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를 하다가 4년 전 방위사업청의 일반직 공무원으로 신분을 바꿨던 정재민 법무심의관이 지난 1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과천/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4년 전 판사를 관두고 국방부 외청인 방위사업청(방사청)의 4급 공무원이 됐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재판소에 파견됐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판사였다. 사법부에서 행정부의 일반직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독특하지만, 그는 소설 쓰는 판사로도 유명했다. 두번씩이나 문학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인기 교양 프로그램인 ‘알쓸범잡’(tvN)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다. 모처럼 ‘튀는 공무원’을 기대했으나, 지난 12일 정부과천청사의 법무부 사무실에서 만난 정재민 법무심의관(44·이하 호칭 생략)은 전혀 튀지 않았다. 한여름인데도 긴팔 흰 셔츠에 무채색의 넥타이를 단정히 맨 채 감색 계통의 싱글 슈트를 갖춰 입은 모습은 전형적인 고위 공직자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당차고 흥미로웠으며, 영혼은 자유로웠다.
―지난해 11월부터 이 자리에 왔죠? 일은 어떠세요?
“정부 안의 변호사 같은 역할이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다른 부처나 국회의원들의 법안에 대해서 정부를 대표해서 법적 의견도 내고, 대통령실이나 총리실 등에 법적 자문도 하고요. 판사로 일할 때는 항상 사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일을 했는데 여기서는 법을 만들죠. 같은 법을 다루지만 성격이 아주 달라서 더 어려운 면도 있고 더 재미있는 것도 있어요.”
―요즘 역점을 두는 일은 뭔가요?
“저는 원래 미래에 관심이 많아요. 과거를 보는 것보다 미래를 쳐다보는 게 좀 더 건설적이고 통합에도 도움이 되거든요. 여기 와서 직원들과도 그런 방향으로 얘기를 모았고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민법 개정안이나 비대면 시대에 온라인으로 법정 변론을 할 수 있게 하는 법 개정 추진, 점차 늘어나는 1인 가구를 위한 법률안들 마련 같은 일들이 그런 것들이죠. 법이 미래를 선도하지는 못해도 과거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여기선 비주류지만 제 목소리 항상 내죠”
법무부의 국장급 보직 중 하나인 법무심의관은 역대 정부에서는 잘나가는 고참 부장검사들이 주로 맡았다. 법무심의관 출신으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된 사람도 많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추진하면서 국장급인 법무심의관도 개방직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공모에 응해서 뽑혔다고요?
“네. 민사법을 많이 만드는 이 자리를 검찰 출신들과는 좀 다르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어요. 2급으로 승진하는 자리이기도 했고요.(웃음) 저는 외교부에 있어봤고, 군법무관 시절 국방부에서도 2년간 일해봤는데 행정부 일이 더 맞는 거 같아요. 사법부는 과거를 수습하는 일인 데 비해 여기는 무엇을 만들고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잖아요. 판사는 사건이 들어오면 대부분 법과 판례 등에 따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재량이 거의 없어요. 징역 8개월로 할지 10개월로 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셈이죠. 여기서는 법안 하나 만들면 파급이 엄청나요. 법이라는 게 굉장히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것 같지만 법을 딱 개정하는 순간 미래를 견인하거든요. 그런 게 보람도 있고요. 어릴 때부터 저는 붕어빵처럼 어딘가에 저를 끼워맞추는 것보다 스스로 틀을 만들어 가는 게 훨씬 재밌고 좋았어요.”
정재민 법무부 법무심의관은 소설 4권과 에세이 2권 등을 쓴 작가이다. 그는 국제법상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법학 박사 논문을 쓴 독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정 심의관이 지난 1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과천/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17년 판사를 관두고 방사청 공무원으로 갈 때 주변에서 많이 말리지 않았어요?
