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망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종결지은 군대 내 사망사건 112건 가운데 군의 수사기록이 남아 있는 62건을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분석했다. 이 가운데 42건(67.7%)은 애초 군 수사당국의 ‘수사 부실’ 때문에 사망 원인이 규명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대 내 사망사건에 대한 수사가 부실하게 이뤄지는 것은 무엇보다 군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헌병은 사망확인조서를 작성할 때 사망자가 소속된 부대장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건 관계자인 부대장이 수사에 관여할 수 있게 돼 있는 탓에 수사는 부실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인명사고는 부대장의 진급 등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 허위진술 강요 지난달 26일 경북 포항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난 전인식(64)씨는 손때 묻은 종이 7장을 꺼내 보였다. ‘사실확인서’였다.
‘진술인은 헌병대 조사에서 사실과 다른 왜곡을 했고 소대장과 부대원들의 책임이 두려워 거짓 진술을 했다. 2012년 7월22일. 진술인 ○○○.’ ‘헌병대 조사에서 선임병들과 간부들이 최대한 숨겨야 나머지 사람들이 편하게 마무리하고 살 수 있다는 압박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2012년 7월17일. 진술인 ○○○.’
전씨의 아들은 상병으로 근무하던 2008년 6월25일 전방 지오피(GOP) 철책 초소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다. 전 상병은 당시 23살이었다. 그의 선후임들은 전역하고 나서야 뒤늦게 사실확인서를 전씨에게 써줬다. 군에서 따돌림·폭행·하극상 등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아들을 괴롭혔던 선임 정아무개(27)씨는 “처벌받겠다”며 전씨에게 사죄했다. 아들과 멱살잡이를 했던 한 후임병은 허위 진술했다며 사실확인서를 썼다.
군 수사기록은 딴판이다. 헌병은 “전 상병으로부터 폭행당한 일이 있느냐?”고 묻고, 병사는 “전 상병이 후임을 때리고 욕설하여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답한다. 대부분의 문답은 전 상병의 폭력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 상병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후임병의 얼굴을 때리고 죽여버리겠다며 총으로 위협한 사실을 알게 된 김아무개 병장이 질책하자 전 상병이 자살했다’는 게 군 수사의 결론이었다.
권익위는 지난해 1월 전 상병이 집단 따돌림과 구타, 지휘관의 관리·감독 소홀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며 국방부에 순직 등록을 권고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앞서 2010년 11월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아버지 전씨가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 증거폐기·현장훼손 이아무개(당시 22살) 상병은 2006년 6월18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서 총기로 자살했다. 군 수사기관은 “선임에 의한 언어 폭행과 우울한 내용의 책이 자살에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내렸다. 부대 쪽은 암울한 부분에 밑줄이 쳐진 이 상병의 책을 유가족에게 보냈다. 권익위 관계자는 “우울한 책 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은 군이 자살로 결론내릴 때 단골 이유다. 김훈 중위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등을 읽고 우울한 마음에 자살했다고 국방부가 발표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김아무개(56)씨는 이 상병의 유품 중 수첩이 찢어진 데 의문을 품었다. 김씨는 전국을 헤매며 찾아낸 전역 병사들로부터 “군 간부들이 시켜서 사망 이후 고인의 수첩 일부를 ‘짬밥통’에 넣어 없앴다. 잠 안 재우기 등 가혹행위가 이 상병에게 가해졌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씨는 전역 병사 3명의 사실확인서를 국방부에 제출했지만 곧이어 이들은 모두 이런 진술을 부인했다. 진술을 번복한 이들 중 한명은 김씨에게 “자꾸 군에서 전화 오고 고소한다고 해서 진술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며 사과했다.
박아무개 중위의 부모는 14년간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박 중위는 1998년 4월12일 장교 숙소에서 질식사했다. 사망 당시 박 중위 옆에는 만화책이 펼쳐져 있었다. 군 수사기관은 “박 중위가 도색잡지를 보고 ‘자기 색정사’했다”고 결론냈다. 하지만 이 만화책이 15살 이상이면 볼 수 있는 <챔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 중위의 가족은 2012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재판 결과, 군이 사고 현장을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군이 사고 현장을 임의로 훼손하고, 발견 당시 펼쳐진 만화책을 선정적인 사진으로 함부로 단정했다. 사망 원인에 대한 진실 규명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군대 생활 중 ‘자기 색정사’한 군인의 유족으로 불명예스럽게 살아오게 됐다”며 박 중위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