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보수주의자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는 대화론자다. 8월27일 오전 두시간에 걸쳐 강남에 위치한 박 전 장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특집 / ‘기록하는 보수’ 박철언 전 장관
▶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는 현재 2030세대의 정치적 감각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지려 노력했다. 그러므로 ‘누가 처음 3당 합당을 제안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야 했다. 3당 합당이 만든 정치구도가 결국 ‘바보 노무현’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에 걸쳐 모두 2시간30분 남짓 인터뷰했고, 최대한 답변 취지 그대로 정리했다. 취지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 존댓말은 일부러 반말체로 정리했다. 그는 여전히 달변이었다. 곧장 말로 답할 때도 어순, 어휘의 명징함, 문장의 호응 등이 정확했다.
(※질문 취지 및 배경: 1990년 1월 초 노태우 당시 대통령,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가 전격적인 합당을 선언했다. 특히 야당 투사였던 김영삼의 합당 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후 ‘야도’였던 부산은 오랫동안 ‘여도’가 됐다. 3당 합당의 실무 주역이 박철언 전 장관이었고. 본인은 회고록에서 이미 1988년 ‘보혁구도’로 정치 개편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일본의 보수는 1955년 사회당 좌·우파가 대통합에 나서자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보수대통합을 이뤄 자유민주당(자민당)을 만들었다. 이런 ‘보혁’ 구도 아래서 자민당은 수십년간 집권했다.)
-혹시 주위에서 1990~91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다녔던 세대를 만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학생운동을 경험했거나 조금이라도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던 90~91학번 등 대학생들에게 3당 합당이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보혁구도로 한국 정치를 재편한다는 발상이 한명의 유권자로서 동의되지 않지만 한편 담대한 발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그것이 한국 정치를 오래 좌지우지했으니까. 그러나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 김영삼 전 대통령 회고록, 김대중 전 대통령 회고록과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비교해보면 조금씩 디테일이 다르다. 과연 누가 3당 합당 발상을 최초에 구상하고 제안한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 박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포함한 ‘4당 통합’까지 구상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김대중 총재를 비공개로 만나기도 했다. 특히 회고록에서 지하서재에서의 만남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과연 당시 김대중 총재의 이념과 정책까지도 보혁구도에서 (보수 통합으로) 충분히 같이 갈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것인가?
“물론이다. 우선 본질적인 얘기를 먼저 하자. 나는 5공화국 때 국가운영에 관여하면서 민족문제에 뛰어들게 되었고 미래 한국의 청사진을 많이 생각했다. 한국이 세계문제와 관련해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아시아적인 이익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평화공존 내지 평화통일이 돼야 한다. 앞으로는 미국 일국패권주의 대신에 다원주의가 지배해야 된다. 그러려면 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이 한 축이 돼서 아시아적 이익과 가치를 대변해야 된다. 우리가 외교 역량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을 잘 조정해서 나간다면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남남갈등도 극복하고 남북통일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헌정체제도 의원내각제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 대통령제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가 된다. 지금도 어느 누구가 대통령이 되어도, 엄청난 갈등 일으키고 있지 않는가. 의원내각제가 되면 책임정치가 작동해 수시로 정권을 바꿀 수 있고 직업공무원 제도가 안착된다. 또한 통일을 위해서도 의원내각제가 필요하다. 남측이 인구가 훨씬 많다. 국민수가 많은데 대통령제를 하려면 통일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과 수상으로 배분이 가능하다. 내각책임제의 총리는 (권력 행사를) 혼자 다 못한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로 가야 된다는 게 5공화국 말기 6공화국 초기 내 철학이다. 이것은 미래 한국의 청사진과 연결된다. 5공화국 때 안기부장 특보로 있으면서 국내정치 공작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당시 내 일은 헌정체제 연구, 남북문제와 공산권과의 수교를 위한 연구 등이었다. 이것들이 전부 미래 한국의 청사진과 관련이 된다.”
