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을 올해 첫번째 국가기념일로 맞았는데 기념일로 정했지만 6월항쟁과 이후 87년체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20년이 흘러서 후배들에게는 이제 역사의 차원이 됐다. 당시 선생님은 어떤 역할 하셨나.
=계간 <창작과비평>이 80년에 폐간됐고 85년에 출판사마저 등록취소됐다. 86년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 등록을 다시 냈다. 출판사 등록취소당한 계기가 <창작과비평>이라는 무크지를 냈기 때문이었는데 87년 들어 <창비 1987>이라는 이름으로 무크지를 다시 내기로 했다. 또 무슨 파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일에 매진하고 국본(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지도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데모현장에 더러더러 나갔지만 열성파는 아니었다. <창비 1987>이 출간된 것은 6·29 선언 직후였지만 준비 당시에는 또 한번 군사독재에 도전한다는 마음이었다. <창비 1987>이 나와서도 무사하고 이듬해 계간지가 복간되고 창작과비평사 이름도 되찾은 건 6월항쟁 덕분이다.
-6월항쟁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절반의 승리, 미완의 승리’라고 했고, 보수세력은 전반부 10년은 언급 않은 채 후반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 최장집 교수(고려대) 같은 분은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고까지 평가한다. 선생님은 성공한 시민혁명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미완의 혁명이라거나 실패했다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규정하는 자의적인 판단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절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민주화가 아직도 더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에서는 공감하지만 한반도적 시각이 빠져있다. 남한상황만 놓고 수구세력과 민주세력을 갈라놓는 것은 분단체제 변혁을 위해 합리적 보수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에 어울리는 설정이 아니라고 본다.
‘잃어버린 10년’ 주장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지난 10년만 너무 따로 떼어 옹호하는 것도 보수진영의 논리에 말려드는 것이다. 요즘 독재와 권위주의를 섞어 쓰는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은 독재였고 노태우 정권은 권위주의지만 독재는 아니었다. 민주화 20년의 연속성도 보아야 한다. 최근 10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2000년 6·15공동선언인데, 이는 98년의 정권교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노태우정권 하의 남북연합 제안이라든가 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뿌리를 둔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년을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양극화가 심해지는 등 일부 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든가 과거사 진상규명이라든가 6·15선언 이후 한국경제의 안정이라든가 이런 것들도 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므로 좀더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10년 주장에 대한 공감이 있는 것은 일반 민중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상황이 연관돼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중들에게 양극화는 생활상의 어려움으로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과거 10년의 역사 혹은 20년의 역사가 실패다라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이 아닌 학자들까지 그렇게 선동적으로 말해야 되는가? 가령 과거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복권하는 조치, 이런 것은 직접 관련 안된 사람들은 기분이 좀 좋기는 해도 생활에 와닿지는 않는 문제이고 6·15시대의 개막으로 인해서 국민 전체가 엄청난 혜택을 보지만 직접적인 이득을 봤다고 실감하는 사람은 제한돼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대로 정리하는 게 학문하는 사람들의 의무다.
