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우 ‘송지오인터내셔널’ 대표가 12일 오후 서울 성동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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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멋쟁이들은 다 모인 듯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어울림광장. 3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서울패션위크 첫날이어서인지 디디피 인근 공기는 설렘과 긴장으로 들떠 있었다. 첫 야외무대를 장식한 디자이너 브랜드 ‘송지오’를 대표하는 색깔인 검정 옷차림을 한 관객들이 물결을 이뤘다.
쇼의 시작을 알리며 조명이 잠시 꺼지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부드러운 곡선이 뒤엉킨 우주비행선 같은 공간 아래 역대급으로 긴 120m 런웨이(보통 런웨이는 40m 정도)로 내년 봄·여름 시즌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이날 쇼의 주제는 ‘월식’. 칠흑의 밤이 연상되는 검은색 옷차림부터 2023 봄·여름 시즌 컬러인 하늘·민트·라임색 등 밝은 색감의 의상까지 드라마틱하게 전개하며 영원과 순간의 교차를 표현했다. 15분간 이어진 강렬한 쇼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껏 멋을 내고 패션쇼를 찾은 관객들과 함께 동네 어르신들, 동대문시장 상인과 지나가는 학생들까지 발길을 멈추고 쇼에 집중하며 함께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는 것. 저 멀리 고공에 있을 것만 같았던 하이엔드 패션이 일상에 쑥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서울패션위크 개막일 첫 야외 쇼를 기획하고,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송재우(28) 송지오인터내셔널 대표를 12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송지오인터내셔널 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아래위로 검은색 옷을 입은 직원이 취재진을 맞았다. 온통 검정이었다. 업무를 보는 직원들의 옷차림도, 책상도, 소파도, 장식장도, 창문을 가리는 블라인드도 검은색이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인 사무실에서 검정이 송지오의 색깔이란 건 확실히 인식됐다. “저희가 좀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의 옷을 만들기도 하고, 검정으로 옷을 만들면 기본적으로 일단 어느 정도 멋있다 보니까 검은색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검정 슈트를 차려입은 송재우 대표가 담백하게 말했다.
그는 하루 전 끝낸 패션쇼의 여파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애프터 파티에 참여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잤어요.” 피로는 남아 있지만 긴장은 한층 덜어낸 눈빛이었다. “저희 브랜드가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한 게 이번이 63번째예요.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행사이지만, 3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린 패션위크는 자체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있죠.” 공들인 티가 역력히 나는 쇼였다. 긴 런웨이의 피날레를 53명의 모델이 모두 나와 장식한 장면은 특히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야외에서 긴 런웨이를 마련해 쇼를 진행한 건 해외 브랜드 중에, 특히 루이뷔통이 그걸 잘하는데 세계 곳곳의 멋있는 건축물이 굉장히 잘 보이는 앵글에서 쇼를 많이 해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도 좀 멋있는 건축물이 잘 보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멋진 건축물인 디디피에서 늘 실내에서 쇼 하느라 장점을 활용하지 못했는데, 밖으로 나와 런웨이를 길게 쭉 빼니까 너무 좋은 구도가 나오더라고요. 물론 모델분들이 숨이 찬다고 하긴 했지만,(웃음) 그래도 보는 이도, 모델들도 색다르고 재밌다는 반응이었어요.”
야외로 나온 런웨이 덕분에 관객 외에도 많은 시민이 패션위크의 시작을 함께한 점도 의미가 있었다. 송재우는 “그건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의외로 너무 좋았던 점”이라고 꼽았다. “(객석 밖에) 바리케이드를 일부러 높게 치진 않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까 쇼를 하면 스탠딩으로 많이 보시겠구나, 정도는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리허설할 때만 해도 서서 구경하는 분들이 500명은 된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약간 쇼가 시작되는 느낌이었죠.”
11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어울림광장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 송지오 패션쇼 피날레 현장. 송지오 제공
11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어울림광장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 송지오 패션쇼 런웨이에 선 아이키. 송지오 제공
송지오인터내셔널은 이름 그대로 대표 디자이너 송지오의 디자인하우스다. 국내 남성복 1세대 디자이너로 꼽히는 송지오는 1993년 브랜드 송지오를 론칭하며 그때까지 없었던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남성복을 선보였다. 2000년대 이후 론칭한 송지오옴므, 지제로 등은 고가지만 좀 더 대중적인 컬렉션을 선보이고, 지오송지오는 송지오와 별개로 운영되던 라이선스 브랜드였으나 올해 8월부터 송지오인터내셔널에서 다시 운영을 맡으며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송지오인터내셔널에 속한 4개의 브랜드를 이끄는 수장은 송지오이면서 동시에 송재우다. 아버지 송지오가 디자인에 집중한다면 아들 송재우는 경영을 전담한다. 송재우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송재우의 책상 위엔 내년 가을·겨울 시즌을 대비해 직접 그린 디자인 스케치가 수십장 쌓여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아버지의 디자인실에서 보낸 그에게 옷을 스케치하고 만드는 일은 일상의 한 영역이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20년 넘게 해온, 이걸 홈스쿨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으로 패션을 얘기해왔으니까 이걸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림 그리고 옷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은 그냥 집에서 요리 배우듯이 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패션을 따로 공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죠.”
