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절대 마주치지 않게 해주세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긴장되고 부담스러워요.”
“잘못 말하면 제가 감옥에 갈 수도 있나요?”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을 가까이서 지원하고 있는 김지은 대구해바라기센터 부소장이 미성년 피해자에게 법정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는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가 19살 미만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30조 6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미성년 피해자도 직접 법정에 나가 피해 진술을 하고 피고 쪽 반대신문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피고인과 그 변호인에 의한 2차 피해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헌재 위헌 결정 뒤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를 위해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잇따라 열렸다. 그 자리에서 매번 언급되는 대안 모델이 있다. ‘바르나후스(Barnahaus)’ 모델이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소병철 의원이 지난달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녹화진술 위헌, 대안 입법을 위한 긴급 토론회’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바르나후스(Barnahaus)’는 스웨덴어로 아동·유아란 뜻의 바르나(barna)와 집(haus)을 합한 말이다. 바르나후스 모델은 성적 또는 신체적 학대 피해를 입은 아동에게 필요한 사법·복지·보건 등 모든 서비스를 아동 친화적인 환경을 갖춘 ‘하나의 장소’, 곧 바르나후스에서 제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매번 낯선 환경에서 피해를 반복해 회상·진술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도입된 모델이다.
바르나후스 모델을 도입한 아이슬란드는 미성년 성폭력 사건을 조사할 때 다양한 전문가가 바르나후스라는 ‘한지붕’ 아래에서 성폭력 피해 아동을 조사한다. 바르나후스에는 전문조사관이 있고, 피해자는 바르나후스 안에 있는 방에서 조사를 받는다. 또 경찰·검찰·판사·변호인·피해 아동 대리인 등은 다른 방에서 이를 관찰하는 한편 조사를 영상으로 녹화해 법적인 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조사를 마친 뒤에는 피해 아동에게 건강 검진과 가족 상담 치료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정명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 발제문)
2007년 바르나후스 모델을 도입한 노르웨이는 2015년 아동보호를 위한 조사절차 특례인 ‘촉진면담조사’를 형사소송법에 규정했다. 문지선 법무부 형사법제과 과장은 “촉진면담조사 도입으로 훈련된 경찰조사관이 검사의 주재 아래 피의자에게 통지 없이 바르나후스에서 피해 아동을 조사하면서 이를 영상녹화하고, 피의자 변호인은 영상녹화물을 본 뒤 추가조사를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추가조사 역시 검사와 경찰이 진행한다. 아동 진술을 녹화한 영상물은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면서도 직접 신문은 막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최소화한 사례다.
이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바르나후스 모델을 한국 현실에 맞게 도입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전문가들은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 구축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명화 변호사는 “기존의 아동 해바라기센터(센터) 또는 그에 준하는 시설을 활용해 피해자 조사 장소를 통일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슬란드처럼 미성년 피해자가 아동·청소년 친화적인 공간에서 센터 내 아동 전문 수사관의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 변호사는 또 “반대신문 사항이 있다면 담당 아동 전문 수사관을 통해 질문하도록 해야 한다”며 “반복 회상·진술, 공격적 질문 등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미성년 피해자의 초기 영상진술의 증거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선화 국회입법조사처 법제사법팀 입법조사연구관은 “바르나후스 시스템 하에서 재판 전 수사과정이나 사건 초기에 영상진술시 검사와 피고인 변호사 등이 참여해 영상진술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증거력을 인정하는 방안과 피해아동 조사를 판사가 진행하도록 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바르나후스 모델을 채택한 국가는 공통으로 재판 전 절차에서 피해진술 녹화 때 피고인에게 반대신문권이 부여됐다는 점을 증명하면 영상녹화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영상진술 과정의 피해자 보호 방안도 논의됐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판사와 피고인 쪽이 영상진술 과정에 참여하는 방안을 내놓으면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사전적 소송지휘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승 연구위원은 “영상진술 과정 중 피고인 쪽이 사전에 판사의 동의를 받지 않은 질문을 하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법무부는 지난달 26일 북유럽 등 해외사례를 검토하고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일원화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젠더폭력처벌법 개정 특별위원회 논의를 거쳐, 상반기 안에 개정된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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