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에서 뉴시니어라이프가 주최한 ‘전통과 현대를 입다’ 패션콘서트가 열렸다. 84살 이동열(오른쪽)씨 등 50~80대 남성 7명이 런웨이에 섰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현장
하얀 런웨이(패션쇼 무대) 위로 수십개의 조명이 쏟아졌다. 우아하게 거닐던 중년의 여자들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 음악이 바뀌자 7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자신만만한 워킹과 거침없는 턴에 반백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휘날렸다. 그러나 무대 중간에서 여럿이 겹치며 동선이 꼬이고 말았다.
짧았던 리허설 시간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 최연장자인 이동열(84)씨는 다른 모델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이씨는 “허리에 협착증이 있어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한데 움직이면 괜찮다. 모델 하는 데 아무런 지장 없다. 시니어 모델을 4년 동안 하면서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중국, 백두산까지 갔다 왔다”고 말했다.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거침없는 워킹과 턴 팔순 나이에 해외 공연까지
오빠라고 불러줘 “허허~” 신경통 가시고 굽은 등도 반듯
“일흔 넘어 드디어 물 만나” 아내 권유로 함께 해
부부 모델로 기쁨 두 배 리허설 땐 꼬이기도 했지만
몇 시간 뒤 본공연 땐 호흡 ‘척척’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섬유센터에서 ‘전통과 현대를 입다’ 패션콘서트가 열렸다. 패션쇼를 주최한 뉴시니어라이프는 2005년부터 모델교실을 운영하며 50~80대 1400여명을 교육했다. 또 국내외에서 110회가 넘는 시니어 패션쇼를 공연한 사회적기업이다. 이종배 이사는 “매주 패션모델 연습을 하는 시니어의 육체·정신적 ‘젊음의 복구’ 효과가 대단하다. 시니어의 ‘당당한 노화’라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모델 보면 모두 젊은 사람뿐이야. 나이 좀 먹은 사람도 모델을 해야 노인도 옷을 해 입을 것 아니야. 모델 하면서 우선 내 발걸음이 달라졌어. 그전에는 비가 올 때 걸으면 바지가 다 젖었는데 지금은 비 한 방울 안 튀어. 나이 먹을수록 집에 있으면 안 돼. 잠이나 자고 잔소리나 하지. 여기 나오면 다 동생이지만 친구 같아. 여자분들은 나를 오빠라고 불러.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배우는 것도 많고 그 재미로 살아.”(이동열씨)
리허설을 마친 뒤 대기실에서 7명의 남자 모델들은 다시 동선을 맞춰보느라 바빴다. “자기 자리에서 나갔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저만치 왔을 때 우리가 나가야지.” “지금 세 분 나오세요.” “겹칠 때 중간 턴하고, 여기서 3초를 머물러야 해.” “조금만 오른쪽으로 서세요.” “아니야, 아니야. 갔다 와서 최대한 넓게 서자고.” 김종열(54)씨는 “시니어 모델교실이 성북구, 강남구, 서초구에 있는데 오늘은 성북교실과 강남교실이 합동공연을 하게 됐다. 7명이 오늘 처음 모여 지금 순서를 맞추고 있다. 연습할 때는 이래도 실전에 나가면 다 잘한다”고 말했다.
몇시간 뒤 본공연에 들어가자 7명의 호흡이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졌다. 전문모델과 다름없는 당당한 워킹에 객석에서 감탄사가 터지고 박수가 쏟아졌다.
“제가 베이비부머 끝 세대인데 그동안 일만 죽어라 열심히 했잖아요. 일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죽을 둥 살 둥 살았는데, 이제는 내 삶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집사람이 텔레비전에서 시니어 패션쇼를 보고 ‘저거 하고 싶다’ 해서 같이 시작하게 되었죠. 부부가 같이 하니까 더 즐겁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부부 모델이 별로 없어서 이쁨을 많이 받아요. 어르신은 여기 오면 우리처럼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 좋대요. 자세도 바로잡히면서 힐링이 되는 것 같다고 해요. 저도 원래 한쪽으로 짐을 메는 직업이라 어깨가 기울어졌는데 지금은 자세가 많이 좋아졌어요.”(김종열씨)
하늘색 바탕에 하얀 꽃을 자수로 놓은 독특한 정장을 입은 김길중(74)씨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정장일 거야. 여자들이 주로 입는 천을 끊어다 양복점에 남자용 정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젊을 때부터 그랬어. 의상실이나 양복점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입었어. 그렇게 평생 멋을 포기한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물을 만난 거지”라고 말했다.
20여년 건설업체를 경영하던 그는 1998년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아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 “2년 뒤 강원도 원주의 아파트에서 주차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포니가 있었어. 그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았지. 나야말로 폐차 직전의 자동차 신세가 아닌가 싶더라고. 폐차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나를 정비해야겠다 싶어 치악산에 들어가 움막을 치고 겨울을 났어. 그때 뇌 구조를 바꾸며 채식주의자가 됐지.”(김길중씨)
현재 강원도 춘천에서 채식 국수전문점을 운영하는 그는 올해 2월 시니어 모델교실에 등록했다. 서울에 사는 여동생이 먼저 패션모델에 도전했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오빠가 하면 잘하겠다”고 추천해서 시작하게 됐다.
“원래는 4개월을 배워야 무대에 설 수 있는 건데 나는 두달 만인 지난 4월 서울 청계천 패션쇼에 올라갔어.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야. 사람들한테 엄청난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어. 그 뒤로 매달 한두번씩 패션쇼에 섰고 오늘이 아홉번째야. 무대에 오르면 희열을 느끼지. 70대 중반이니까 쑤시는 데도 있고 신경통도 있는데 매일 몇시간씩 연습하다 보니까 그런 게 싹 사라졌어. 골반이 제자리 잡았는지 아픈 데가 없어. 구부정했던 자세도 반듯하게, 8자였던 걸음걸이도 바로잡았지. 지하철 환승할 때도 워킹 연습을 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일흔 넘어서야 좋은 버릇을 익힌 거지.”(김길중씨)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거침없는 워킹과 턴 팔순 나이에 해외 공연까지
오빠라고 불러줘 “허허~” 신경통 가시고 굽은 등도 반듯
“일흔 넘어 드디어 물 만나” 아내 권유로 함께 해
부부 모델로 기쁨 두 배 리허설 땐 꼬이기도 했지만
몇 시간 뒤 본공연 땐 호흡 ‘척척’
직접 디자인한 정장을 입고 나온 74살 김길중씨는 “평생 멋을 포기한 적이 없었는데 올 초 패션모델을 시작하면서 물을 만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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