언젠가 돌아와 가업을 잇겠단 생각은 어렴풋이 있었지만 20대 중반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경영에 뛰어들 줄은 몰랐다. 2018년 한국에서 군 제대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브랜드가 만들어진 지 25년, 전통 있는 브랜드가 되거나 올드해져서 없어지거나 두가지 길에 놓인 때”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당시에 저희는 정말 아틀리에 같은 브랜드였어요. 상업적 활동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컬렉션을 만드느냐에 집중하는. 크지 않은 팀이 크리에이티브한 작업만 하는 디자인하우스였죠. 저희 이름을 사용한 라이선스 비즈니스(지오송지오)를 해서 수익을 만들고, 그 수익을 전부 컬렉션 만드는 데 쓰는 회사였어요. 2018년, 그 시점엔 그동안 저희가 컬렉션을 열심히 해오면서 쌓아온 결과물이 있었을 거잖아요. 우리만의 자산이 있는데,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어요. 오래 이 브랜드를 이어나가려면 상업적으로 키워야겠다는 판단을 한 시점이었죠.”
송재우 ‘송지오인터내셔널’ 대표가 12일 오후 서울 성동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18년 3월 송지오옴므를 런칭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남성복 시장에 센 옷이 많이 없었어요. 한국 백화점에서 팔리는 해외 명품이나 국내 브랜드들이나 그때만 해도 ‘적당히’ 이런 느낌이 강했어요.” 국내에 없던 남성복을 만들던 브랜드 송지오는 송지오옴므, 지제로, 지오송지오 등을 통해 브랜드가 추구하던 아방가르드한 느낌과 대중성의 경계를 미묘하게 엮어냈다.
천편일률적인 한국 남성복 패션의 공식을 깨부수기도 했다. “송지오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처음 날리게 된 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슈트로 엄청 유명해졌거든요.(실제로 당시 송지오 슈트를 입으면 성공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국내 브랜드 슈트 느낌이 따로 있어요. ‘폼난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딱 한국형 핏이 있는데 예쁘진 않아요. 슈트핏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하늘하늘하고 매끈한 재질에 허리는 쏙 들어가 섹시한 느낌이에요. 아르마니가 그런 느낌의 비접착식 슈트를 생산하며 히트를 쳤죠. 영국은 단단하게 몸에 딱 맞는 갑옷 같은 느낌이죠. 좀 더 클래식하다고 보면 돼요.” 송지오옴므는 국내 브랜드 슈트 느낌을 버리고 영국 핏을 따랐다. 한번 슈트를 사면 스타일을 잘 바꾸지 않는 국내 소비자들의 특성에 우려가 있었지만 모험은 성공했다. 올해 8월 인수한 지오송지오의 슈트도 ‘좀 더 샤프하게’ 뽑아내자 슈트 매출이 급격하게 올라붙었다. 보수적이고, 옷 입는 스타일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국내 남성 소비자에게 갈증이 있었단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국내 소비자들이 패션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다양해진다는 점은 코로나19를 지나면서도 확인됐다. “정말 멋쟁이들이 많아졌다는 걸 체감해요. 저희가 디자이너 브랜드이다 보니까 가끔 한 30장 정도만, 소량으로 만드는 아이템이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게 진짜 안 팔렸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 사람들이 집에 있으면서 여러 문화예술 콘텐츠를 많이 소비한 영향인지, 아니면 마스크를 써서 과감해진 점이 있는지, 불과 몇년 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입고 화려한 패턴이나 색도 많이 찾아요.”
세상의 더 많은 멋쟁이를 만나기 위한 시도도 한다. 스누피, 토이 스토리, 디즈니, 영화감독 팀 버턴, 보이그룹 위너의 래퍼 송민호 등과 협업한 한정판은 때마다 완판 행진이다. 고가 남성복 브랜드의 주요 소비층이 40~50대에서 20~30대로 연령층이 내려온 것도 완판에 한몫했다. “패션에서 제일 궁극적인 것은 귀여운 거예요. 멋있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다양한 분위기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 다 떠나서 결국은 귀여운 게 짱이에요. 우리 브랜드가 귀여운 걸 시도하기 어려운 이미지인데, 디즈니 같은 콘텐츠랑 결합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도 고마운 점이었죠.”
11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어울림광장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 송지오 패션쇼 런웨이에 선 배정남. 송지오 제공
이날 송재우와의 대화는 오래된 브랜드가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도전하는 과정을 요약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송재우가 뛰어든 지난 5년간의 한국 패션 시장은 소비로 자신을 표현하는 엠제트(MZ)세대와 고가품이나 명품에 대한 보복 소비가 일었던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었던 기간이었다. 확장되는 한국 패션 시장을, 옷을 단순히 입는 것을 넘어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즌마다 디자인 영감을 어디서 받느냐는 질문에 송재우는 “솔직히 예전엔 좀 지어내서라도 얘기했는데, 영감을 받는 데가 없다”고 말했다. “그냥 저희끼리 ‘이번 주말에는 무조건 쥐어짜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냥 머리에서 어떻게든 생각해내는 것 말고는 딱히 영감이 없어요.” 트렌드를 파악하려 다른 브랜드에서 옷을 사 입는 일도 거의 없단다. “평생 옷을 돈 주고 사 입은 게 다 합쳐도 500만원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지어 입는 옷이 오히려 일상적인, 일반인과 다른 디자이너. 그런 한편 마감에 쫓기는 평범한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 우리가 입는 옷들도 그런 지점에 놓여 있는 것 아닐까. 예술과 일상 사이, 작품과 소모품 사이. 그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변주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앞으로도 쏠쏠할 듯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