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수송부 김정수씨
[한겨레 23돌] 행복 365
‘기자들의 형님’ 수송부 김정수씨
‘기자들의 형님’ 수송부 김정수씨
창간 뒤부터 꾸준히 <한겨레>를 지켜온 이들은 취재기자 말고도 여럿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기자들을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몫을 하는 수송팀 직원들은 ‘준’기자로 통한다. ‘기자’ 대신 ‘형님’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리지만 이들이 지금껏 만들어낸 특종만 해도 수십개에 이른다. <한겨레> 창간 때 입사해 23년 동안 ‘준’기자로 활동해온 김정수(55)씨가 느끼는 행복은 무엇인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만나 들어봤다.
1988년 <한겨레>에서 김씨가 처음 받은 월급은 36만원이었다. 이전 직장인 선경직물에서 받았던 95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김씨는 “뭇놈들이 빨갱이라고도 했지만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한겨레를 택했다”며 “입사 뒤 사회부만 내리 13년을 맡으면서 내 젊음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그가 <한겨레>에 가지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김씨는 “당시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는 게 흔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기자들은 절대 받지 않아 나까지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90년 광주 5·18 추모제에 갔을 때 광장에 모여 있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한겨레 차량이 나타나자 박수를 치며 길을 터줬고, 91년 강경대씨가 사망하고 시위가 한창일 때는 한겨레 차량만 대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며 웃었다.
김씨는 13년을 사회부 담당으로 일하다 이후 10년 동안 임원 차량을 맡았다. 그러다 올해 다시 사회부 담당으로 복귀한 김씨는 사건 현장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김씨 덕분에 건져올린 특종만 해도 여러 건이다. 이 가운데서도 김씨는 ‘무장탈영병 총기 난사 사건’과 ‘쌍용그룹 과일상자 비자금 전달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93년 무장탈영병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택가에서 주민들을 총으로 쏜 뒤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언론사로서는 유일하게 현장까지 들어가 사진 취재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996년 쌍용그룹이 경북 칠곡휴게소에서 신한국당 관계자에게 과일상자를 전달하는 장면을 취재할 때도 김씨가 서울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미행해 현장을 잡아낼 수 있었다.
김씨는 “일을 그만두는 날까지 현장에서 기자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 송채경화 기자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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