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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86살 노인은 왜 314번이나 현금 인출을 했을까

등록 2022-12-20 11:39수정 2022-12-20 22:27

[가장 보통의 재판]
탈세 목적 재산 은닉 혐의
1심서 벌금 7천만원 선고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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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중년의 아들에게 상가 건물을 증여하고 억대 세금을 고의로 회피한 80대 노인이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조수연 판사는 조세범처벌법상 체납처분 면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86살 피고인 ㄱ씨에게 벌금 7천만원을 선고했다고 20일 밝혔다. ㄱ씨가 아들에게 건물을 증여한 뒤 고의로 세금 징수를 방해한 점을 고려해 엄벌의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검찰의 구형량과 동일한 만큼의 벌금형을 선고한 사건이었다.

ㄱ씨는 2018년 12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의 한 건물을 아들에게 증여했다. 상가 증여로 발생한 양도소득세와 관련해, ㄱ씨는 2020년 8~9월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양도소득세를 과소신고한 사실이 드러나 1억1800여만원을 추가로 납부하게 됐다. 그러자 ㄱ씨는 세무조사 결과 통지서를 받기 하루 전날, 보험사 두 곳을 차례로 찾아가 자신의 명의로 가입된 생명보험 2건을 해지하고 해약금 2억9900만원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통장에 있던 잔고까지 합친 돈 3억1400만원을 314회에 걸쳐 현금으로 인출했다. 현재 현금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과세 당국의 세금 징수 처분을 회피하고자 한 일이었다.

이에 ㄱ씨는 세금을 내야하는 사람이 체납처분의 집행을 면탈할 목적으로 재산을 은닉, 탈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제껏 한 평생 살면서 한 번도 형사처벌을 받은 적이 없던 ㄱ씨의 첫 범죄 혐의였다.

지난달 초, 지팡이를 짚고 중년의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피고인석에 선 ㄱ씨는 혐의를 부인했다. ㄱ씨는 “아들에게 증여한 건물을 사면서 사채를 많이 얻었고, 이 채무를 변제하는데 보험 해약금 등을 사용했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사건 기록을 살펴본 판사가 “사채를 변제했다는 기록이 없고, 피고인이 매입한 상가는 담보가 잡힌 것이 없던 깨끗한 건물이었다”고 되물었는데도, 피고인은 “사채 상환” 주장을 끝까지 반복했다. 재판부는 선고기일 전까지 채무 변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면 내라고 하고 재판을 마무리했다. 검찰은 ㄱ씨에게 벌금 7천만원 구형했다.

하지만 선고기일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ㄱ씨는 사채 상환과 관련한 증거를 내지 못했다. 재판부는 “고의로 치밀하게 재산을 현금화해 은닉, 탈루한 것으로 보이고, 현금화한 돈을 채무 변제에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누구에게 무슨 일로 변제했는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며 검찰의 구형량과 같은 벌금 7천만원을 선고했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ㄱ씨는 원래 납부해야 하는 세금에 더해 벌금 7천만원까지 내야한다. 지금이라도 세금을 내면 항소심 재판을 받으면서 일부 감형을 기대해볼 수 있다. 판결을 선고 받은 뒤, ㄱ씨는 아무 말 없이 지팡이를 짚으며 느린 걸음으로 법정 밖으로 나갔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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