-97년 이후 양극화의 심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연은 외환위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87년체제 자체 안에 그런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장만능주의적 세계화가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엠에프 위기가 아니더라도 양극화는 어느정도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런 대세를 결정적으로 반전시키는 체제변화를 성공한 혁명이라 한다면, 그것은 시민혁명 이후 제2의 혁명이다. 분단체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런 제2의 혁명을 실현가능한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이 안됐다고 해서 정권을 탓하고 자유주의자를 탓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싶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설혹 통일을 이룩하더라도 세계시장의 원리에서 즉각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논리를 펴왔다. 그런데 이것이 시장논리를 완전히 벗어나느냐 완전히 종속되느냐의 흑백논리로 가를 사안은 아니다. 87년체제의 성취를 바탕으로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장만능주의의 위력을 견제하고 감소시키는 우리 내부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그래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얘기한다. 그런 시각을 빼고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완전한 우위에 서는 새로운 사회체제(87년체제 이후)를 남한사회 내에서만 설계하고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민주화가 제대로 되려면 국민들이 자신의 이념이랄까, 지향에 맞는 정당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정당정치를 어렵게 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가능한 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한국은 분단된 현실 속에서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을 했고 획기적인 민주화를 이뤘다. 독일과 달리 동족상잔을 경험했는데도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에 합의해 진전시키고 있다. 이런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사회발전의 모델도 이런 현실에 맞는 한국 모델을 창안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구?프랑스? 독일 등의 모델도 공부하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미식 자본주의도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기성의 어느 모델이 좋으니까 그걸 따라가자는 논의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정당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 정당정치를 어떻게 꽃피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없다는 것은 맞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될 때면 우익이나 보수쪽은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액면대로 보면 맞는 말이다. 다만 그들은 분단현실의 특수성을 오히려 간직하고 싶어하고 특수상황의 억압들을 항구적인 걸로 받아들이려 한다. 분단이라는 특수성이야말로 우리사회 모든 논객과 사회과학자들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화두이다. 분단현실의 억압성도 있고 동시에 분단현실을 완화, 해소해가는 한반도 특유의 개방성도 있는데, 분단의 특수성이란 담론을 보수파에게 넘겨주거나 반미자주통일의 단순논리에나 맡겨두고 있으니 이건 지식인사회의 엄청난 직무유기다. -지난해 북이 핵실험 했을 때 남한사회가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 변수는 이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 됐다며 남한만의 발전전략을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 핵실험 이후 남한 사회의 반응은 6·15 이후 우리 사회의 역량이 늘어난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지적할 점은 북에서 핵실험을 하고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지니 분단체제가 복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북의 핵실험은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상타파를 위해 극단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봐야 한다. 남한만의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북을 잊어버리고 살려고 한다고 북이 고분고분히 잊혀져주는가. 북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게 마련이고 핵무기 개발까지도 한다. 핵실험 얼마 뒤 다시 6자회담 테이블에 나오고 부시도 정책을 바꿨기 망정이지 2차 실험까지 갔으면 아무리 우리 내부가 성숙했더라도 국가신인도가 떨어지고 어디서 어떤 충돌과 혼란이 발생할지 예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한이 북을 적대시하면서 혼자만 선진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당장 통일은 안 하더라도 남북관계를 풀어가면서 선진화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선진화하겠다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는 선진화론은 또하나의 허상이다. 나쁜 경우는 남북대결을 조장하면서 기득권을 강화하는 입장을 미화하는 이름일 수 있다. -선진화 얘기 나왔으니 말씀인데 보수진영의 선진화 담론이 우리 민족의 미래 전략으로 타당한가? =선진화의 내용을 따져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선진화 구호를 보수진영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실감할 수 없는 얘기만 해대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오류다. 민주화되고 인권이 보장되고 지난날의 어두운 현실이 햇볕에 드러나는 거야말로 선진화의 일부다. 왜 신자유주의에 편승해서 경제성장하는 것만이 선진화인가? 우리사회의 개혁진보세력이 선진화담론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존의 선진화론자들과 접점도 찾고 잘못된 것 적극적으로 비판도 해야 한다. 