“지역감정 심화는 의원내각제 실패 탓”
-대북사업 등 국가적 과제를 위해 필요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러던 중에 어떻든 우리가 6공화국을 열었는데 첫번째 총선(1988년 총선)에서 너무 자신만만하다가 여소야대가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일부 사람들은 당시 신민주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전 총리와 연대를 통해서 안정의석만 확보하자고 했다. 그게 제일 쉬우니까.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것 가지고는 미래 한국의 청사진과 연결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남남갈등 극복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역사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혁신계, 급진혁신진보그룹들과 보수정당 체제인 ‘보혁구도’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기존 정당의 인사 대부분은 보수였다. 물론 당시 평민당의 일부 및 민주당의 일부는 급진적이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신민주공화당과 민주정의당은 물론이다. 평민당 및 민주당의 일부 급진적인 사람과 재야에 있는 급진진보그룹이 연대하고 나머지 보수가 대통합해서 ‘보혁구도’로 우리 정치가 가야지 안정적인 발전과 역사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당시 내 철학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산술적으로 과반수를 넘기 위해서 김종필 전 총리하고 연대를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당시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총재 접촉을 쭉 내가 담당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대통합은 김대중 총재가 들어가야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또 의원내각제가 되면 김대중 총재가 쉽게 함께할 수 있다고 봤다. 대통령과 수상 두 자리가 생기니까. 그러나 김대중 총재가 끝까지 자신은 ‘국가 경영에는 협력을 하지만 나는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아서 야당으로서 집권을 하고 싶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은 불완전한 형태의 3당 통합이 되었다.”
-3당 합당을 최초로 제안하거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특정하긴 어렵다는 취지인가?
“그렇다. 처음엔 모두 여소야대를 어떻게 타개할 건가 고민했다. 나는 전부터 갖고 있던 지론(4당 통합)을 노태우 대통령한테 처음에 얘기하니 ‘4당 합당 되지도 않을 얘기 하지 마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김대중 총재에겐 관심이 적었다.”
-당시 언론은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를 낳은 보혁구도로 많이 해석했다. 실제로 3당 통합 당시 일본 자민당의 보혁구도를 많이 참고했는가?
“물론 일본의 선례가 있지만 우리나라와 다르다. 일본 자민당이 그렇게 해서 오래 집권하는 것도 한 선례가 물론 될 수는 있고 실제로 기성 정치권은 그런 것을 염두에 뒀겠지만 내 철학적 바탕은 달랐다.”
-젊은 세대가 한국 정치를 돌아보면 거기에 3당 합당이 있다. 3당 합당 이전 ‘야도’였던 부산과 경남은 이후 십여년간 결코 야도로 돌아가지 않았고 반대로 1963년 대선과 1967년 대선 등 여러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표를 줬던 호남은 3당 합당 이후 모든 선거에서 무조건 민주당을 찍고 있다. 3당 합당으로 인한 이런 지역갈등은 박 전 장관이 예측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렇게 보지 않는다. 3당 합당으로 지역감정이 심화됐다기보다 의원내각제가 되지 못한 게 더 크다. 3당 합당의 이념적 기초가 내각제인데 그게 무너졌다.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과제인 발전과 복지, 화합과 통일 해결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줬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한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3당 합당을 통해 많은 일을 했다. 당시 김영삼 총재도 (3당 합당으로 인해) 결국 집권할 기회가 생겼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
파견 검사로 발령받은 시기부터
정치를 사실상 떠난 2004년까지
겪은 일들을 생생한 묘사와 함께
수십권의 수첩에 꼼꼼히 담았다 “김정은 3대세습 현실로 인정해야
인정 안 하면 무슨 방법이 있나?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도 포격
북은 분명히 사과 안 할 것
그럼에도 당연히 대화해야 한다” 친미일변도 극우파들의 착각 (※질문 취지 및 배경: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2010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두고 “노태우(전 대통령)만큼이라도 해라”라고 표현했다. 노태우 정부의 전향적인 ‘북방정책’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에게 두루 인정받는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같은 해 남북이 화해와 교류협력을 하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김대중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전 장관이 당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안기부장 특보 및 청와대 비서관으로 42차례 북한과 비밀협상을 벌였고, 공산권 국가와 수교 실무를 맡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남북교류 추진 과정에서 “극우론자들과 논쟁했다”고 기록했다. 인터뷰가 시작하고 20분쯤 지나자 박 전 장관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평화 공존 해법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퍼주기’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도 했다. 지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에 대해서는 “최악”이라는 단어를 썼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좋은 말”만 있고 핵심 문제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통 큰 일괄 타결안이 없다고 비판했다.)
