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도 소용없어.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지난해 5월17일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데이)을 맞아 내 건 문구다. 해당 문구는 같은 해 퀴어퍼레이드에서도 사용되며 성소수자와 앨라이(성소수자 인권 지지자) 공감과 반응을 끌어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올해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3’ 캠페인을 시작한다. 지난해 캠페인이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성소수자·앨라이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자신을 긍정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모습에 주목한다. 〈한겨레〉도 이 캠페인에 동행했다. 시리즈는 17일까지 총 6차례 계속된다.
지난 5일 서울시 은평구 자택에서 김용민(33)·소성욱(32)씨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무지갯빛 가랜드가 걸린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퍼레이드 같은 세상이 등장했다.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책장 가장 높은 곳에 놓여 있었다. 커튼 대신 1m가 넘는 무지개 천이 창문을 가렸다. 마우스 패드, 손수건, 각종 엽서와 장식품 하나에도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다.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란색 인형을 모아두자 역시 무지개다. 동성부부 김용민(33)·소성욱(32)씨도 무지개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지난 5일 앰네스티와 함께 만난 그들의 집은 ‘무지개 천국’이었다.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부부의 집에서 그들을 만났다.
창문에 달린 긴 천에는 응원의 말 수십 개가 적혀 있었다.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 방명록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김씨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자!”는 문구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 말이 제일 와닿았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혼인 평등’, 동성혼 법제화다.
부부는 이를 위해 계속 싸울 거라고 했다. 방 한쪽 벽에는 부부의 사진과 “평등한 사랑, 평등한 권리, 동성결혼 NOW”라는 현수막이 있었다. 그 옆에는 2월22일자 〈한겨레〉 신문이 전시됐다. 지면에는 부부가 손을 맞잡고 웃는 사진 위로 “동성부부 ‘권리 보장’ 첫발 딛다”는 제목이 붙었다. 전날, 법원은 사실혼 동성부부인 이들을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로 인정했다. 동성부부의 사회보장제도상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이들은 2019년 5월 결혼식을 올린 사실혼 동성부부다. 부부는 2021년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동성 배우자도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원고 패소 판결하며 “현행법 체계상 사실혼 관계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2심은 달랐다. 재판부는 “공단이 이성관계인 사실혼 배우자 집단에 대해서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동성관계인 동성결합 상대방 집단(동성부부)에 대해서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하는 차별대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며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라고 덧붙였다.
2년 가까이 이어진 법정다툼 기간동안 부부를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1심에서 패소하고 2심 결론이 나기 전이었다. 김씨는 소씨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김씨 앞에 오더니 자신의 휴대전화를 김씨의 얼굴에 갖다 댔다. ‘나도 성소수자인데 두 분을 응원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김씨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응원을 전하고 그분은 사라졌어요. 자신을 드러낼 순 없어도 우리를 지지 해주시는 분들이 곳곳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소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2심 승소 판결 이후에 많은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기대하지 않은 인물도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을 소개해 준 공인중개사 대표가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뉴스 봤다고 너무 축하드린다고요. 저희가 성소수자로서 제대로 커밍아웃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에요.” 소씨는 그때 느꼈다고 했다. “주변 사람, 내 이웃이 성소수자라고 느끼는 순간, 혐오는 힘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5일 서울시 은평구 자택에서 김용민(33)·소성욱(32)씨가 인터뷰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김씨는 “저희가 승소한 것부터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느껴요. 최근 들어서 좋은 판결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최근 1~2년 사이 법원은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한 고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이 위법하고(2021년 10월), 동성 군인이 사적 공간에서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면 군형법의 추행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2022년 4월) 판결을 잇달아 내놨다. 지난해 10월에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자신의 나라에서 형사처벌 등 박해를 받은 트랜스젠더를 한국 난민법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모두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한 판결들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변하고 있다. 동성혼 법제화가 되지 않아도 결혼식을 올리는 동성부부가 늘어나고 있다. 소씨는 “성소수자들이 용기와 힘을 얻고 있어요. 그게 세상이 변하는 증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드러내는 것, 드러나는 것이 위험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성소수자들이 일상을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들은 변하지 않는 것은 ‘정치’뿐이라고 했다. 김씨는 “재판부에서 소수자 보호가 사법부의 책임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입법부의 책임이기도 해요. 현재 정치는 그 의무를 저버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소씨도 동의했다. “인터넷 댓글에 달린 조직적인 혐오의 목소리를 일상에서 들은 적은 없어요. 그래서 때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목소리가 허구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정치는 이 허구의 목소리를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의 말을 뒷받침하듯, 지난 3일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서울광장 사용을 8년 만에 불허했다.
김씨는 혐오자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가 “비겁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이 보장되는 흐름은 거스를 수가 없어요. 그 흐름에 역행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했다. 둘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제 정치가 바뀔 차례예요.” 지금 잠깐 핑계를 대며 피하는 게 유리해 보일지라도, 그런 정당과 정치인은 결국에는 도태될 거라고. 둘은 앞으로 ‘혼인 평등’을 위한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혐오자들에게는 이렇게 전했다. “미워해도 소용없어. 사랑이 결국 이기고, 우리는 행복하게 잘 늙어갈 거니까.”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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