“다 말렸죠.(웃음) 1년만 더 있으면 부장판사 되니까 1년만 더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부장이 되면 오히려 애늙은이가 되어서 초이스가 너무 없어지고, 그야말로 정해진 트랙대로 가버릴 것 같았어요. 부장 몇년차에 옷 벗고 로펌으로 가게 되는 길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좀 더 젊게 살고 싶었어요. 그즈음 다른 곳에서 국장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는데 그 자리는 법률적인 일을 하는 데였어요. 저는 법률적인 게 아닌 거 하고 싶었고, 고위직이 아닌 4급 과장부터 출발하고 싶었어요.”
―그 선택을 잘한 건가요? 지금 행복해하는 것 같아요.
“그럼요. 제가 재미있게 살지 않습니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말이죠.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법안은 동물이 몰라줘서 그렇지만요.(웃음) 사법부에 계속 있었으면 이렇게 할 수 없었죠. 예전에는 저를 다 말렸는데 요즘은 다 잘했다고 해요. 법률가로서도 지금 포지션이 중요하거든요. 물론 그만큼 힘들었고 그래서 잃는 것도 많았어요. 법조계에서는 서울법대를 나와서 판사를 하는 제가 주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방사청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에 그냥 비주류일 뿐이죠.”
―외로웠나 봐요?
“결코 만만치 않았죠. 텃세도, 태클도 있었지만. 제 편도 많이 있어서 많이 배우고 잘 헤쳐나왔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니체가 한 말인데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뭐 아직까지 안 죽었으니까 좀 더 강해지지 않았겠습니까.”
―행정부 공무원이 될 때 다짐했던 각오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웃음)
“(웃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사청으로 자리를 옮길 때 <신동아>(2017년 3월)에 이렇게 썼다. “모난 돌이 돼 사방에서 정을 맞고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불법과 부패에 부역하지 않을 것이다. 진급과 평판에 인질 잡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옳은 일은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그런 양심적인 공직생활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일하다가 꽤 많이 부딪힌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부딪히는 거야 늘 많죠. 지금도 그렇고 방사청에서도 그랬고요. 근데 그게 제가 항상 맞았다고 볼 수는 없고요. 그렇게 이견이 있는 와중에 어느 한쪽으로 수렴이 돼가고 하죠. 그럴 때 저는 그냥 눈치나 보고 대충 맞춰주는 것보다 진짜 옳다고 생각할 때는 항상 제 목소리를 내니까요. 그게 뭐 불편한 사람도 있겠죠. 근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방사청 특수지원함 사업팀장으로 일하던 지난해 2월 현장 점검차 해군 함정을 찾았다. 정재민 제공
얼마전 시즌1이 끝난 <알쓸범잡>(tvN)에 고정 패널로 출연한 정재민 법무부 법무심의관의 모습. 유튜브 갈무리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싸웠던 판사
정재민은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2013), <독도는 법이다>(2021)를 쓴 독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2002년 군법무관 시절 국방부 국제협력관실에서 일할 때 국방부 장관의 국회 답변을 돕기 위해 독도 문제를 접한 뒤 오랫동안 독도에 관한 역사와 국제법 논문 등을 깊고 넓게 공부했다. 독도 문제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소설(<독도 인 더 헤이그> 2009)을 썼고, 이 책을 읽은 외교부 간부들의 요청으로 외교부 독도법률자문관(2011)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난 6월에 <독도는 법이다>를 썼는데 계기가 있었어요?
“작년에 국제법 박사 논문(‘영토분쟁재판에 있어서의 역사적 권원의 인정 가능성 확대’)을 썼습니다. 기존의 연구 결과가 거의 없고 자료도 너무 적어서 되게 힘들었지만, 역사적 권원은 독도 영유권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어서 주제를 꼭 그것으로 해야겠다고 고집했어요. 박사 논문 내용을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읽기 쉽도록 대중서로 썼어요. 또 독도는 우리 근대사의 맥락에서 봐야 하기에 국제법과 역사적 맥락 두 측면을 담았습니다.”
