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크롤링’을 두고 야놀자와 여기어때가 벌인 4년8개월여 법정 다툼이 지난 8월말 막을 내렸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공개된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해 활용하는 ‘데이터 크롤링’을 두고 야놀자와 여기어때가 벌인 4년8개월여 법정 다툼이 지난 8월말 막을 내렸다.
‘야놀자-여기어때 사건’은 빅데이터 시대가 열리면서 이미 활발히 활용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낯설었던 크롤링을 널리 알리면서, 크롤링의 불법성에 대한 법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판결로 평가 받는다.
크롤링이란 타인이 만든 웹서비스에 공개돼 있는 데이터를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한꺼번에 가져오는 행위를 말한다. 인터넷 등 온라인 공간에서 유통되는 정보가 많아지면서, 크롤링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연구나 사업을 하는 일이 활발하다. 더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이에 대한 활용도도 커지는 추세다. 향후 크롤링 관련 분쟁도 함께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한겨레>는 이번 야놀자-여기어때 확정 판결의 의미를 짚어보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크롤링 갈등이 어떤 식으로 불거지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경쟁사 정보를 무단 수집해서 후발주자가 사업을 한다면?
여행·숙박 정보 플랫폼 야놀자와 여기어때의 ‘크롤링 갈등’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업의 후발주자인 여기어때는 2016년 1월부터 10개월 동안 크롤링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야놀자의 플랫폼에 게시된 숙박업소 정보를 대량 수집해 플랫폼 영업에 이용했다. 여기어때의 데이터 복제 행위에 대해 야놀자는 2018년 초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형사고소도 했다. 여기어때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정보로, 이 데이터에 저작권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야놀자는 “해당 정보는 자신들이 시간과 비용 등 노력을 들여서 정보로서의 부가가치를 만든 것”이라고 맞섰다.
지난 8월25일 서울고법 민사4부에서 선고된 항소심은 1심에 이어 다시 한 번 여기어때에 10억원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여기어때의 행위는 경쟁관계에 있는 야놀자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업을 위해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라며 부정경쟁방지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야놀자와 여기어때가 모두 상고하지 않아서 이 판결은 최근 확정됐다.
하지만 지난 5월 대법원에서 확정된 같은 사건의 형사재판은 여기어때의 무죄로 결론났다. 여기어때 임직원들은 정보통신망법상 정보통신망 침해, 저작권법상 데이터베이스제작자의 권리침해 등 혐의로 기소됐고, 1심 재판부는 해당 혐의가 유죄라며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벌금 등의 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야놀자가 서버 접속을 금지하는 등 기술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기어때가 크롤링 등의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한 것이 접근 권한이 없는 정보통신망에 침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전부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은 이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항소심 판단이 옳다고 보고 여기어때 무죄를 확정했다.
데이터 크롤링, 형사책임 아니어도 민사 책임은 져야
크롤링으로 정보를 수집한 여기어때에 대해 형사재판에서는 무죄가, 민사재판에서는 손해배상 책임이 확정된 터라, 이 사건은 민·형사 재판의 결론이 모순된다고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빅데이터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은 “결국 여기어때의 침해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판결은 빅데이터 시대에 신생 스타트업들이 공개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형사책임 부담은 덜어주면서도, 먼저 사업을 하고 있던 쪽이 투자한 노력 등을 지켜주고자 하는 절충안이라고 본 것이다.
데이터 관련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무법인 세종 송봉주 변호사는 “분쟁이 생긴 두 회사가 명백히 경쟁관계에 있는 경우, 형사 책임을 묻지는 않더라도 타인의 성과를 쉽게 도용하거나 복제했다면
부정경쟁방지법을 위반한 것으로 봐서 민사 책임을 지운 것”이라고 말했다. 무죄 확정된 형사 판결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이 가능한 법조문들이 데이터를 ‘전부 혹은 상당히’ 이용해야 한다거나 ‘통상적 이용’인지, ‘부당하게 이익을 침해하는지’ 등 불확정적인 용어로 구성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형사처벌을 위해서는 법을 엄격히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모호하게 서술된 법조문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불거진 크롤링 사건은 2009년 시작된 온라인 백과사전 웹페이지 ‘엔하위키 사건’과 2011년부터 문제된 취업정보 포털 ‘잡코리아-사람인 사건’이다. 크롤링을 한 ‘엔하위키 미러’와 ‘사람인’이 각각 피고가 됐다. 두 사건 모두 피고의 크롤링이 원고의 데이터베이스제작자 권리를 침해했다며 손해배상을 해야한다고 결론났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민사 판결들을 종합해 보면, 크롤링 분쟁의 핵심은 ‘원고가 들인 노력을 피고가 얼마나 악용해서 시장질서를 침해 했는지’에 따라 승패가 엇갈렸다. 형사처벌을 전제로 한 △저작권법상 데이터베이스 제작자의 권리침해 △정보통신망법상 정보통신망 침해 △형법상 업무방해 등은 유죄 판단이 쉽지않기 때문에 부정경쟁방지법이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부정경쟁방지법은 “타인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강태욱 변호사는 “야놀자-여기어때 판결 이후 앞으로 크롤링 분쟁은 형사 고소는 다소 줄어들고 민사소송으로 다투는 일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 법원에서 최근 선고된 사건들을 보면 크롤링 분쟁의 현주소를 엿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크롤링을 당한 원고들이 승소해도 손해배상 액수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피고의 크롤링이 위법한 권리침해라는 점이 인정되더라도, 침해 행위로 인한 원고의 영업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액수를 산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지식재산권 침해 여부를 다투는 다른 종류의 사건들처럼 법원이 저작권법의 규정에 따라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를 고려해 직권으로 손해액을 산정하는데, 그 액수가 원고 청구액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료·간호 직종의 채용정보를 제공하는 업체가 관련됐던 한 사건의 경우, 원고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침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손해배상 인정액은 애초에 원고가 청구했던 2억원의 10분의1인 2천만원에 머물렀다. 데이터 사건 경험이 풍부한 한 변호사는 “무단 수집한 정보를 못 쓰게 되기 때문에 소송의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고 입장에서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크롤링과 관련해서는 신생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위해 활발한 데이터 활용을 보장하면서도, 원 사업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리와 제도가 확립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송 변호사는 “지금은 데이터 활용과 관련한 판례나 이론 등이 명쾌하게 정리된 상황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법리의 정리가 필요하다”며 “공개된 데이터를 활용하되, 똑같이 베끼거나 경쟁사 이익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