나 자신은 '한반도 선진사회'라는 걸 내세운 바 있다. -올 대선은 민주화의 미래를 가름하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는 아직 뚜렷한 주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줄 수 있는 것도 민주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선생님께선 개혁진영의 단결을 주장하시는데…. =나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 믿는다. 다만 실현방법이 아직 눈에 잘 안 보인다. 나는 현실정치 전문가가 아니라서 답을 제시할 수 없지만 더 기다려볼 문제다. 미리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일각에서는 올해 대선을 통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전혀 다른 선진화 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쪽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또 그쪽이 승리했을 때 퇴보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세력이 승리하더라도 그때의 퇴보는 87년체제의 말기증상을 확대하고 연장하는 퇴보이지, 87년체제와 본질적으로 다른 체제를 출범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선택은 87년체제를 질질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유일한 타개원칙을 중심에 놓고 그에 걸맞는 정책배합, 세력연합을 이뤄내는가 하는 것이다. 87년체제의 양대 흐름을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로 보면서 지금 양자가 교착상태에 빠졌고 오히려 경제적 자유화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김종엽 교수(한신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는 87년체제를 좀 더 정확히 보려면 세 개의 흐름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경제적 자유화, 그리고 남북의 접근이다. 이 셋의 배합이 지금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 현재의 위기다. 우리가 87년체제 이후의 새 체제를 출범시킨다 해도 셋 중에 어느 하나를 청산한다든가 완전히 제압하는 해법은 없다. 민주화의 원칙이 확실히 견지되고 남북접근도 시민참여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면서 경제적 자유화도 우리 실정에 맞게 진행시키는 새로운 배합이 필요하다. 현시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압도하는 체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중의 생활상의 복지라든가, 정부 정책의 공공성이 어느정도는 관철되는 경제적 자유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세 흐름의 이런 새로운 배합을 이루는 원리가 변혁적 중도주의다. [위에 나왔던 대목임: -지난해 북이 핵실험 했을 때 남한사회가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남한이 그 정도를 감수할 수 있는 역량이 쌓여서 그렇다고 보는지.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화해가 진전이 됐고, 남한사회의 독자적인 진전이 있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지적할 점은 북에서 핵실험을 하고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지니 분단체제가 복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 북의 핵실험은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상타파를 위해 극단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봐야 한다. 분단체제의 재안정화가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와 관련해 양 극단을 배제한 민족해방·민중민주·시민민주 진영 등 3자가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동력이 있을지….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가고 있다. 기존의 방향 그대로 가려는 이들은 맥을 못 추게 되어 있다. 많은 대중이 당장에 쉽게 공감하는 온건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반도 전체를 설계하는 변화가 아니면 개혁도 제대로 안 된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남북접근이나 평화문제를 경제성장, 시민들의 생활향상과 결부시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좁은 의미의 좌파가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지만 그 논리만 가지고는 자기들 목표를 실현할 기회가 안 돌아올 거라는 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급진적 통일론자들과도 소통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면서 온건개혁세력과의 연대전략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이런 인식의 진전을 이룩해가는 여러 세력을 합칠 수 있는 게 변혁적 중도주의다. 물론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선거용 구호는 아니다. 다만 그런 방향이 아니고는 대선정국에서도 세력집결이 어려울 것이며 한반도 현실에 맞는 생산적인 담론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남북문제를 푸는 데 시민참여형 방식을 얘기했는데 부연설명을 한다면... =쉽게 말해 무력통일을 할 경우에도 대대적인 민중동원이 이뤄지지만 그건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다르다. 또 평화통일을 하더라도 독일처럼 급속하게 해버리면 정권과 기득권세력이 주도하고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추인하거나 통일의 뒷감당을 하는 역할을 주로 맡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남북 정상이 만나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통일하자고 합의했다. 두 정상이 합의할 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단 그런 합의가 성립하고나면 시민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이 생긴다. 더구나 우리 남쪽의 시민사회를 보면 끼어들 여지가 생기면 반드시 끼어든다. 시민사회를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 그간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기업인까지 포함한 시민사회가 이미 참여해왔고 북미관계가 개선될 경우 획기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올 대선에선 개인적으로 어떤 입장인가? =6·15남측위원회 대표는 현실정치에 대해 다소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게 어울린다고 믿는다.