―<독도 인 더 헤이그>는 가정 상황이긴 하지만 국제재판소에 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고, <독도는 법이다>는 거기에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결론이더군요.
“네. <독도 인 더 헤이그>에서 국제소송 상황을 그린 거는 당시 반일감정과 독도에 대한 강력 대응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어요. 그렇게 강경 기조로 갈 경우에 어떻게 될지를 소설로 시뮬레이션 해보면서 우리가 뭘 조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였어요. 소송하자는 건 아니었고요.”
경북 경주가 고향인 정재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포항에서 자랐다. 서울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해 2006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그는 사법연수생의 생활을 그린 소설 <농땡이 사법연수생의 짜장면 비비는 법>(2004)을 시작으로 <독도 인 더 헤이그>, <소설 이사부>(2010), <보헤미안 랩소디>(2014) 등 모두 4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소설 이사부>는 제1회 포항국제동해문학상, <보헤미안 랩소디>는 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규정에 충실한 법 해석을 하는 법률가와 상상력이 필요한 소설가는 성격이 많이 다른데, 판사 시절에 소설을 쓰셨어요.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가 양 날개로 날고, 사회가 보수와 진보 이념으로 균형을 잡듯이 말입니다. 이성적인 사람한테는 그림자로서 감성적인 궁핍이 생기고, 감정을 많이 쓴 사람은 반대로 좀 체계화되고 논리적인 어떤 거에 대한 갈망이 생기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 둘을 행동으로 좀 해소했던 거죠.”
현직 판사가 사기꾼 의사와 그를 비호하는 검사 등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정신분석을 곁들여 그린 <보헤미안 랩소디>는 자전적 소설이다. 매출을 올릴 목적으로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사람들을 ‘류마티스’라고 속여서 독한 약을 오랫동안 처방해온 의사의 사기행각이 드러났음에도 검사는 경찰의 기소 의견을 묵살하고 불기소 처분했다. 법원도 민사소송에서 보상금으로 피해자 1인당 700만원만 지급하라는 판결을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피해자였던 정재민은 인터뷰 도중 불기소 처분장과 판결문 등 당시 기록들을 꺼내 보여줬다. 문제의 의사는 복지부로부터 경고 처분만 받은 채 지금도 성업 중이다.
2014년부터 1년4개월 동안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재판소(유엔 구유고 전범재판소·ICTY)에 파견돼 일하던 당시의 정재민 판사. 정재민 제공
내 인생 지키려 경쟁 레이스에서 하차
―판사인데도 억울하게 당했는데, 불의한 일을 직접 겪어보니까 어땠어요?
“그때 진짜 충격이었죠. 대학 때부터 맨날 검찰의 기소권 독점을 규제해야 한다는 데만 집중했는데, 와, 이거 불기소권이 진짜 무섭구나라는 거를 직접 겪어보니까 알았죠. 제가 너무 순진했구나 싶더라고요. 저는 진짜로 판검사들은 다 정직하고 원칙대로 하는 것이고, 언론에 자꾸 나쁘게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부터가 그럴 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까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힘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청탁하는 거 가능한 얘기 같아요.”
―작품으로 승화시키긴 했지만, 정말 화나고 분했을 것 같아요.
“근데 그 일 덕분에 저는 재판할 때 완전히 달라졌어요.”
―어떻게요?
“그 전과 달리 사람들의 억울한 기분을 아니까 이게 잘못됐을 때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당사자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게 되더라고요. 아, 저 말이 맞는데 제가 다른 판단을 했을 때는 저 사람은 진짜 암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옛날에는 큰 고민 없이 그냥 쏟아지는 주장들을 퍼즐 맞추듯이 쳐내고 했는데, 그 뒤로는 재판 한건 한건을 신중히 하게 됐어요. 재판이 더 부담스러워서 결국 판사를 관둔 것도 있어요.”