-박 전 장관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90년대 초중반과 다른 게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이후로 한 세대가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저만 해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접해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북의 집권자로) 인정이 되는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권력세습은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정서적 거리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이 너무 어린 북한의 지도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그건 현실이다. 이미 북한은 60여년 동안 북한이라는 한반도의 다른 반쪽을 통치하고 있는 현실적 권력 주체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이 잘못해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든지 변고가 일어나든지 할 수 있지만 그건 별론으로 하고, 우리로서는 현실적인 권력 주체라는 점, 핵과 미사일과 생화학 무기를 가지고 바로 눈앞에 있는 그 실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무슨 방법이 있나?”
-김정은이라는 한 정치인이 아무리 이상하게 보이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분단 극복사에서 ‘장전’이라고 불리는 남북기본합의서의 대전제는 서로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서로의 현상과 체제를 존중하게 돼 있는데 북한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떨 것인가.”
-삼대세습이 문제라는 논란도 있다.
“자기들(북한)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나서 무너진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별론이고, 설령 그런 경우에도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북에서 친중국 강경파가 등장할 것이다. (김정은이 사라진다고) 북이 우리에게 흡수된다고 보면 오해다. 우리는 과거 동서독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동서독의 경우, 동독과 국경을 접한 폴란드와 헝가리가 이미 그전에 국경 개방을 해서 그 국경을 통해 동독 사람들이 전부 서독과 왕래가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동족간의 전쟁도 안 겪었다. 동독이 무너질 때 동독의 강력한 스폰서인 소련도 같이 무너졌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지금 북한에 변고가 생겨 설령 무너지더라도 한국의 친미일변도 극우파들은 우리한테 흡수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에 친미정권이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을 보면 대북사업과 북방정책을 할 때 한국 내의 진보도 문제지만 보수 안에서도 극우파의 저항을 겪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비슷한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과 관련해 한국 정부는 북의 사과를 전제하고 있다. 이건 또 어떻게 풀어야 될까.
“북은 사과 안 할 것이다. 사과하면 전범과 살인범으로 재판받아야 할 텐데 하라고 한다고 되는가. 과거에도 칼기 폭파 사건이다, 아웅산 폭탄 테러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도 사과했나? 그럼에도 통 큰 사업을 했잖은가. 예를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를 죽이러 김신조 일당이 내려왔음에도 이후에 7·4남북공동성명을 했다.”
-대화해야 한단 말씀인가?
“해야 한다, 당연히. (천안함 사건이) 이제 4년 정도 흘렀다. 이제 미래를 얘기해야 한다.”
