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성금 모금’ 등으로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박순희씨가 수감돼 있던 사이 원풍노조는 ‘노동계 정화조치’로 82년 9월 해체됐다. 사진은 수백명의 경찰이 사내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강제해산시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말년까지 건강하게 골프치다가 집에서 그렇게 갔다니…광주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만명을 가슴앓이 시킨 ‘살인마’가 갈 곳은 영원한 지옥 그보다 더한 곳일 겁니다.”
박순희(74·세례명 아그네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은 24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전두환씨가 자택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분노가 차올랐다”고 말했다. 1980년대 그는 강력한 단결력으로 전설적인 투쟁을 벌였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부지부장이었다. 80년 5월 ‘시내의 아스팔트가 피범벅이 되고, 시민들이 부상자들에게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는 광주항쟁의 소식을 듣고 1700명 조합원이 모은 ‘5·18 성금’ 470만원을 전달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당시 원풍모방 조합원들 중에 호남에서 온 여성노동자들이 많았어요. 광주가 봉쇄됐지만 알음알음 조합원 친척이나 이웃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거에요. 조합원들은 내 오빠, 내 동생이 다쳤다고 하니 치료비라도 대자는 마음으로 돈을 모은 거거든요. 그런데 안기부(현 국정원)는 광주는 빨갱이들이 선동한 내란인데 거기에 돈을 가져다 줬으니 우리도 빨갱이라고 하더라고요.”
박순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수배자로 쫓기다 81년 4월 안기부에 잡혀갔다. 16일간 독방에 갇혔다. 안기부 요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24시간 복도에 울렸다. 저 발걸음은 어느 방을 덮칠까. 발걸음 소리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요원들은 하루에 한 번 그를 고문실 앞으로 끌고가 고문소리와 신음소리를 듣게 했다. 고문 받고 쓰러진 젊은 학생들을 보여줬다. 퀭하고 생기 잃은 그 눈들. “나는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려요. 고문소리가 꼭 세탁기 소리 같더라고. 그 소리를 들으면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서 나는 이 나이에도 손빨래를 합니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사이 70년대 최강 민주노조였던 원풍노조는 전두환 정권의 ‘노동계 정화조치’로 82년 9월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조를 파괴한 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노조원들의 재취업까지 막았다. 전두환씨는 뒤늦게 5공 비리와 쿠데타, 5·18 유혈 진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됐다. 되레 노조원들이 자신을 숨기고 숨죽여지냈다. 조합원 일부는 노조를 했다는 이유로 ‘불순한 아내 며느리’가 돼 매맞고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15~16살에 불과했던 대다수의 여성 조합원들은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원풍이라는 말을 꼭꼭 숨긴 채 평생을 살았다. 2001년 이후 원풍 노동자 157명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엊그제 환갑된 우리 조합원이 처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조합원이 2007년 민주화운동 인증서를 받았는데 그때 처음 남편에게 원풍 노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 유공자증을 받고 남편은 미안해 울고, 그는 서러워서 울었답니다. 그 사람이 떠났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가보지도 못했어요.”
스무살에 방직공장에 취업해 5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지키고 있는 박순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 사진 박순희 위원 제공.
순희. 세상에서 가장 순한 계집이되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순한 계집이 어찌 이렇게 모진 삶을 사는지…” 스무살에 방직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한 그는 50년 넘게 지금도 노동·사회운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전두환씨의 삶과 죽음을 통해 남아있는 이들이 성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사과를 바라지 않았어요. 전두환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는 반성 없이 떠났고 남은 이들이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고 배워나가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더 기술적으로 착취 당하고 있죠. 어쩌겠습니까. 더 버티고 살아남아 인간이 인갑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