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시 구로동 구로리어린이공원에서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조각천을 펄럭이며 제기를 공중에 띄우는 ‘협동제기’를 한 뒤 몸을 천 안에 숨기는 놀이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지난 24일 오후 4시30분께 서울 구로동 구로리어린이공원. 여덟살 아이가 노래에 맞춰 긴 줄을 폴짝 뛰어넘고 있었다. 옆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놀이터 활동가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었다.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노래가 이어질수록 아이의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짚어서 짚어서 만세를 외쳐라.” 아이가 줄을 넘으며 자꾸 앞으로 움직이자 지켜보던 할머니가 가운데에서 뛰라고 코치했다. 할머니 말을 따른 아이가 노래가 끝날 때까지 줄을 넘는 데 성공했다. “꼬마야 꼬마야 잘 가거라.”
요즘은 놀이터에 모여 함께 뛰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친구들끼리 모여서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모습이 더 흔하다. 볼이 빨갛게 되도록 땀을 흘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만난 곳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움직이는 놀이터’ 현장에서였다.
서울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3개 자치구에서 ‘놀이터 활동가와 함께하는 움직이는 놀이터’를 운영하고 있다. 놀이터 활동가는 놀이 관련 자격증(전래놀이 지도사 등)이나 놀이 자원봉사활동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말한다. 서울시가 올해 39명을 선발해 지난 22일부터 19개 놀이터에 2~3명씩 배치했다. 이들은 주 2회,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끝난 오후 4~6시에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줄넘기, 기차놀이, 딱지치기, 망줍기(사방치기) 등을 하며 뛰어논다.
놀이터 활동가 박종숙씨가 서울 구로동 구로리어린이공원에서 아이들에게 딱지 접는 법을 보여주며 함께 놀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큰 아이, 어린아이 함께 어울려
구로리어린이공원에선 움직이는 놀이터가 화요일과 수요일에 열린다. 이날 최고 온도가 26도까지 올랐지만 어린이 40명이 모여들었다.
“가위, 바위, 보, 와! 이겼다. 빨리 뛰어.”
놀이터 활동가가 분필로 바닥에 그려놓은 달팽이 놀이판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규칙을 따르며 놀고 있었다. 원래 달팽이 놀이는 두 패로 나뉘어 양쪽 끝에서 각각 출발해 상대편과 마주치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이다. 이긴 사람은 계속 달려 상대방의 진을 점령할 수 있지만, 진 사람은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놀이에 금세 익숙해진 어린이들은 분필로 놀이판 중간에 시냇물이나 불 모양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이곳은 깨금발로 지나가거나 높이 건너뛰도록 규칙을 추가했다. 놀이활동가 100여명이 활동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인 ‘놀이하는사람들’의 이수정 활동가는 “놀이할 때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심판처럼 굴어선 안 된다. 아이들이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가도록, 처음 놀이를 가르쳐준 뒤엔 뒤로 빠져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들자 ‘협동제기’가 등장했다. 크고 작은 아이들 열두명이 둥글게 모여서 빨강·파랑·노랑·녹색의 조각천을 잡고는 그 위에 제기를 올려놓았다. 구령에 맞춰서 조각천을 함께 올렸다가 내리니까 천이 펄럭이며 제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호흡과 균형이 맞지 않아 제기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몇 차례 연습했더니 제기가 조각천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일곱, 여덟, 아홉”을 외쳤다.
김명순 연세대 교수(아동가족학)는 움직이는 놀이터의 장점으로 여러 연령대가 어울릴 수 있는 경험을 꼽았다. “요즘은 또래끼리만 놀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큰 아이가 함께 놀면 배울 기회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치지 않게 배려하며 노는 법, 이견을 조율하며 노는 법 등은 나이 차이가 날 때 자연스레 배울 수 있다.”
놀이터 활동가이자 참교육학부모회 서울 서부지회장인 송성남씨는 놀이를 통한 동네 아이들의 변화를 직접 관찰했다. 그는 3년 전부터 가재울어린이공원에서 매주 수요일 4~6시에 아이들 70~100명과 놀이를 하고 있다. 그는 혁신초등학교인 가재울초등학교에서 놀이 활동가로 자원봉사하다가 학교 밖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한 경우다. “동네 아이들인데도 처음엔 서로 손도 못잡고 눈도 못맞주쳤다. 그렇게 관계 맺기에 어색했는데 이제는 형과 누나, 오빠, 언니 하면서 함께 뛰어놀고 자기 의견도 스스럼없이 내놓는다. 다투더라도 어른 개입 없이 화해하고 사과도 한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놀랍게 성장했다.”
오후 6시, 엄마가 데리러 왔지만
같은 날 서울시 문래동 문래근린공원 놀이터에서도 움직이는 놀이터가 한창이었다. 5·16군사쿠데타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전회의를 했다는 지하벙커를 활용해 만든 서울시의 창의놀이터에서 아이들 70여명이 분필 그리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 다양한 놀이를 했다. 분필로 놀이터 바닥을 오색으로 꾸미고 우유갑으로 딱지를 접고 돌멩이를 나르느라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듯했다.