국가기록원에서 수첩을 전부 복사해가
(※질문 취지 및 배경: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은 기록의 꼼꼼함, 묘사의 성실함에서 남다른 데가 있다. 가령 ‘인간 전두환’에 대한 묘사의 생생함이 그렇다. 전 전 대통령의 말투와 행동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1980년 5·17 쿠데타 뒤 대통령의 임기가 논의됐다. 프랑스 등 여러 나라 사례를 참조한 참모들 사이에 6년제로 의견이 모아졌다. 막판에 전 전 대통령이 고집을 부려 7년을 고집했다. 그때 전 전 대통령은 “숫자는 러키 세븐”이라고 말했다고 회고록은 기록한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박 전 장관과 대화하던 도중 손에 잡은 담배에서 담뱃재가 바닥에 떨어지자 손에 침을 발라 재를 묻혀 올리는 소탈한 면모도 묘사했다. 6공화국 때 5공 청산론이 부상하자 연희동 자택에서 노 전 대통령을 상대로 “귀싸대기 맞는다”는 표현도 썼다. 남북협상 당시 메뉴 하나하나까지 성실히 기록했다. 협상 과정을 백서로 기록해 남겼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뒷돈을 전달한 것조차 기록했다. 그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 파견 검사로 발령받은 1980년부터 정치를 사실상 떠난 2004년까지 수십권의 수첩에 꼼꼼히 기록했다.)
-기록의 꼼꼼함이 인상적이다.
“나는 내가 했던 북방정책에 관해서 공개할 만한 부분은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어느 정도 공개했고 전체 기록은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비밀인쇄소에서 500여쪽짜리 분량의 기록을 3권(모두 약 1500페이지) 남겼다. 당시 50권을 인쇄해서 대통령, 대통령 비서실장, 총리 등이 보게 했다. 내가 예전에 7·4공동성명 자료를 봤는데 20여쪽 정도 이후락과 북쪽 인물이 나눈 대화를 사후에 문답문답으로 기록했는데 이건 무용담이고 사후에 타자 쳐서 만들어낸 것이지 리얼한 기록이 아니었다.”
-7·4남북공동성명 기록이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단 말인가?
“내가 안기부에서 남북문제를 담당하고 있을 때 7·4남북공동성명의 관계기록이나 회의록을 가져오라 해서 봤다. 봤더니 띄엄띄엄 타자 친 것이었고, 회담록이라고 해봤자 20~30쪽 타자로 친 것이었다. 별 도움이 안 되는 정도였다.”
-국정이 꼼꼼히 기록된 수십권의 수첩과 공책을 봤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은 매우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기록됐다는 느낌을 준다. 당시 그처럼 꼼꼼하게 기록한 것은 훗날 회고록 등을 염두에 둔 것인가? 아니면 당시 국정책임자 일반의 문화였나?
“당시 일반적인 기록문화는 없었다. 나는 언젠가 역사의 긴 시일 뒤 증언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막상 정치권에 들어와서 국가운영을 보니까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지도층의 문제가 많았다. (정치의) 핵심적인 가운데 있던 사람이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증언을 한 당사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과 원망을 듣겠지만 여야 수뇌부와 경제계 등 전부 ‘투명하고 바르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그때그때 다 기록을 했다. 기록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내게 정치보복을 할 때다. 나는 내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돈의 수표번호까지 갖고 있었다. 이걸 공개하느냐 마느냐 고민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떠나고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 진실을 역사 앞에 증언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즉, 나중에야 공개했다는 취지)”
-박 전 장관의 수첩을 국가기록물로 기증하거나 활용할 계획이 있나?
“이미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원본 수첩을 기증해 달라고 했지만 역시 원본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해 국가기록원에서 2~3년 전 수첩을 전부 복사한 일이 있다.”
-아무튼 늘 한국의 회고록 문화가 아쉬웠다. 그에 비해 박 전 장관의 회고록은 인상적이다.
“기록은 정말 필요하다. 정치의 핵심권력은 물론 회사도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룹의 핵심 되는 사람들은 언젠가 뒤에라도 증언을 해야 한다. 내가 회고록을 펴낸 게 9년 전인데 지금까지 누구 하나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진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요한 기록이지만 기록의 일부가 분실됐다. 중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되고 나는 내가 곧 구속되고 수첩을 샅샅이 뒤져지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것(수첩)을 모처에 피신시켰다. 국내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기록을 해외의 지인들한테 보냈다가 다시 찾는 과정에서 일부가 분실이 됐다. 분실되어서 안타까운 게 많다. 그런데 회고록을 냈던 출판사에 판권계약이 만료되어 판형(인쇄판)을 돌려줄 수 있는지 최근 문의해보니 출판사 정리 과정에서 판형이 분실됐다고 하더라.”