=시장만능주의적 세계화가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엠에프 위기가 아니더라도 양극화는 어느정도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런 대세를 결정적으로 반전시키는 체제변화를 성공한 혁명이라 한다면, 그것은 시민혁명 이후 제2의 혁명이다. 분단체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런 제2의 혁명을 실현가능한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이 안됐다고 해서 정권을 탓하고 자유주의자를 탓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싶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설혹 통일을 이룩하더라도 세계시장의 원리에서 즉각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논리를 펴왔다. 그런데 이것이 시장논리를 완전히 벗어나느냐 완전히 종속되느냐의 흑백논리로 가를 사안은 아니다. 87년체제의 성취를 바탕으로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장만능주의의 위력을 견제하고 감소시키는 우리 내부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그래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얘기한다. 그런 시각을 빼고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완전한 우위에 서는 새로운 사회체제(87년체제 이후)를 남한사회 내에서만 설계하고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민주화가 제대로 되려면 국민들이 자신의 이념이랄까, 지향에 맞는 정당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정당정치를 어렵게 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가능한 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한국은 분단된 현실 속에서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을 했고 획기적인 민주화를 이뤘다. 독일과 달리 동족상잔을 경험했는데도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에 합의해 진전시키고 있다. 이런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사회발전의 모델도 이런 현실에 맞는 한국 모델을 창안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구?프랑스? 독일 등의 모델도 공부하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미식 자본주의도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기성의 어느 모델이 좋으니까 그걸 따라가자는 논의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정당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 정당정치를 어떻게 꽃피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없다는 것은 맞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될 때면 우익이나 보수쪽은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액면대로 보면 맞는 말이다. 다만 그들은 분단현실의 특수성을 오히려 간직하고 싶어하고 특수상황의 억압들을 항구적인 걸로 받아들이려 한다. 분단이라는 특수성이야말로 우리사회 모든 논객과 사회과학자들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화두이다. 분단현실의 억압성도 있고 동시에 분단현실을 완화, 해소해가는 한반도 특유의 개방성도 있는데, 분단의 특수성이란 담론을 보수파에게 넘겨주거나 반미자주통일의 단순논리에나 맡겨두고 있으니 이건 지식인사회의 엄청난 직무유기다. -지난해 북이 핵실험 했을 때 남한사회가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 변수는 이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 됐다며 남한만의 발전전략을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 핵실험 이후 남한 사회의 반응은 6·15 이후 우리 사회의 역량이 늘어난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지적할 점은 북에서 핵실험을 하고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지니 분단체제가 복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북의 핵실험은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상타파를 위해 극단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봐야 한다. 남한만의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북을 잊어버리고 살려고 한다고 북이 고분고분히 잊혀져주는가. 북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게 마련이고 핵무기 개발까지도 한다. 핵실험 얼마 뒤 다시 6자회담 테이블에 나오고 부시도 정책을 바꿨기 망정이지 2차 실험까지 갔으면 아무리 우리 내부가 성숙했더라도 국가신인도가 떨어지고 어디서 어떤 충돌과 혼란이 발생할지 예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한이 북을 적대시하면서 혼자만 선진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당장 통일은 안 하더라도 남북관계를 풀어가면서 선진화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선진화하겠다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는 선진화론은 또하나의 허상이다. 나쁜 경우는 남북대결을 조장하면서 기득권을 강화하는 입장을 미화하는 이름일 수 있다. -선진화 얘기 나왔으니 말씀인데 보수진영의 선진화 담론이 우리 민족의 미래 전략으로 타당한가? =선진화의 내용을 따져봐야 한다. 한편으로는 선진화 구호를 보수진영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실감할 수 없는 얘기만 해대는 것은 중대한 정치적 오류다. 민주화되고 인권이 보장되고 지난날의 어두운 현실이 햇볕에 드러나는 거야말로 선진화의 일부다. 왜 신자유주의에 편승해서 경제성장하는 것만이 선진화인가? 우리사회의 개혁진보세력이 선진화담론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존의 선진화론자들과 접점도 찾고 잘못된 것 적극적으로 비판도 해야 한다. 나 자신은 '한반도 선진사회'라는 걸 내세운 바 있다. -올 대선은 민주화의 미래를 가름하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는 아직 뚜렷한 주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줄 수 있는 것도 민주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선생님께선 개혁진영의 단결을 주장하시는데…. =나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 믿는다. 