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으면서 정말 마음 치유가 됐어요. 앞으론 행복하게 살아야죠.” 1970~80년대 간첩조작 피해자인 이사영(왼쪽부터), 김순자, 최양준씨가 지난 31일 낮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가 열리는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의 5층 전시공간에서 자신들이 찍은 사진 앞에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기쁠 때도 가슴 한켠에 불안과 우울이 스멀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독재정권 때 간첩으로 조작돼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이들이다.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어도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이들이 스스로 아픔을 보듬고, 자신들을 외면했던 사회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이들에게 힘을 준 건 사진이다. 그 사진을 모은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가 10월31일부터 11월17일까지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다.
1974년 조작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이사영씨가 제주도에서 찍은 화산석에 자라는 다육이 사진. 이씨는 “먼지가 쌓인 좁은 틈에서 생물이 사는 게 신기했어요. 나도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 살기는 했지만, 사람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공감아이 제공
작은 선인장 등 앙증맞은 다육이가 몇개 자라고 있는 제주 화산석 사진(①번)이 벽면에 붙은 큰 모니터에 띄워졌다. 탁자에 둘러앉은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이거 어디서 찍은 거예요?” 사진치유가 임종진(이하 존칭 생략)이 이사영에게 물었다.
“지난주 제주도로 강광보를 보러 갔을 때 아침에 동네 산책하다가 담 앞에서 만났어요. 먼지가 쌓인 좁은 틈에서 생물이 사는 게 신기했어요. 나도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 살기는 했지만, 사람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이사영)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김순자(왼쪽부터), 최양준, 이사영씨가 사진치유가인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와 함께 지난 31일 낮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5층에 마련된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도 며칠 전에 길거리를 가다가 콘크리트 사이를 뚫고 올라와 피어 있는 꽃 한송이를 봤어요. 이야, 식물들도 생명이 질기고 모질구나는 것을 느꼈어요. 그걸 찍었어야 하는데 놓쳤어요.”(최양준)
“누가 심었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저걸 보면 모진 고문과 세월을 이기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게 느껴져요. 감옥에 있을 때 여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돼서 교도관에게 내가 살아서 나갈지를 물어보기도 했어요. 이사영 선생님은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김순자)
“저도 못 나올 줄 알았어요.”(이사영)
“10년 구형(2심에서 5년형 확정)을 받았는데 너무 아득했어요. 어린아이 3명의 밥을 먹여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니까 얼마나 안타깝던지….”(김순자)
“자장면이나 맛있게 먹읍시다. 괴로웠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해요.”(최양준)
셔터 누르는 법만 가르쳐
작은 식물 사진 한 장에 아픈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감정이입이 깊어지다가 점심으로 주문한 자장면의 등장으로 겨우 분위기가 밝아졌다. 지난 21일 낮 서울 은평구에 있는 서울혁신파크 한 회의실에서 있었던 한 장면이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 사진치유전(10월31일~11월17일,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의 주인공들이 전시 개막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하러 모였다. 지난 3년 동안 임종진과 함께 사진을 찍어온 김순자(74), 이사영(81), 최양준(80)이 그들이다. 제주에 사는 강광보(78)는 건강이 안 좋아져 참석을 못 했다. 김순자의 동생인 김태룡(70)도 같이 시작했지만, 그는 지난해 10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70~80년대 간첩조작 피해자인 이들이 임종진과 만난 건 2015년이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인권단체인
‘지금 여기에’가 간첩조작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임종진(㈜공감아이 대표)에게 연락했다. 광주 5·18 피해자들과도 사진을 통한 치유작업을 한 임종진은 기꺼이 수락했다. 2016년 초부터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일종의 집단 상담을 통해서 각자의 얘기를 하면서 상대방의 처지에 귀를 기울이는 거죠. 그러면서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진 찍기는 그 다음입니다.”(임종진)
1979년 조작된 ‘삼척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5년간 감옥에 살았던 김순자씨가 찍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있는 사출구(사형당한 이의 시신을 운반하던 곳) 사진. 김씨는 “1983년 아버지가 여기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공감아이 제공
서로 잘 알게 된 뒤에야 임종진은 이들에게 작은 디지털카메라 한 대씩을 나눠줬다. 켜고 끄는 법과 셔터 누르는 방법만 알려주고는 주변의 풍경 등 마음에 드는 것부터 찍으라고 말했다.
