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조희대 전 대법관(가운데)이 2020년 1월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원장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간담회에 참석해 앉아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지명된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는 ‘정통 보수법관’으로 불린다. 인사청문 절차를 앞두고 19일 한겨레가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조 후보자의 대법관 시절 판결을 살펴봤다. 조 후보자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밝힌 소수의견을 살펴보면 법문을 적힌 그대로 해석하는 ‘문언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법을 적혀있는 대로만 해석하는 문언주의는 기존 법질서를 옹호하는 ‘사법 보수주의’와 정부와 국회에 대한 사법부의 견제 기능을 약화하는 ‘사법 소극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 “법적 안정성” 중시하는 문언주의자
조 후보자의 문언주의적 면모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판결은 2014년 채무자회생법 관련 전원합의체의 소수의견이다. 채무자회생법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대법은 ‘파산선고 뒤 발생한 미지급임금 지연손해금’이 우선변제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반대의견에 이름을 올린 조 후보자는 독자적인 보충의견을 내 다수의견의 적극적 법 해석을 비판했다.
조 후보자는 “법률 해석은 문언에 충실해야 하고 이를 벗어나선 안 된다. 법률의 입법 취지와 목적, 연혁 등을 고려한 목적론적 해석도 이런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며 “다소의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해, 나아가 어떤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언을 벗어나 법을 왜곡한다면, 심각한 사법불신과 저항을 불러와 결국 법적 안정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법해석론은 지난 ‘김명수 대법원’이 보여준 판결 경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진보 성향 대법관들이 다수 임명됐던 김명수 대법원이 노동 사건 등에서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법 해석으로 새로운 판단 기준을 내놓거나 불합리한 판례를 변경해 왔지만, 조 후보가 대법원장이 될 경우 사법 보수주의와 사법 소극주의로 대법원의 무게중심이 이동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조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된다면, 입법 취지와 배경을 살피고 우리 사회에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정부와 국회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대법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대법원장은 소부 판결을 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전원합의체를 이끌고 전국 3천여명 판사의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사법부 전체 지향점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과거사 사건’ 바로잡기도 제동 우려
조 후보자가 대법원장에 취임하면 권위주의 정부 시절 시국사건에 대한 재심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9년 대법원은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군경에 체포된 뒤 총살된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을 때, 조 후보자는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중 하나였다. 형사소송법은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경찰이 직무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증명돼야 재심사유로 인정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검사와 경찰이 불법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조 후보자는 반대의견에서 “원심은 증거에 의해 재심사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망각하고 그동안 일관된 원칙에 따라 이뤄져 온 대법 판례와 재판 실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며 “법관은 정치적 판단자나 역사적 심판자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여순사건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상황에서 조 후보자는 개별 사건에 대한 재심사유를 법 문언에 따라 엄격하게 따져 반론을 편 것이다. 이는 과거사 사건 청산을 통한 인권 보장보다 법적 안정성을 더욱 중시하는 조 후보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 ‘원칙론자’ 정치적 외풍도 막아줄까
다만 ‘엄격한 원칙론자’로 알려진 조 후보자에 대한 법원 내 기대도 적지 않다. 조 후보자가 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보수 성향을 띄지만, 극심한 정치의 사법화 속에서 사법부를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켜낼 원칙주의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조 후보자는 그동안 이름이 오르내린 대법원장 후보자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일 수는 있지만, 법원 내 신망이 두터운 분”이라며 “워낙 원칙과 소신에 투철한 분이라 정치적 외풍이 불 때 이를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