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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유연주는 사남매 중 제일 ‘똑소리 나는 아이’였다. “엄마가 야단치면 저랑 동생들은 그냥 우는데요, 연주는 엄마 기분 나아지라고 자기 방을 청소했어요. 그리고 엄마가 ‘억울한 거 있으면 말해봐’라고 하면, 저랑 동생들은 가만히 있는데 연주만 꼭 대답하는 거예요. ‘난 이걸 잘못했는데 엄마도 나한테 이걸 잘못했어’라고요. 그러면 엄마도 사과했죠.”

사이버범죄수사관이 되고 싶었던 ‘개발 꿈나무’

가끔 맏언니인 정(27)과 다퉜을 때도 사 남매의 둘째인 연주는 똑같았다. 고등학생이던 정이 연주에게 일주일 넘게 화나 있던 어느 날, 연주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쭈뼛쭈뼛 들어왔다. “언니, 내가 그렇게 행동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언니도 기분 나쁘다고 말 안 하고 그러지 말고 예전처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연주의 야무진 모습에 정은 부끄러워져 웃고 말았다.

네 살 터울이 느껴지지 않는 강단. 자존심 부리지 않고 사과하는 어른. 꼬인 관계를 쉽게 풀어내는 해결사. 언니 정에게 동생 유연주는 그런 존재였다.연주는 “아닌 것은 못 보아넘기는” 성격이었다. 하루는 중학생 연주가 길거리에서 시비 걸던 성인 남성에게 따끔하게 말했다가 위협을 당했다. 딸이 다칠까 염려된 어머니는 ‘남의 일에 끼지 마라, 봐도 좀 모른 척하라’고 연주를 말렸다.

“엄마, 난 성격상 그게 안 돼.” 연주의 대답은 명쾌했다.연주는 사이버범죄수사관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경찰이 되고 싶던 꿈이 대학에서 정보통신공학과 소프트웨어공학을 복수전공하며 구체화됐다. 연주는 2022년 10월18일 교내에서 열리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 경진대회에도 나갔다.

“연주가 대회 준비할 때 집에 와서 가족한테 ‘나 이제 좀 알 것 같아, 더 재밌어질 것 같아’ 그러더라고요.” 연주의 노트북 바탕화면엔 선배들에게 물어보겠다며 저장해놓은 개발 관련 참고 자료가 빼곡했다.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했다. 떡볶이가게와 카페, 예식장, 학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해 대학 등록금과 취업에 필요한 학원비를 벌었다.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친구들도 사귀었다. 또래 여섯 명끼리 어울리다 사소한 다툼이 있을 때면 연주가 팔을 걷어붙이고 중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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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 매칭 공무원은 강원도 지역 경찰

2022년 10월29일 밤, 연주의 부모님은 밤 11시30분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 아래에 ‘이태원에 다수의 CPR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 속보 자막이 떴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겠다며 이태원에 나간 연주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주 아버지는 곧바로 지하철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막차가 끊겼고 택시는 아예 잡히지 않았다.

30분을 우왕좌왕하며 헤매는데 경찰차를 세워둔 경찰관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우리 아이가 이태원에 있는데 한 번만 이송해줄 수 없냐”고 여러 차례 간청했지만 경찰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때 연주 학교 기숙사에서 전화가 걸려와 ‘연주가 서울성모병원에 있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진 아버지는 결국 차도에 뛰어들어 승객이 타고 있던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승객이 합승을 허락해줘 연주가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성모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행정안전부는 참사 다음날인 10월30일에야 ‘응급실을 방문하는 유가족에게 순찰차를 적극 지원하라’는 공문을 일선 경찰에 보냈다.10월30일 0시40분, 응급실에 겨우 도착해서 소생실로 향했다. 가족 도착을 연락 받고 기다리던 의사는 도착 10분 만에 사망 선고를 내렸고, 병원 쪽은 소생실을 비워달라고 했다. 반듯이 누운 연주는 옷을 하나도 입고 있지 않았다. “연주 옷이 언제부터, 왜 벗겨진 건지 모르겠어서 병원에 연락했더니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옷을 폐기했다’고만 했어요. 연주를 이송한 구급대원들도 트라우마 때문에 이송 상황에 대해 말씀을 못해주겠다고 하고요.”