다만 실현방법이 아직 눈에 잘 안 보인다. 나는 현실정치 전문가가 아니라서 답을 제시할 수 없지만 더 기다려볼 문제다. 미리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일각에서는 올해 대선을 통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전혀 다른 선진화 체제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쪽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또 그쪽이 승리했을 때 퇴보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세력이 승리하더라도 그때의 퇴보는 87년체제의 말기증상을 확대하고 연장하는 퇴보이지, 87년체제와 본질적으로 다른 체제를 출범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선택은 87년체제를 질질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유일한 타개원칙을 중심에 놓고 그에 걸맞는 정책배합, 세력연합을 이뤄내는가 하는 것이다. 87년체제의 양대 흐름을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로 보면서 지금 양자가 교착상태에 빠졌고 오히려 경제적 자유화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김종엽 교수(한신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는 87년체제를 좀 더 정확히 보려면 세 개의 흐름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경제적 자유화, 그리고 남북의 접근이다. 이 셋의 배합이 지금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 현재의 위기다. 우리가 87년체제 이후의 새 체제를 출범시킨다 해도 셋 중에 어느 하나를 청산한다든가 완전히 제압하는 해법은 없다. 민주화의 원칙이 확실히 견지되고 남북접근도 시민참여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면서 경제적 자유화도 우리 실정에 맞게 진행시키는 새로운 배합이 필요하다. 현시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압도하는 체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중의 생활상의 복지라든가, 정부 정책의 공공성이 어느정도는 관철되는 경제적 자유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세 흐름의 이런 새로운 배합을 이루는 원리가 변혁적 중도주의다. [위에 나왔던 대목임: -지난해 북이 핵실험 했을 때 남한사회가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남한이 그 정도를 감수할 수 있는 역량이 쌓여서 그렇다고 보는지.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화해가 진전이 됐고, 남한사회의 독자적인 진전이 있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와 관련해서 중요하게 지적할 점은 북에서 핵실험을 하고 한반도 긴장이 다시 높아지니 분단체제가 복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 북의 핵실험은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상타파를 위해 극단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봐야 한다. 분단체제의 재안정화가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와 관련해 양 극단을 배제한 민족해방·민중민주·시민민주 진영 등 3자가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동력이 있을지….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가고 있다. 기존의 방향 그대로 가려는 이들은 맥을 못 추게 되어 있다. 많은 대중이 당장에 쉽게 공감하는 온건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반도 전체를 설계하는 변화가 아니면 개혁도 제대로 안 된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남북접근이나 평화문제를 경제성장, 시민들의 생활향상과 결부시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좁은 의미의 좌파가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지만 그 논리만 가지고는 자기들 목표를 실현할 기회가 안 돌아올 거라는 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급진적 통일론자들과도 소통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면서 온건개혁세력과의 연대전략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이런 인식의 진전을 이룩해가는 여러 세력을 합칠 수 있는 게 변혁적 중도주의다. 물론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선거용 구호는 아니다. 다만 그런 방향이 아니고는 대선정국에서도 세력집결이 어려울 것이며 한반도 현실에 맞는 생산적인 담론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남북문제를 푸는 데 시민참여형 방식을 얘기했는데 부연설명을 한다면... =쉽게 말해 무력통일을 할 경우에도 대대적인 민중동원이 이뤄지지만 그건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다르다. 또 평화통일을 하더라도 독일처럼 급속하게 해버리면 정권과 기득권세력이 주도하고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추인하거나 통일의 뒷감당을 하는 역할을 주로 맡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남북 정상이 만나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통일하자고 합의했다. 두 정상이 합의할 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단 그런 합의가 성립하고나면 시민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이 생긴다. 더구나 우리 남쪽의 시민사회를 보면 끼어들 여지가 생기면 반드시 끼어든다. 시민사회를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 그간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기업인까지 포함한 시민사회가 이미 참여해왔고 북미관계가 개선될 경우 획기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올 대선에선 개인적으로 어떤 입장인가? =6·15남측위원회 대표는 현실정치에 대해 다소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게 어울린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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