“안기부에서 남북문제 담당할 때
7·4 공동성명 관계기록 봤더니
회담록이라고 해봤자 20~30쪽
띄엄띄엄 타자 친 것이었다
별 도움 안 되는 무용담 수준” “기록의 개인적 사용 고민한 적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보복할 때
나는 내가 그에게 전달한 돈의
수표번호까지 갖고 있었지만
나중에 증언하는 게 도리라 생각” KGB 요원들과는 도쿄에서 접촉 박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여러 인물에 대해 평을 했다. 나온 사건과 인물 가운데 재확인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박 전 장관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한 기억을 아예 한 챕터로 기록했다. 박정희 정부 말기에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육군보안사령부를 견제했던 김 실장은 신군부 등장 이후 면직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당시 5공 실세에게 ‘충성편지’를 써서 박 전 장관에게 전달시켰다고 박 전 장관은 기록한다. 당시 외교부 관료였던 이병기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주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했다. 박 전 장관에게 “김 실장과 이 국정원장의 앞으로의 국정 운영을 전망해 달라”고 묻자 박 전 장관은 “회고록에 쓴 그대로다, 지금 현직에 있는 분을 내가 평가하고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에는 중국과 소련은 자주 등장하지만, 냉전의 또다른 축인 일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980년대 초 일본을 통치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보수정치의 상징적 거물이었다. <한겨레>가 “대북사업 할 때 일본과의 정보교환이나 일본으로부터의 반응 등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팩트가 없었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은 “사실상 일본은 경계를 많이 했다”며 “북방정책을 준비하면서 소련 케이지비(KGB) 요원들을 접촉할 때 도쿄에서 만나는 등 일본을 활용했지만 남북관계 및 북방외교 등을 상의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남북비밀접촉 당시 만남 이후에 일본 대사관에 접촉 사실만 통보해줬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지만 전두환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1994년 펴낸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1987년 6·29선언문을 준비하는 청와대 비서관회의에 아무 직책과 권한이 없는 전 전 대통령의 아들 재국씨가 참여했다는 놀라운 증언이 나온다. <한겨레>가 6·29선언 작성에 깊숙이 개입한 박 전 장관에게 재국씨가 실제로 6·29선언문 작성 회의에 참여했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은 “회의에 참석했을 수는 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며 “그러나 실제 6·29선언 준비를 했던 나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재국씨와 관계된) 어떤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답했다. 재국씨가 회의에 참석했는지 알지 못하며, 설령 참석했더라도 어떤 영향도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는 5공화국 당시 오랫동안 사실상 대외활동을 모두 접고 은둔했다. 박 전 장관은 5공화국 당시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고 답했다.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는 박 전 장관의 대북활동에 대한 언급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를 짐작하냐고 물었으나 박 전 장관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박철언은 누구인가
1942년생으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일본의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과 동갑이다. ‘6공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널리 알려졌지만 본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협상과 북방정책의 실질적 담당자로 유명하다. 5, 6공화국에서 두루 국정을 경험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 파견 검사로 발령받아 국정에 참여했다. 이후 청와대 비서관, 안기부장 특보, 국회의원,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두루 거쳤다. 1990년 3당 합당의 실질적 접촉자로 활동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반대해 결별했다. 이후 알선수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1997년 디제이피 연합에 참여했으나 다시 결별하고 정치를 떠났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1980년부터 20여년 동안 작성한 수첩과 공책은 박철언 전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의 근간이 됐다. 이 책은 정치인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기록으로 빼곡하다. 강재훈 선임기자
파견 검사로 발령받은 시기부터
정치를 사실상 떠난 2004년까지
겪은 일들을 생생한 묘사와 함께
수십권의 수첩에 꼼꼼히 담았다 “김정은 3대세습 현실로 인정해야
인정 안 하면 무슨 방법이 있나?