정은 알아봐야 할 게 많았다. 당장 장례를 치러도 되는지부터 혼란스러웠다. ‘유가족에게 일대일 매칭 공무원을 붙이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브리핑을 보고 구청과 경찰서, 주민센터로 전화를 돌렸다. 돌아온 것은 “지시받은 게 없다”는 말뿐이었다.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리고 답변을 기다린 지 약 7시간이 지나, 강원도의 지역 경찰 2명이 일대일 매칭 공무원이라며 연락했다. 그들은 장례비 지원 절차를 알려준 뒤 “영수증을 잘 챙기라”고 안내했다. 이튿날 그들은 강원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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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쁘고 든든했어” 입이 닳도록 말해주고 싶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이는 없고 이것저것 하라는 이만 많았다. 가족이 연주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려니 병원 관계자가 ‘검안서(의사가 작성)와 검시서(검사가 작성)를 발급받아야 한다’며 다른 병원 이송을 막았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는 경우 가족이 검시·검안서를 지참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사망자를 이송 받는 병원이 이를 작성할 수도 있는데 병원 쪽은 관행을 고집했다. 가족은 검시서를 받으러 서초경찰서를 두 차례 들르고 병원 검안서도 발급받은 10월30일 밤 11시께야 연주를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병원에 있던 경찰은 연주 가족에게 ‘부검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가족은 거부했다.연주가 떠난 지 6개월이 흘렀지만 가족은 여전히 연주가 살아 있을 것만 같다. “아직도 연주네 학교 기숙사에 가면 연주가 있을 것 같고 방학 때 집에 오기로 했던 게 좀 늦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이 말했다.연주는 매주 금요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기숙사를 나와 주말엔 집에서 머물렀다. 처음엔 금요일마다 연주가 그립더니 한 달이 지난 뒤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었다”.

정은 연주와 수다를 떨었던 산책로, 연주가 마중 나왔던 퇴근길을 늘 지나친다.정은 연주와 함께 입었던 옷과 신발을 가끔 꺼내 입으며 연주를 떠올린다. 한번은 꿈에서 연주가 마주 걸어오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꽉 안아주기도 했다. “연주가 있을 때는 예쁘다, 잘한다 이런 얘기를 부끄러워서 잘 못했는데 떠나고 나니까 그게 후회가 많이 돼요. 다시 연주를 만나면 입이 닳을 때까지 말해주고 싶어요. 네가 너무 예쁘고 든든하다고, 그래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친구 연주야, 나는 너의 6년지기 친구 병관이야.

너를 떠나보낸 지도 벌써 100일이 넘어가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네. 전화하면 왠지 받을 것 같고 계속 옆에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하루하루 너가 있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더라.

고등학생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끈기있고 열심히 살아 온 내 친구 연주야, 지켜보면서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걸 항상 느꼈어. 공부부터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그리고 자격증까지 척척 잘 해냈잖아. 너를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고 나도 알바도 해 보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

우리 미래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었잖아. 그런 얘기 할 때마다 의미있고 되게 좋았는데 그치? 우리 우주 밖에는 뭐가 있을까 이런저런 상상도 많이 했었다? 너 엄청 적극적이였는데 우린 역시 이과인가봐 ㅎㅎ

나는 매일매일 우리가 함께했던 사진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어. 보니까 우리가 22년도에는 많이 만났더라구. 너가 먼 여행 떠나기 2주 전 10월14일 같이 마라탕 먹었잖아. 먹고 내가 귀가하자고 했는데 그때는 특별하게 너가 커피도 먹자고 했고 타로도 보자고 했고 탕후루도 먹자고 했잖아. 유독 다른 날에 비해서 하고 싶은게 많았더라. 너가 마지막인 걸 알아서 나랑 많이 추억 쌓으려고 한 걸까? 하나라도 더 같이 뭐 해보고 놀아볼걸….

그래도 나는 크게 후회는 없어. 연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마라탕이랑 탕후루 사준 것들 맛있게 먹어줘서 너무 고마웠어. 마지막 추억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아 후련해.

요즘 신승훈의 ‘미소속에 비친 그대’라는 노래를 듣다가 너가 너무 생각났어. 너 웃는 모습 예뻤잖아. 같이 찍은 사진들 속 너가 항상 웃고 있어서 더 생각났던 것 같아.

많이 보고싶다. 널 과거로 두기엔 너무 소중한 사람이였어.

어떤 베스트 댓글에 그게 있더라.

해는 낮에 빛나고

달은 밤에 빛난다.

밤낮으로 노력한 너는

이제 빛날차례다.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니 그 곳에서는 빛내며 살아갔으면 좋겠어.

가서 하고 싶은거 다 누리면서 편하게 잘 지내야 돼. 어디서든 잘 할거라 믿고 있어.

밝은 미소로 긍정에너지를 뿜었던 봄날의 햇살 같은 연주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도 계속 계속 영원히 함께하자. 항상 우정하고 사랑하고 고마워.

from. 나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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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영상 박승연 피디 ye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