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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정치 양극화의 시대, 통합의 바탕에 진실과 화해가 있다”

등록 2021-05-26 04:59수정 2021-08-11 12:58

안영춘 논설위원의 직격 인터뷰 | 정근식 2기 진실화해위 위원장

27일, 400여개 진실 규명 사건 조사 개시하며 본격 활동 돌입
형제복지원 등 인권적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 건 큰 진전
1기 때 ‘진실 규명 불능’ 결론 내린 사건도 끝까지 규명할 것

국군포로 등 남북 연관된 사건도 제도적 해법 찾는 노력 필요
과거 청산보다는 사죄와 용서의 화해 과정이 사회 통합 도움
미얀마 저항 시민들, 우리의 5·18 해법에서 자신들 미래 전망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24일 서울 중구 퇴계로 위원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24일 서울 중구 퇴계로 위원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27일 진실 규명 신청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개시한다. 이 문장은 대다수 뉴스 소비자의 큰 관심을 끌기에 아무래도 역부족인 듯하다. 위원회 이름부터 너무 길다. 직관적이지도 않다. 무엇보다 당장의 우리 사회 분위기가 하루하루 사생결단의 전쟁 같다면, 과거사를 정리한다는 건 먼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진실화해위원회는 최후의 희망이다. 지난해 12월1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 신청의 첫 테이프를 끊은 뒤로 3636건, 7443명(5월21일)접수됐다. 전쟁 같은 오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고, 실제 전쟁이었거나 전쟁 못지않았던 과거와 닿아 있다면, 과거사는 결코 먼 얘기일 수 없다.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처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진행형의 얘기다.

24일 진실화해위원회(서울 중구 퇴계로)에서 정근식 위원장(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을 만났다. 주요 현안과 함께, ‘진실’과 ‘화해’가 랑데부하는 지점과, 그 지점에서 열릴 지평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는 ‘기-승-전’을 거쳐 ‘결’로 향하다 중단됐다. 국군포로 피해자들이 사건 접수 뒤 면담을 요청했다는 전갈이 왔다. 정 위원장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가 20여분 뒤에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않으면 모든 면담 요청에 응하려고 합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우리가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귀를 가진 까닭이다.”(‘무제 1’) 1부와 2부로 나뉜, 좀처럼 드문 인터뷰를 하고 나서야 진실과 화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각기관이 ‘들으려는 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5년 12월1일 출범해 2010년 12월31일 활동을 마쳤다. 2기 위원회가 27일 조사를 개시하는데, 그때와 비교해 분위기가 어떤가?

“우선 신청 건수가 1기의 같은 기간과 비교해 150% 정도 많다. 전체적인 기대감이 높아졌다. 차분한 가운데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고 할까. 그때는 역사상 처음 하는 작업이었고, 진실 규명 이후의 전망이 뚜렷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번 경험을 한 뒤여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다. 다만, 이번에 처음 조사가 진행되는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같은 수용시설에서의 인권 침해 사건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모두 커 보인다.”

―세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공식적인 작업이 이전에는 없었나?

“1기 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 의문사 사건 등이 주로 다뤄졌다. 그때는 이른바 부랑자 수용시설, 아동 수용시설 사건이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대상이라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지난 10여년 사이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그 사건들 또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거라고 본다. 1기 위원회의 성과이기도 하다.”

2020년 5월7일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최승우(왼쪽)씨와 한종선씨가 여·야의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과거사법 20대 국회 내 처리에 합의 소식에 농성을 풀며 기뻐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2020년 5월7일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최승우(왼쪽)씨와 한종선씨가 여·야의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과거사법 20대 국회 내 처리에 합의 소식에 농성을 풀며 기뻐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두 범주의 피해자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나?

“한국전쟁 전후 피해자들이 주로 이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면, 수용시설 피해자들은 이념과 관련 없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침해로 고통을 받았다. 이념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트라우마의 차이랄까. 지금도 그분들 가운데는 가족에게조차 그런 시설 출신이라는 걸 밝히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번에 진실 규명 조사에 들어갈 첫 사건은 수용시설 피해 사건인가?

“아니다. 27일에 열릴 전체위원회 회의를 거쳐 확정되겠지만, 수용시설 피해자들을 포함해 지금까지 접수된 사건들에 대해 동시에 조사에 들어가려고 한다. 대략 400건 정도다.”

―조사 개시 일정이 늦어졌다. 야당 쪽의 위원 선정이 늦어져서 그런 걸로 아는데, 이 활동을 내켜 하지 않아서 생긴 일 아닌가?

“법령에 따르면 지난해 12월10일 법이 발효되는 시점에 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됐어야 한다. 국회에서 한달 정도 위원 선출이 늦어졌고, 도중에 한분이 사퇴하면서 9명 모두를 임명하는 데 석달이 걸렸다. 3월24일 위원회 구성이 최종 완료됐다. 그러나 조사 개시 결정과 함께 위원회 활동 기간이 산정되기 때문에 전체 조사 기간이 줄지는 않는다. 정치적 갈등 탓에 늦어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야 모두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데 합의한 만큼 위원회가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해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거라 기대한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때 조사했는데 다시 조사하는 사건도 있나?

“이미 조사했던 사건의 신청이 접수된 경우도 있다. 다만 그때는 ‘진실 규명 불능’으로 결론 내린 것이나 배상·보상 소송 기회를 놓친 사건들이 일부 있다. 2기 때는 제대로, 끝까지 규명하려고 한다. 여건이 나아진 덕분이다. 지난 10여년 사이 우리 사회가 더욱 민주화됐고, 관련 자료를 갖고 있는 기관들도 과거보다 협조적으로 변했다. 5·18만 봐도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걸 실감한다.”