오후 6시가 넘어 엄마가 밥 먹으러 집에 가자는데도 아이들은 “한 번만 더”라고 애원했다. 특히 소라망줍기(땅따먹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자미(콩이나 모래를 넣어 만든 헝겊 주머니)를 발등에 올려놓고 발로 튕겨서 두 손으로 받아야 땅을 따는데, 오자미를 한 번도 잡지 못한 아이들이 놀이터를 떠나질 못했다. 한 줌이라도 내 땅을 따먹어야 한다며 버텼다. 다음주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엄마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향했다. 자기가 접은 우유갑 딱지를 보물처럼 품고서. 문래근린공원 놀이터 활동가 양미경씨는 “오후 3시15분께 와서 달팽이 놀이판을 그렸는데 아이들이 성에 안 찼는지 직접 하나 더 그리더니 2시간 내내 뛰어놀더라. 비석치기도 ‘던지기’부터 ‘떡장수’까지 다 성공하자 스스로 새로운 비석치기 방법을 고안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정말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움직이는 놀이터 구상은 “시민이 공원에 놀러 오면 왜 배달음식을 먹거나 쉬고 자기만 할까. 어린이공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고 송형남 서울시 공원녹지정책과 주무관이 설명했다. 놀이터 활동가가 참여하는 움직이는 놀이터가 시작되자, 기대 이상의 호응이 쏟아졌다. 지난해에는 12개 자치구, 15개 놀이터에서 연간 535회 운영했는데 1만6625명의 어린이와 부모가 참여했다. 아이들은 봄에는 전래놀이 등을 익혔고 날씨가 더워지자 물풍선, 물총, 페트병 등을 활용한 물놀이에 빠졌다. 가을에는 솔방울이나 낙엽을 활용한 놀이를 진행했다.
지난해 움직이는 놀이터 마지막 날에는 아이들이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왜요? 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내년에 다시 와요?” 상도근린공원(서울 관악구 봉천동과 동작구 상도동에 걸쳐 있음)에서 놀았던 권아무개 어린이는 “월요일, 목요일마다 놀아주시고 추울 때도 오셔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편지를 놀이터 활동가에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움직이는 놀이터 사업이 계속 추진될지는 미지수였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시끄럽다,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등 민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움직이는 놀이터를 계속 운영해달라는 주민의 목소리가 더 커 올해도 사업이 이어졌다.
놀이터 활동가 조민희씨가 서울 구로동 구로리어린이공원 놀이터에서 줄에 닿지 않게 지나가는 림보놀이를 아이들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부와 게임에 뺏긴 놀이시간
우리 사회는 놀이 그 자체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짙다. 놀이를 학습을 원활히 하기 위한 휴식 정도로 가볍게 여기거나 아동의 사회성을 높이는 수단, 비만을 감소하고 건강을 증진하는 도구 정도로 인식한다. 그래서 정규 수업과 사교육에 놀이가 밀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놀더라도 깨끗하고 안전함을 강조해 실내로 공간을 제한한다. 그만큼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다양하고 도전적인 놀이를 할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아동의 놀이 및 여가 관련 연구(한국아동·청소년 패널조사. 2014년)를 보면, 초등학생 여가시간은 ‘컴퓨터·게임기 오락’ ‘티브이(TV)·비디오 시청’, ‘친구들과 놀이’ 순으로 나타났다. 놀이 공간은 집이 72.7%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놀이터와 공원은 18.9%에 그쳤다. 김명순 교수는 우리나라는 놀이 시간과 공간, 내용이 매우 빈약해 “놀이할 권리가 보장된 아동기가 실종된 상태”라고 진단했다. “영국의 사례를 보면 열심히 논 아동들은 팀 협상 능력, 위험 관리 능력, 갈등 해결 능력, 의사소통,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렇게 놀라운 효과가 쉽게 보이는데도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놀 시간과 놀이 공간을 제공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움직이는 놀이터와 같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팝업놀이터’는 세계적으로 느는 추세다. 팝업 놀이터가 최초로 등장한 곳은 2010년 뉴욕시의 차 없는 거리 행사장이었다. 상업적 마케팅을 흉내 낸 이벤트에 가족들을 모으기 위한 부대행사 정도였는데, 큰 인기를 얻자 미국 전역의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일본에서는 학교나 공원에서는 금지된 웅덩이 파기, 모닥불놀이, 나무타기 등과 같은 아이가 직접 놀이를 만들 수 있는 ‘모험놀이터’가 조성돼 있고 놀이 활동가가 그곳에 상주한다. 이수정 놀이 활동가는 “일본에서는 놀이 활동가가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보다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보고 싶다면, 성냥과 종이, 나무 등을 준 뒤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놀이 활동가의 일”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국가놀이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놀이를 장려하기 위해 2008년부터 국가놀이전략을 세웠다. 모든 아동이 가까운 곳에서 안전하고 흥미롭게 놀이할 수 있는 공간을 사회가 제공하고, 아동이 적극적으로 놀이에 참여하도록 지역사회가 지원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김명순 교수는 “자유놀이 시간 및 실외놀이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주어진 우선적 권리”라며 “놀이에 대한 공적 투자 등 많은 정책 과제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모여 ‘협동제기’ 놀이를 하고 있다. 놀이터 활동가 2명과 12명의 아이들이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서 조각천을 올렸다가 내리면 그 위의 제기가 공중으로 날았다가 천으로 떨어진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