“구도 잡기니 노출이니 등등은 설명하지도 않았어요. 사진은 자기 상처를 대면해서 직시하고, 원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구일 뿐이죠. 과거의 진실 규명도 필요하지만, 오늘을 어떻게 행복하게 사느냐가 이분들에게는 더 중요하거든요. 그걸 위해 저는 동행만 했던 거죠.”(임종진)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자기 집이나 동네 공원, 텔레비전 화면 등등을 찍어왔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서로의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자신들이 안고 있는 상처의 뿌리가 드러났고, 상처받은 현장을 직접 가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2016년 6월 마침내 이들은 임종진과 함께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았다. 하지만 30여년 만에 대면한 고통의 현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당황했으며, 울기도 했다. 임종진은 가슴 아파하는 이들을 가만히 감싸안고 위로했다. 두번, 세번 방문이 이어지자, 이들은 스스로 일어섰다. 혼자서 곳곳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에 보고 느낀 것을 담았다. 사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실어내는 사출구를 찍은 김순자의 사진(②번)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처음에는 저곳을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두어번째 가서 제대로 들여다봤지요. 사형장을 둘러보고 사출구에 섰을 때 아버지(김상회)가 30여년 전에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처음 잡혀왔을 때보다 공포심이 몇배나 더 심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식들이 여기서 빨리 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하더라고요. 죄도 없는 생사람을 그렇게 잡았으니….”
일본에서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1982년 한국으로 송환돼 졸지에 간첩으로 만들어진 최양준씨가 찍은 부산 보안대가 있던 곳의 언덕. 최씨는 “처음에는 그곳을 가기가 두려웠는데 다녀와서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공감아이 제공
“상식있는 판사라면 무죄 선고했어야”
김순자는 1979년 6월 서울 영등포의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다짜고짜 끌려갔다. 그가 잡혀간 곳에는 부모와 동생 등 친정 식구뿐 아니라 아버지의 외가(진항식) 쪽 식구들도 고문을 받고 있었다. 매타작보다 좁은 창문과 방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가족들의 비명 소리가 견디기 더 힘들었다.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수시로 ‘동생(김태룡)한테 가서 전기고문 해라, 고춧가루를 부어라’고 하는 협박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대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삼척사건은 애초 기껏해야 불고지죄 정도에 불과했다. 6·25 때 행방불명됐던 진현식(항식의 둘째형)이 1968년 북에서 내려와서 삼척의 바닷가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어머니와 동생(항식) 등을 만난 뒤 북으로 돌아가던 그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자, 이웃 근덕면에 사는 고종사촌(김순자의 아버지) 집에 한동안 머물렀다. 상처가 도진 진현식은 골방에만 숨어 지내다 몇년 뒤 스스로 사라졌다. 그때 진현식을 만났던 양가 식구 12명은 11년 뒤 경찰에 의해 가족 간첩단이라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썼으며, 진항식과 김상회는 198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1968년에 애기 낳고 친정에 갔다가 아버지의 외가 사촌동생이란 분을 잠깐 만났을 뿐인데 국가는 저를 간첩으로 만들었어요. 남영동에서 조사받을 때 거리가 없으니까 저보고 군부대를 본 일이 있느냐고 추궁하더군요. 삼척 사람들은 인근의 군부대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데 말이죠. 경찰, 검사들이 엉터리로 꾸민 것도 말이 안 되지만, 판사들은 상식만 있어도 우리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막내 동생(태일)은 1968년에 중1이었어요. 그런데 그 애가 군대 지뢰 묻어놓은 것을 적에게 알려줬다면서 간첩으로 판결했어요. 그게 말이나 돼요? 생각할수록 억울해요.”
김순자는 말끝에 “그 엄혹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요즘은 걸핏하면 눈물이 나와요”라며 목이 메고 말았다. 임종진이 “울고 싶을 땐 우셔도 돼요. 자기 내면의 감정을 일부러 억제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김순자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뒤 임종진은 최양준이 찍었던 사진들을 모니터에 올렸다.
민간인이던 최양준은 1982년 군 보안사령부(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15년형을 받고는 9년을 감옥살이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전남 화순)에서 상경해 목공일을 배웠던 그는 결혼 뒤인 1975년 돈을 많이 벌 생각으로 단기 비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목수일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불법체류 중이던 그는 일본인의 도움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어 서울의 가족들을 보러 여러차례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82년 일본 경찰에 여권법 위반으로 붙잡혀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는데, 그를 기다린 사람들은 부산의 보안대 요원들이었다.
“처음에 보안대로 끌려갈 때 보니까 대문에 ‘삼일공사’라고 쓴 나무 간판이 있길래 무슨 건설회사인 줄 알았어요. 건물 지하실로 바로 끌려갔는데 바닥에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어요. 수사관들이 ‘이게 왜 빨간지 아느냐. 피로 물든 거다’라고 겁을 주고는 저보고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서 각종 고문을 시작했어요. 성기와 양쪽 손가락에 전기를 흘리는 전기고문, 손톱 밑을 이불 꿰매는 긴 바늘로 찌르는 고문은 정말 참기 어려웠어요. 가짜 여권을 들고 다닌 죄밖에 없는데 고문으로 무시무시한 간첩이 되고 말았어요.”