―위원장은 5·18 민주화운동이나 과거사 문제를 오래 연구해왔다. 과거와 뭐가 얼마나 바뀌었나?

“과거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 공개되고 있다. 국방부, 국정원 같은 기관들이 협조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가해 책임자들의 사죄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이것이 중대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를 기반으로 화해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lt;한겨레&gt;와 인터뷰 중인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와 인터뷰 중인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2기 위원회는 1기보다 활동 기간도 짧고 규모도 작은데, 오히려 신청 사건은 크게 늘었다. 조사관들이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기는 조사 개시일로부터 3년에다 1년을 연장할 수 있게 돼 있다. 활동 기간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4+2년으로 늘리는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다. 신청된 사건들을 제대로 조사하려면 활동 기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위원은 15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조직도 1기 때보다 작은 규모다. 아직 조직 구성이 완료되지 않아 조사관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을 정확히 가늠하기 이르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 분명하다. 올해 안에 인원을 더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

진실 규명 조사는 사건 수사와 다른 전문성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위원회 조사관에는 검경의 수사 경험자들과 1기 위원회나 다른 위원회의 조사관 출신들이 다수 있다. 수사는 범죄 혐의를 다루는 것이다. 조사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권리 침해를 다루는 것이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치밀한 과학적 수사 노하우가 접목돼야 한다. 기본적으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되 객관적 진실 추구를 위해 자료와 다른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교차검증하는 것이 진실 규명을 위해 중요한 조사다.”

―법령상 조사 대상에 ‘권위주의 통치 시’라는 제한이 있다. 1기 때는 이 규정을 들어 ‘동의대 사건’(1989년 5월3일)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2기에서는 언제까지로 보고 있나? 가령 이명박 정부 때 방송 탄압은 권위주의 통치 시 국가폭력에 해당하지 않나?

“1기 때는 이를 김영삼 정부 출범 이전으로 해석했다. 다만 1기 위원회 마지막 위원장 기간에 이를 1987년 6월로 축소해서 일부 사건이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사실이다. 2기 위원회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상식적 수준에서 이를 검토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전과 후로 인권의 역사를 과거사와 현대사로 구분해 영역을 나누는 게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신청된 사건 가운데서도 기술적으로 조사가 어려운 경우는 없을까?

“있을 수 있다.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되어 있는 항목 외에 위원회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판단한 사건들을 조사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정부 부처와 상의해야 하고, 국회에서 법 개정 때도 참고하도록 해야 한다. 국군포로 문제도 깊이 연구해야 할 사안이다. 남북관계나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과거사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도 미리 연구하려고 한다.”

2003년 ‘칼기 폭파사건 16주기 추모식’에서 실종자 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2003년 ‘칼기 폭파사건 16주기 추모식’에서 실종자 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도 다루도록 돼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런 사건이 있나?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 예가 될 수 있다. 동체가 인양된다면 조사 범위에 들어올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을 신청하지 않았다.”

―위원회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과거사, 진실, 화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진실과 화해 사이에는 가운뎃점이 찍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특정 사건이나 분야가 아니라 국가폭력 전반을 다룬다. 단순히 사실관계만 조사하는 것도 아니다. 진실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화해 조처를 통해 국민 통합을 지향한다. 더 길게 보면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까지 포함한다.”

―진실을 밝혔으면 잘못을 철저히 처벌하는 청산이 필요한 거 아닌가?

“제1의 원리는 진실이다. 그 진실에 기초해 처벌로 가는 길이 있고, 화해로 가는 길도 있다. 무원칙한 화해는 의미가 없다. 한편으로는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책임이 곧 처벌을 뜻한다고 보지 않는다. 책임을 인정하면 사죄해야 하고, 용서가 나올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진실과 관련한 중요한 패러다임이 청산론이었다. 그러다 ‘이행기의 정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대에 합의된 진실이 다음 세대에서 재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다. 이렇듯 진실이 진행형이라면 화해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탈진실의 시대’라고도 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같은 사안을 놓고 진실이 대립되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팽배해 있다. 위원회 앞에 격랑의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녹록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앞날을 낙관한다. 첫째, 진실에는 좌-우도 없고 진보-보수도 없다. 둘째, 여야 합의로 위원회가 출범했다. 셋째, 근래 야당도 극단적 견해를 배제하고 중도적 견해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나. 넷째, 남북관계는 우리 위원회 활동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개선될 여지가 생겼다. 대화가 재개되면 가령 국군과 유엔군 전사자가 많이 묻혀 있을 함경 장진호 일대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을 제안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lt;한겨레&gt;와 인터뷰 중인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와 인터뷰 중인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끝으로, 지금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폭력 피해자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이유를 말해달라.

“앞서 기자가 말한 대로 현대는 탈진실의 시대고,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라는 게 진실화해위원회가 필요한 이유라고 본다. 진실에 기초한 투명하고 통합적인 사회의 건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사고로는 합의된 진실에 이르기 어렵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 입장에도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화해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다. 한편으로는 양극화의 힘이 작동하지만, 동시에 통합적인 힘도 못지않게 작동하고 있고, 통합적인 힘의 밑바탕에 진실과 화해가 있다고 믿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2기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전 구성원이 활동할 것이다. 우리나라 내부와 남북을 통합시키는 정신적 자산을 만들어내고, 세계적으로도 귀감이 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미 우리는 모범을 향해 가고 있다. 미얀마의 저항 시민들은 5·18에 대한 우리의 해법을 자신들이 20~30년 뒤 가야 할 길로 그리고 있다고 하지 않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빌딩 앞에서 두 사람이 ‘부당해고’를 주장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다룰 수 없는 현재의 사건이었으나, 이 위원회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삽화였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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