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영화 <평화로 가는 길>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퐁니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오른쪽)과 함께 한 도안홍레 감독. 사진 도안홍레 제공
베트남 사람 도안홍레(49)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참전했던 사실을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없다. 베트남 꽝남성에서 수년간 전쟁기자로 활동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찾아간 꽝남성의 농촌 마을 주민들은 “따이한(한국군)처럼 악하다”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한국군 동맹이었던 남베트남 정부 쪽에 있던 사람들조차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 사람들이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한다고 했다. 꽝남성 퐁니 마을의 한국군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63)은 한국 시민단체와 변호사들 도움으로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한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겼다. ‘한국인들은 국가 체면을 중시한다는데 어떻게…’ 도안홍레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서 카메라를 들었다. <평화로 가는 길>(51분)은 응우옌티탄이 한국의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4년의 과정을 담았다. 이 영화는 올해 1월27일 베트남 국영방송 브이티브이(VTV)8에 방영되었고, 6월21일 베트남 언론협회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도안홍레 감독을 서면으로 만났다.
영화는 응우옌티탄이 걷는 길을 쫓는다. 퐁니의 위령비에서 서울 서초동의 법정 앞까지, 농촌 마을의 소심하고 연약한 여성이 진실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운동가로 변모하는 행로를 따라간다. 응우옌티탄의 손을 잡아주는 한국 친구들이 등장하고, 뉴스로 남은 역사의 풍경들도 스쳐 간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의 시위도 그중 하나다. 영화는 응우옌티탄을 주인공으로 이를 마주하는 한국사회의 표정까지 보여준다. 이 영화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도안홍레 감독(왼쪽)이 베트남 꽝남성 퐁니마을 응우옌티탄의 집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도안홍레 제공
“한국 사람들은 학살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며 굳이 다시 떠올릴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과거와 현재, 진보와 보수, 이성과 감성의 충돌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는 베트남이 자신의 역사를 성찰할 때에도 필요할 것이다.”
요즘 베트남 청년들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른다. 한국을 그저 경제와 문화의 강국으로만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국인들에게 감동해 울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가의 품격을 생각하게 해준 기회였다거나, 역사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는 이도 있었다.”
도안홍레 감독은 전쟁의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다. 과거의 이상과 달리 모순으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말년에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를 등장시킨 <마지막 공산주의자>는 2015년 한국의 제7회 DMZ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1975년 4월 자신의 아기를 미국에 보낸 사이공(현 호치민)의 한 어머니가 44년 동안 아이를 찾아 다시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어머니>(2020년)는 이탈리아 세파루 영화제 심사위원상과 다낭시 문학예술최고상을 수상했다. <평화로 가는 길>의 베트남 언론협회상 수상 의미는 뭘까. “베트남과 관련이 있는 다른 사회의 민주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기쁘다.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배울 것이다.”
퐁니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왼쪽)이 2022년 8월 국가배상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응우옌티탄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와 만나고 있다. 영화 속 장면이다. 사진 도안홍레 제공
영화 정신을 묻자 그는 “진실성”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힘이라고 했다. “진실성은 가끔 엄중하지만 현실은 절대로 한장의 엽서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 진실은 엄중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에서 나는 모든 인물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베트남 관객들도 그들을 사랑했기에 나도 즐거웠다.”
영화 중간에는 잠깐 애니메이션이 나온다. 1968년 2월12일 응우옌티탄이 퐁니에서 겪은 학살의 순간들을 그림과 소리로 재현한 장면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군인들과 개 짖는 소리, 불타는 집들, 널려있는 시신, 흐느낌과 비명. 잔뜩 클로즈업된 군인의 얼굴은 한국사람 같지 않아 낯설기만 하다. 한국인들에게 이미지로 학습된 북한 무장공비나 베트콩의 얼굴을 닮은 것도 같다. 응우옌티탄은 이 얼굴을 보며 “그때의 한국 군인들과 너무 비슷해서 얼굴 생김만 보고도 떨리고 무서웠다”고 했단다.
<평화로 가는 길> 끝 부분엔 지난 2월7일 응우옌티탄이 자신의 집에서 한국 법원의 국가배상소송 1심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옆에 있었다는 도안홍레 감독은 “손이 떨려 혼났다”고 했다. 전화로 승소 소식을 듣자 응우옌티탄이 말했다. “오 세상에나. 이겼다고? 이겼다고? 이렇게 기쁠 수가.” 두 사람은 감격에 겨워 끌어안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의 감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는 이 영화가 1월27일 방영된 탓에 승소 장면은 반영되지 못했다. 이후 추가로 그 촬영분을 넣었다. 도안홍레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담긴 재판의 결과로 베트남 관객들이 “한국 사람들 참 아름답다” 여길 거라고 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전쟁 세대의 기억을 다룬 <마지막 공산주의자>는 2015년 한국의 제7회 DMZ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사진 도안홍레 제공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번역 도움 권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