으로 온몸에 암이 전이된 상태다. 팔다리의 부기도 심하다. 눈이 나빠져 시야도 선명하지 않다. 가족들의 급한 연락을 받고 찾았을 땐 이미 손쓸 도리가 없어 보였다. 보호자님들도 수차례 병원을 거치며 되돌릴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계셨다. 객관적으로 경희님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상태였지만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만날 때마다 거르지 말고 뭐든 꼭 드시라고 했다.

보호자님은 경희님이 선명히 보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또 뵙고 싶어요. 식사 잘 드시고 힘내세요. 제가 또 찾아올게요”라고 연신 반복해 말했다. 그럴 때면 경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음이 전해졌는지 무더운 여름을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잘 견디고 계시다. 보호자님이 지나치듯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저희도 얼마 안 남은 거 알아요. 그런데 더위가 조금 꺾이고 임종하시면 좋겠어요. 다들 힘드니까요.” 그 마음이 진심으로 이해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무더위에 마지막을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무더위가 유난히 야속한 건 코로나 유행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1년이 넘도록 코로나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소, 공공병원의 의료진, 공무원분들의 피로도가 극에 다다랐다. 그들이 꼭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다만 코로나 방역 업무로 장기간 중단된 보건 사업이 많다. 나와 함께 청소년 건강증진 활동을 기획·실행하는 한편, 지역의 장애인 거주지에 방문해서 재활 훈련을 했던 분들이 지금은 방역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루빨리 필요한 보건 사업이 취약 계층의 건강 돌봄을 담당할 수 있기를.

1년이 넘도록 코로나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소, 공공병원의 의료진, 공무원분들의 피로도가 극에 다다랐다. 사진은 지난 18일 오전 경기도 화정역 인근 광장에 마련된 임시 선별검사소 모습. 고양/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년이 넘도록 코로나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소, 공공병원의 의료진, 공무원분들의 피로도가 극에 다다랐다. 사진은 지난 18일 오전 경기도 화정역 인근 광장에 마련된 임시 선별검사소 모습. 고양/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K방역 넘어 생태 전환 모색해야

케이(K)방역을 넘어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체제는 오래갈 수 없다. 결국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온다. 무분별한 산림 벌채는 동식물과 미생물의 생태계를 파괴하였고,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 질환들이 중간체를 거쳐 인간에게 전염되었다. 이 전염병을 일으킨 건 인간종이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가 모두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고려한다면, 코로나 방역을 넘어 생태적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인류의 삶을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위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파멸할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무엇부터 실천해야 할지 나도 혼란스럽다. 다만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은 기후 위기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폭염과 코로나에도 아픈 이들이 삶의 마지막을 존엄히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류의 생존을 이끌고 있는 택배노동자, 건설노동자, 청소노동자, 방역 담당자 등 야외에서 일하는 분들이 꼭 버텨주시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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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원 찾아가는 의사 |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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