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기획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 ③ 묶인 시간
3개월 전 자진출국 신고했는데도
코로나19로 벌써 5차례 출국 연기
고용허가 받은 외국인 입국 적체로
이주노동자로 재입국 계획도 흔들
유학 비자 받기로 방향 바꿨으나
한국어능력시험 취소 등으로 차질
호준 “자진출국 신고 괜히 했나”
호준과 호이준 사이 ③ 묶인 시간
3개월 전 자진출국 신고했는데도
코로나19로 벌써 5차례 출국 연기
고용허가 받은 외국인 입국 적체로
이주노동자로 재입국 계획도 흔들
유학 비자 받기로 방향 바꿨으나
한국어능력시험 취소 등으로 차질
호준 “자진출국 신고 괜히 했나”
지난 6월16일 수도권의 한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간 호준이 미리 준비해 간 양식을 보면서 자진출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4개월째 대기중인 여행가방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것 같아요.” 석 달 전(6월16일)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자진출국’ 신고(▶1회 기사)를 마쳤을 때 호준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7월15일까지 반드시 한국을 떠나라는 ‘무서운’ 출국명령서(당시 출국 예정일은 7월14일)를 받아든 그는 “내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 처음으로 뭔가를 시도했다”며 오히려 뿌듯해했다. 6살 때 엄마를 따라 입국해 몽골 이름 호이준(가명) 대신 한국 이름 호준으로 22년을 살아온 그는 엄마가 미등록이란 이유로 ‘불법체류 외국인’일 뿐이었다. 나이 서른을 앞둔 그의 시간은 기억도 나지 않는 호이준이 아니라 ‘나는 한국인’이라고 믿어온 호준의 삶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 생활도 ‘불법체류’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초중고를 한국에서 다니며 한국인처럼 성장해온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단속 대상(‘학습권 지원 차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강제퇴거가 유예되지만 졸업과 동시에 유예 종료)이 됐다. 지난해 12월 법무부는 올해 6월 말까지 자진출국을 신고(4만6128명)하는 미등록 외국인에 한해서 범칙금을 면제하고 출국 뒤 재입국 심사 기회를 준다고 발표했다. 장기체류 미등록 아동·청소년(최소 7800명에서 최대 2만명 이상 추정)을 위한 체류자격 부여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은 한국에서 자기 이름으로 운전면허를 따고, 신용카드를 만들고, 알바가 아닌 직장을 갖고, 무엇보다 쫓기지 않고 살려면 호준의 정체성을 버리고 호이준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호준으로도 호이준으로도 환영받지 못했던 그가 ‘한국에서 계속 살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은 그동안 피해 다녔던 출입국·외국인청을 제 발로 찾아가는 일이었다. 호준이 서명한 출국명령서는 명령했다. “출국 기한 2020년 7월15일. 7월15일 이내라도 항공편 운항 재개 즉시 출국하여야 함. 7월15일 내 출국 항공편이 재개되지 않을 경우 재방문하여 연장받아야 함.” 지난 2월 말 날개를 접은 몽골행 비행기는 그 후 한 번도 날아오르지 못했다. 호준은 두 차례 더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 출국명령서 하단에 ‘연장 확인’ 도장을 받았다. 출국 연기가 일상화되자 출입국·외국인청은 지난 1일부터 온라인으로만 연장 신청을 접수했다. 먼저 마스크. 여행가방의 맨 앞자리엔 마스크를 넣었다. 덴탈 마스크부터 KF94 마스크까지 다양하게 샀다. 그 뒤엔 휴지, 속옷, 양말, 비누와 치약·칫솔, 샴푸, 면도기, 수건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의료용 밴드와 배탈약 같은 비상약도 챙겼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파래김도 빼놓지 않았다. 호준은 몽골에 도착하면 방침상 3주간의 시설 격리를 거쳐야 했다. 그는 격리 기간 동안 사용할 생필품 위주로 가방을 쌌다. 몽골에서 신세질 친지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비좁은 가방에 눌러 담았다. 그렇게 꽉 채운 가방이 호준의 방 한쪽에서 4개월째 대기 중이었다. 호준은 노트북도 한 대 사서 여행가방에 넣었다. 외장하드에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수십 개를 내려받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몽골에 있을 동안 한국말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볼 영상들이었다. 인터넷 속도가 느린 몽골에선 보고 싶어도 제때 못 볼 것 같아 미리 ‘대비’했다.
