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김자연씨는 2016년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하지 않아’(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렸다가, 남성 유저들로부터 ‘남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라는 공격을 받았다. 김자연씨 트위터 갈무리
“지금 와서는 그 ‘결정’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어요.” 성우 김자연씨는 최근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속 ‘집게손가락’ 모양이 촉발한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 논란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하다. 김씨는 게임업계의 ‘페미 사상 검증’의 시작으로 꼽히는 2016년 ‘넥슨 게임 클로저스 사건’의 ‘피해자’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하지 않아’(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가 졸지에 ‘남자를 혐오하는 페미’로 찍혀 논란 하루 만에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역할에서 교체됐다. 그가 말한 결정은 당시 ‘섣부른 판단과 행동으로 많은 분들께 큰 상처를 드렸다’고 사과하며 ‘넥슨이 부당해고를 한 것이라는 표현은 삼가달라’는 입장문을 내놓은 것이다.
“제가 정신을 빨리 차리려고 더 애썼더라면, 그래서 (넥슨과) 서로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 다른 방안을 모색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김씨는 17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건 이후 7년이 지났지만 게임 업계의 ‘페미 사상 검증’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김씨의 사건 이후, 남초사이트에서 일단 논란이 제기되면 업체는 빠르게 사과하고 관련자를 문책하는 게 공식처럼 돼 버렸다.
“당시엔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많은 욕설이 한꺼번에 계속 쏟아졌고, 큰 회사에서 마음 먹고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어떻게 될지도 두려웠어요. 또 다른 누가 저를 도와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고요.” 김씨는 그런데도 김씨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 노력은 하지 않고, 페미 논란이 일었다 하면 무조건 사과와 담당자 문책부터 하는 기업들을 비난하는 대신, 먼저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제 일이 선례가 돼, 다른 곳에서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흐름이 생긴 것 같아요. 다른 많은 분들이 같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며 책임감과 죄책감 같은 것을 느껴요.”
김씨는 “회사에 ‘소비자’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지는 않아요. 그래도 기업들이 지나치게 휘둘리는 감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무조건적으로 (일단 논란을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페미 작가 퇴출 등의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과연 상식선의 요구인가를 고민하고 대처했으면 좋겠어요.”
김씨에게 ‘2016년의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건 이후,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쪽에서 들어오는 일감이 현저히 줄었다. “특정 분야에선 아예 일이 끊겼어요. 간혹 함께 일하자며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2016년의 일에 대해 알고 계시냐’고 묻고나면, 연락이 두절됐고요.” 김씨는 용기를 내 이런 얘기를 전하면서도, 말 한마디한마디가 조심스럽다는 듯 그곳이 어디라고는 밝히지 않았다.
김씨는 “지금 (남초 사이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페미 사상 검증)을 보면, 단순히 이기고 지는 놀이처럼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명예롭지 못한 낙인을 찍는 것이 안타까워요”라고 말했다. 그는 “서로 간에 (이런 일에) 불필요하게 기력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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