“지나간 시절이 억울하지만
그런 시절 다신 못 오게 하려면
힘내 눈 부릅뜨고 지켜야죠”
삼척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고 김태룡씨가 생전에 찍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조사실 모습. 김순자씨의 동생인 그는 1979년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공감아이 제공
울릉도 간 적도 없는데 ‘울릉도 간첩단’ 돼
최양준은 이러다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자식들이라도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죽자는 생각에 보안대 화장실의 좁은 창문 틈으로 빠져나간 뒤 높은 철조망 담을 넘었다. 담벼락 옆에 있던 한 가정집에 숨어들어갔지만, 피 묻은 군복 등 자신의 몰골을 보고는 스스로 도망을 포기했다. 그는 이후 부산에서 서울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압송된 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최양준이 찍은 부산 보안대 담장 자리 사진(③번)은 그의 내면 깊숙이 남아 있는 아픔에 대한 기록이다.
“최 선생님은 부산 보안대 자리를 가는 데 처음에는 심한 거부감을 보였어요.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그런 거예요. 동료 선생님들과 서대문형무소 등을 다니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자신감을 생겼어요. 거길 다녀온 뒤에는 서빙고 보안대 자리 등도 씩씩하게 찾아다녔고요. 과거를 직시하면서 이를 극복한 것이죠. 아마 카메라 없이 그냥이라면 못 갔을 거예요. 카메라는 자신을 숨기는, 그래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도구거든요.”(임종진)
1985년 보안대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됐던 강광보씨가 고향인 제주시 화북동의 외갓집 돌담을 찍은 사진. 강씨는 재심을 통해 받은 보상금으로 지난 7월 제주시에 조작 간첩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인 ‘수상한 집’을 열었다. ㈜공감아이 제공
“너무나 고통을 받은 곳이어서 부산 보안대 자리는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사진을 찍으면서 가볼 용기를 냈어요. 그래도 혼자 가기는 힘들어서 김태룡이 같이 가줬어요. 그와는 만난 지 얼마 안 됐어도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지난해 갑자기 죽어서 빈소에서 엄청 울었어요.”(최양준)
울릉도에는 가본 적도 없던 이사영은 1974년 무려 47명이 엮인 간첩망(‘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주요 조직원으로 만들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조작한 사건이었다.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일군 이사영의 형 이좌영(2008년 작고)과 만났거나 인연이 있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죄다 묶었다. 공안당국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좌영을 간첩으로 몰았지만, 그는 유신 등 독재에 반대했을 뿐 고국에 일찍부터 투자했던 민단 소속의 선량한 사업가였다.
“1974년 2월15일 새벽 서울 장안동 집에서 이문동 중앙정보부 분실로 끌려갔어요. 야전침대 각목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나중에는 물고문까지 했어요. 결국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썼죠. 형(좌영)이 듣다가 두고 간 라디오는 제가 간첩질을 한 결정적 증거로 둔갑했고요.”
이사영은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여를 감옥에서 보내다가 1987년 말 가석방됐다. 그는 이문동 정보부 건물이 있던 곳이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을 다녀올 때마다 집안 곳곳을 사진에 담았다.
“과거의 상처를 대면한 뒤 현재의 안전한 공간을 확인하고픈 거죠.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상처를 차츰 치유해 나가죠.”(임종진)
1985년 보안대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됐던 강광보씨가 고향인 제주시 화북동의 외갓집 돌담을 찍은 사진. 강씨는 재심을 통해 받은 보상금으로 지난 7월 제주시에 조작 간첩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공간인 ‘수상한 집’을 열었다. ㈜공감아이 제공
“순자씨 울지 말고 가해자처벌법 만듭시다”
긴 세월 간첩으로, 2011년 이후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에는 간첩조작 피해자로 사는 이들이 찍은 사진 중 약 300점이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의 5층 옛 조사실 대부분(16개 중 박종철 조사실과 김근태 기념관을 뺀 13개 방)을 ‘점령’했다. 지난 31일 낮 임종진과 함께 전시공간을 둘러보던 이들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돌았다.
“와, 이것들이 우리가 찍은 거 맞아요? 작품이네요.(웃음) 그동안 여기 올 때마다 마음 한켠이 무거웠는데 오늘은 가볍고 좋아요. 임종진 선생님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해냈고, 마음 치유가 많이 됐어요. 지난 시절이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힘내서 지켜봐야죠.”(김순자)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사진을 찍다 보니까 마음이 몰입됐고, 내가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일을 하는구나는 기쁨을 맛봤어요. 마음속의 상처가 남아 늘 우울한 기분이었는데 그것도 어느새 다 없어진 것 같아요.”(이사영)
“대상이 좋아서 무심코 찍었지만 지금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을 보니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이제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살다 갈 생각만 하자고요. 순자씨도 앞으로는 울지 말아요. 대신 힘내서 반드시 가해자처벌법을 만들자고요.”(최양준)
모진 역사의 피해자가 더이상 아니라 현재를 바꾸는 역사의 주체로 다시 선 용기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