출국을 앞둔 호준이 급하게 챙긴 물품들. 몽골 입국 뒤 시설격리 3주 동안 사용할 생필품과 호준이 의탁할 친지들에게 줄 선물 위주로 준비했다. 호준 제공
한국어능력시험도 취소 출국 뒤 재입국은 불투명한 미래였다. 법무부의 ‘약속’(자진출국자들에겐 재입국 심사 기회 부여)을 믿는 수밖에 없었지만 실제로 돌아올 수 있을진 확신하지 못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결심한 자진출국이 지구적 재난 탓에 기약 없이 미뤄지자 호준의 머리도 복잡해졌다. 출국을 마음먹었을 때 그는 고용허가제(E-9 비자: 체류 기간 3년~4년10개월)를 통해 돌아올 계획이었다. 호준은 고등학교 졸업 뒤 전자부품 공장에서 일해왔다. ‘몽골인 이주노동자’ 신분으로 재입국해 제조업 쪽에서 일하길 바랐다. 코로나 사태로 호준의 상황도 겹겹으로 꼬이고 있었다. 출국 신고자들이 한국 밖으로 ‘나가는 길’뿐 아니라 외국에서 고용허가를 받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도 차단돼 있었다. 올해 3분기까지 한국 정부가 고용허가서를 발급한 외국인은 2만8325명(고용노동부 집계)이었다. 그들 중 지난 4일까지 입국한 사람은 1652명뿐이었다. 입국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2주 격리를 의무화한 4월1일부터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입국도 멈춰 세웠다. 현재까지 2만6천명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체류 자격을 얻고서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는 당분간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가 걸어 잠근 출입국 문이 열리더라도 “적체된 인원들이 해소돼야 이후 허가받은 사람들의 입국 기회가 주어질 것”(고용노동부 담당자)이었다. 호준이 올해 안에 출국해 최대한 빨리 고용허가를 받아도 내년 안에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지역사회 코로나19 감염 확산 상황에 따라….” 지난 8일 호준이 한국어능력시험(토픽) 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지사항에서 ‘제73회 시험 접수 안내’를 클릭했다. 눈에 잘 띄도록 녹색으로 써서 글 첫머리에 올려둔 문장이 호준의 시선을 잡았다. “시험이 변경 또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 ‘시험일자’(11월5일)와 ‘접수방법’을 아래로 밀어낸 시퍼런 예고가 글 꼭대기에서 선명했다. 외국인이 한국 대학의 입시를 치르려면 토픽 성적(1~6급)을 일정 등급(학교·학과마다 기준 차이 남) 이상 받아야 했다. 언제 이주노동자가 돼 돌아올지 알 수 없는 호준은 취업 비자 대신 유학 비자(D-2)를 받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 대학생이 되면 ‘진학’이었지만 호준이 한국 대학에 입학하면 ‘유학’이 됐다. 합격하더라도 열 살 어린 동생들과 공부해야 하는 탓에 마음에서 밀어낸 유학이었으나 코로나19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했다. 입학 허가를 받으면 고용허가를 통하는 쪽보다 재입국 시기를 당길 수 있을 것으로 호준은 기대했다. 출국을 기다리는 동안 한국에서 토픽을 봐둘 생각이었다. “엇.” 예상치 못한 장면에 호준이 짧은 탄식을 뱉었다. 시험 접수 첫날인데도 호준은 접수에 실패했다. 호준이 인터넷 접수를 시도했을 땐 이미 응시 인원이 꽉 찬 상태였다. 지난달 19일 토픽 주관기관(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은 제71회 시험을 나흘 앞두고 취소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에 따라 “응시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응시 기회가 사라진 71회 시험 접수자들이 73회(72회는 71회 취소 전 접수 종료)로 몰리면서 접수 시작 당일(사흘간 접수) 조기 마감됐다. 호준은 서울·경기의 모든 시험장을 확인했으나 단 한 자리(시험 장소인 대학별로 응시 인원 할당)도 남아 있지 않았다. 코로나19 진행에 따라 72회 시험(10월18일)도 백지화될 수 있었다. 출국길은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었고, 이주노동자가 되기 위한 절차도, 유학생이 되기 위한 시험도,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빠진 바퀴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마음 급한 호준 앞에서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
자꾸 약해지는 마음 “자진출국 신고 괜히 했나.” 호준은 “뜻대로 되는 게 없어 자꾸 약해졌”다. “힘든 결정일수록 바로 행동에 옮겨야 후회할 틈이 없는데 잘한 결정인지 되묻는 시간”만 길어졌다. 출국명령은 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미등록으로 살려고 해도 출국신고 과정에서 주소지 등을 밝힌 이상 단속을 피해 숨을 곳은 없었다. 호준은 아직 “출국 뒤 재입국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토픽 시험 일정을 확인하며 알바(전자부품 공장)에 집중했다. 돌아오는 데 드는 비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하루 일당을 모았다. “어차피 나가기로 결정한” 호준에게 남은 바람은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는 것”이었다. 출국이 늦어지면 순조롭게 재입국하더라도 삶의 과정이 차례대로 늦춰질 것을 그는 걱정했다. “대학을 가도 같이 공부하는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점점 벌어질 거고….” 불안해지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를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감염병 사태의 추이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사실, 이대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이었다. 그 무력감에 지지 않으려고 힘든 결심을 했지만 그 결심의 실행마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호준은 어지러웠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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