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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천원짜리 책에 튄 ‘음쓰’…검찰은 벌금 30만원을 구형했다

등록 2022-01-11 04:59수정 2022-01-11 12:20

가장 보통의 재판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초로의 사내는 하얀 먼지가 묻은 검은색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도는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검은 가방을 메고 서울의 한 법정 피고인석에 선 박덕현(가명·63)씨는 “이 자리에 나오기 위해 평소보다 이른 새벽 시간에 일터에 갔다가 잠시 짬을 냈다”고 했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재물손괴였다. 60여년의 삶을 살면서 그가 법원에 온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는데, ‘잘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박씨는 서울의 15층짜리 한 신축 오피스텔 관리인이다. 복도 청소, 분리수거 정리, 주차 관리 등이 그의 주된 업무다. 박씨는 건설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현장소장까지 지낸 ‘베테랑’ 노동자였다. 그러나 한순간의 사고로 그의 삶은 바뀌었다. 그는 일하다가 왼쪽 팔을 다쳤고, 사고 이후 더는 그 팔을 어깨 위로 들 수 없게 됐다. 현장을 떠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용역업체를 통해 일자리를 구했다. 그 일이 지금 하고 있는 오피스텔 관리인이다. 작업을 지시하고 안전을 관리할 노동자들이 이제 그에게는 없지만, 다친 팔로도 아내와 딸을 부양할 수 있는 귀한 일자리다.

관리인으로서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일부 주민들이 오피스텔 앞 노점상을 두고 불만을 쏟아내면서부터다. 김기석(가명·60)씨는 박씨가 일하는 오피스텔 앞에서 중고물품을 파는 노점상을 하고 있는데, 일부 주민들이 미관 등을 이유로 관리인인 박씨에게 노점상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김씨가 좌판을 깔고 파는 물품은 중고 밥솥, 그림 액자, 옷, 시계, 프라이팬 등이다.

박씨는 김씨에게 “여기는 사유지니까 장사하면 안된다”고 설득했다. 사유지임을 증명하기 위해 토지대장도 보여줬다. 하지만 김씨는 요지부동이었다. 김씨는 퇴거를 요구하는 박씨에게 “오피스텔이 들어서기 약 20년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다”며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참다못한 박씨는 지난해 7월 아침, 김씨가 좌판을 까는 자리에 음식물 쓰레기통을 놓아뒀다. 장사를 못 하도록 막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김씨가 말없이 쓰레기통을 치우고 평소처럼 물건을 펼쳐놓자, 화를 참지 못한 박씨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벽에 던졌다. 봉투가 터지면서 김씨의 좌판에 음식물 쓰레기가 튀었다. 박씨는 재물손괴 혐의로 벌금 3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고, 이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법정에서 공개된 현장 사진을 보면, 김씨가 팔려고 내놓은 도자기와 내비게이션, 책에 콩자반 같은 음식물 쓰레기가 묻어 있었다. 검찰은 법정에서 “김씨의 판매용 물건에 음식물 쓰레기가 묻었다. 특히 책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완전히 묻어서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남았고 악취 등으로 팔 수 없게 됐다”며 박씨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박씨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15층짜리 오피스텔에 대한 관리책임이 오로지 용역업체에 소속된 자신에게 지워진 상황에서 주민 불만으로 일자리를 잃을까 봐 염려가 됐다는 것이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이고, 부양해야 할 식구가 있는데, 그 사람은 막무가내로 장사를 하니까. 주민하고 마찰도 빚고 욕도 먹었습니다. 장애가 있지만 먹고 살려고 거기(오피스텔)에 나와서 일하는데, ‘잘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지내왔습니다.”

침묵하던 판사가 입을 연 것은 그 때 였다. “좌판에서 장사하는 분도 피고인처럼 먹고살려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피고인이 힘든 것처럼, 가판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맞아가며 장사하는 분도 힘들지 않을까요? 다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음식물 쓰레기를 던져선 안 됩니다.” 그 말에 줄곧 억울함을 호소하던 박씨도 “제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박씨의 국선 변호인은 선처를 호소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닦아내면 되기 때문에 재물손괴죄는 성립하지 않고, 이에 대한 재판부 판단이 다르더라도 박씨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변호인이 든 이유다. 이후 검찰은 ‘박씨가 도자기 1점, 내비게이션 1개, 책 1권을 못 쓰게 했다’는 공소사실을 ‘책 1권을 못 쓰게 했다’로 고쳤다. 도자기와 내비게이션은 닦아서 다시 파는 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벌금 30만원 구형을 뒤집지는 않았다.

지난해 말, 재판부는 박씨에게 벌금 2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선고유예는 당장 형을 선고하지 않고 2년이 지나면 선고를 면하게 해 전과기록이 남지 않도록 하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반성의 태도를 보이고, 중고품으로 판매 중이던 책의 가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아 판매가 아예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 점,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의 분쟁 경위와 피고인의 나이, 성행 등 모든 양형 조건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1심 선고 5일 뒤, 검찰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검찰이 벌금 30만원을 구형하며 박씨의 공소사실에 담은 망가진 중고책 가격은 ‘5천원’이었다. 직업을 잃을까 좌판을 막은 이와 음식물 쓰레기를 맞으며 좌판을 깐 이의 ‘전쟁’ 속에서 이 5천원은 우리 이웃의 고단한 삶의 증표처럼 보였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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