정재민은 미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어머니 등 가족과 학교 선생님들의 강권으로 법학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규정 학점 외에는 인문학 등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소설 쓰기를 시작한 계기도 대학 3학년 때의 독일어 수업이었다. 고교 문예반 때 일곱번이나 읽고도 뜻을 몰랐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소설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독문과 교수에게 듣고는 소설에 눈떴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쓴 단편소설 <배려>가 사법연수원생 시절 공무원문예대전에서 장려상을 받으면서 그의 글쓰기에도 탄력이 붙었다.
―고시 공부보다 경쟁이 더 치열한 사법연수원 시절에도 틈틈이 소설을 썼다고요?
“교수님들이 좀 더 집중하면 훨씬 성적이 좋아질 텐데라면서 왜 열심히 공부 안 하냐고 말한 적도 있어요. 근데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게 싫었어요. 지금도 손해를 너무 안 보려고 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어요. 인생이 수학 문제가 아니잖아요.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고, 최고점을 찍고, 그렇게 하는 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좀 여백도 있어야죠. 손실과 이익을 계산해서 이익이 많은 쪽으로만 사는 게 인생이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판사가 되려고 했나요?
“처음에는 검사 하려고 했지 판사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런데 군법무관 시절 군인들을 보니까 진급을 하지 못하면 너무 피폐해지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검찰 같은 피라미드형 관료조직에 가면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윗사람 비위 맞추면서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개인 독립이 보장된 판사를 지망했고, 판사도 오래 할 생각이 없었어요. 유학 가서 좀 다른 공부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엠비에이(MBA) 공부를 해서 사회적 기업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 입장이다 보니까 판사 생활도 판결문을 찍어내듯이 바쁘게 지내는 곳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남는 시간도 좀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는 곳, 이왕이면 고향 근처로 가자고 생각했어요. 무조건 치달아 달리는 경쟁 레이스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데 휘말리면 내 인생이 없어질 것 같아서요.”
넥타이 맨 ‘진짜 작가’ 탄생 눈앞에
정재민 법무부 법무심의관이 1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의 뒤쪽에 최근에 만든 민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인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담은 팻말이 걸려 있다. 과천/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젊었을 때 욕망을 내려놓는 삶을 택하기는 쉽지 않은데요.
“욕심이 더 큰 거죠. 저는 대법관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삶을 산다는 자체가 성에 안 찼으니까요.”
―내면을 채우겠다는 욕심이 있었군요.
“그냥 한해 한해 잘 살고 싶었어요.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알차고 솔직하게 살고 싶었어요. 솔직하다는 거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삶에 솔직한 거죠. 저는 리브 액추얼리(live actually)라는 말을 씁니다. 사는 듯 사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밥을 먹더라도 억지로 먹는 게 아니라 맛있게, 힘차게 먹죠.”
―리브 액추얼리한 게 어떤 건가요?
“남들이 좋다는 게 아니라 제가 하고픈 직업을 택하고, 돈도 명예도 안 되지만 글을 꾸준히 쓰고, 남들이 별로 안 하는 국제법을 공부하고, 차 대신 땀 흘리며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나 코로나 상가임차인 해지권과 같이 사회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법안을 추진하고, 가족에게 밥해주고, 이렇게 솔직하게 삶을 이야기하는 것, 그런 게 다 리브 액추얼리죠.”
정재민은 아직 작가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진짜 작가가 되려면 1인칭 소설,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을 설득력 있게 끌어가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가 안 되고 그걸 시도할 여건도 안 된다”고 말했다. “전업작가가 될 능력도 욕심도 없다”고 했지만, 그는 지금 ‘진짜’ 소설을 다듬고 있다. 자살과 존엄사 등 죽음에 관한 얘기로, “5~6년 전에 써놨지만 뾰족한 인사이트가 없어서 발표를 못 한 채 시간 날 때마다 고치고 있다.” 머지않아 넥타이 맨 ‘진짜 작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녹취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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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임기자 |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지금은 토요판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