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유혹한 거 아니에요?”
“성관계 경험 있으시죠?”
“평소 주변에 남자가 많다던데….”
10대 성폭력피해자가 법정에 불려 나가 받는 실제 질문들이다. 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서 출발한 질문은 곧장 2차 피해가 된다. 이제는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생 연령대의 어린이도 법정에서 피고인 쪽 변호인의 반대신문에 응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가 19살 미만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30조 6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소송 중인 6살 한 어린이는 지난 3일 검찰로부터 법정 진술을 요청받았다. 영상녹화진술까지 이미 마쳤으나, 헌재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세살 때의 ‘사건’을 피고 앞에서 거듭 진술하게 되는 셈이다. 원고 쪽 오선희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는 <한겨레>에 “실무를 고려한 결정인지 의문”이라며 “미취학 아동은 가해자의 행위가 성폭력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피고인이 반대신문을 원하면 피해자는 법정에 나가 몇 년 전 일을 떠올려 피해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미성년 피해자 부모의 문의도 잇따른다. “도저히 법정엔 못 내보내겠다. 다른 방법은 없냐”는 것이다.
미성년 성폭력피해자더라도 관례상 고등학생 정도의 연령대인 16∼19살 피해자는 영상녹화진술을 해도 법정 출석을 요구받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이 법정에서 겪는 2차 피해는 가혹했다. △사건과 무관한 품행 문제 부각 △과도한 기억 요구와 반복진술 △성폭력을 성관계로 바라보는 시선 등으로 2차 피해를 겪는다. 이러한 현실에 2005년 유엔경제사회이사회는 ‘범죄 피해아동 및 목격아동이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의 사법 지침’을 결의한 바 있다. 이 지침은 “아동 피해자와 증인이 가해자(로 주장된 자)의 반대신문을 받지 않도록 보장되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헌재 결정으로 반대신문 대상에 제한이 없어졌다.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는 <한겨레>에 “법정이란 공간 자체가 ‘내 주장이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검증받는 장소”라면서 “한마디 할 때마다 피고인 쪽 변호인이 의심하고 말꼬리를 잡을 텐데, 미성년 피해자가 조리 있고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게 가능하겠나. 피해자의 진술이 흔들리면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짚었다.
위헌 결정에 더해 형사소송법 개정안 시행으로 성폭력 가해자 처벌이 더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부터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피신조서) 증거능력이 제한된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고, 재판관도 열람할 수 없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취지다. 물적 증거를 찾기 힘든 성폭력 사건의 경우 법정에서의 피해자 증언이 ‘유일한’ 증거로 법정에서의 입증은 더 어려워진 형국이다. 오선희 변호사는 “유죄 입증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 기소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라며 “성폭력 사건은 피·가해자 조사가 수사의 90%인데 법원이 피신조서 내용도 알 수 없다면 증거가 없다시피 한 셈이다. 무죄 확률이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예원 변호사도 “가해자 처벌을 위해선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자신의 피해를 소상히 밝혀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안 입법을 서둘러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희진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상담팀장은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들과 그 양육자들이 신고할 때, 가해자를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소송과정에서 아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우려해 신고를 망설인다. 이번 헌재 판결이 이러한 경향을 더 부추길까 걱정”이라고 했다.
국회에서는 대안 입법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만 더딘 편이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한겨레>에 “현장의 목소리와 전문가 의견을 듣고 수사·재판 과정에서 성범죄 피해 아동·청소년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대안 입법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