천안함 침몰이나 연평도 포격
북은 분명히 사과 안 할 것
그럼에도 당연히 대화해야 한다” 친미일변도 극우파들의 착각 (※질문 취지 및 배경: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2010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두고 “노태우(전 대통령)만큼이라도 해라”라고 표현했다. 노태우 정부의 전향적인 ‘북방정책’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에게 두루 인정받는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같은 해 남북이 화해와 교류협력을 하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김대중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전 장관이 당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참가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안기부장 특보 및 청와대 비서관으로 42차례 북한과 비밀협상을 벌였고, 공산권 국가와 수교 실무를 맡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남북교류 추진 과정에서 “극우론자들과 논쟁했다”고 기록했다. 인터뷰가 시작하고 20분쯤 지나자 박 전 장관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평화 공존 해법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퍼주기’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도 했다. 지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에 대해서는 “최악”이라는 단어를 썼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좋은 말”만 있고 핵심 문제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통 큰 일괄 타결안이 없다고 비판했다.)
1980년부터 20여년 동안 작성한 수첩과 공책은 박철언 전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의 근간이 됐다. 이 책은 정치인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기록으로 빼곡하다. 강재훈 선임기자
7·4 공동성명 관계기록 봤더니
회담록이라고 해봤자 20~30쪽
띄엄띄엄 타자 친 것이었다
별 도움 안 되는 무용담 수준” “기록의 개인적 사용 고민한 적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보복할 때
나는 내가 그에게 전달한 돈의
수표번호까지 갖고 있었지만
나중에 증언하는 게 도리라 생각” KGB 요원들과는 도쿄에서 접촉 박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여러 인물에 대해 평을 했다. 나온 사건과 인물 가운데 재확인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박 전 장관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한 기억을 아예 한 챕터로 기록했다. 박정희 정부 말기에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육군보안사령부를 견제했던 김 실장은 신군부 등장 이후 면직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당시 5공 실세에게 ‘충성편지’를 써서 박 전 장관에게 전달시켰다고 박 전 장관은 기록한다. 당시 외교부 관료였던 이병기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주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했다. 박 전 장관에게 “김 실장과 이 국정원장의 앞으로의 국정 운영을 전망해 달라”고 묻자 박 전 장관은 “회고록에 쓴 그대로다, 지금 현직에 있는 분을 내가 평가하고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에는 중국과 소련은 자주 등장하지만, 냉전의 또다른 축인 일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980년대 초 일본을 통치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보수정치의 상징적 거물이었다. <한겨레>가 “대북사업 할 때 일본과의 정보교환이나 일본으로부터의 반응 등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팩트가 없었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은 “사실상 일본은 경계를 많이 했다”며 “북방정책을 준비하면서 소련 케이지비(KGB) 요원들을 접촉할 때 도쿄에서 만나는 등 일본을 활용했지만 남북관계 및 북방외교 등을 상의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남북비밀접촉 당시 만남 이후에 일본 대사관에 접촉 사실만 통보해줬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지만 전두환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1994년 펴낸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1987년 6·29선언문을 준비하는 청와대 비서관회의에 아무 직책과 권한이 없는 전 전 대통령의 아들 재국씨가 참여했다는 놀라운 증언이 나온다. <한겨레>가 6·29선언 작성에 깊숙이 개입한 박 전 장관에게 재국씨가 실제로 6·29선언문 작성 회의에 참여했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은 “회의에 참석했을 수는 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며 “그러나 실제 6·29선언 준비를 했던 나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재국씨와 관계된) 어떤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답했다. 재국씨가 회의에 참석했는지 알지 못하며, 설령 참석했더라도 어떤 영향도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는 5공화국 당시 오랫동안 사실상 대외활동을 모두 접고 은둔했다. 박 전 장관은 5공화국 당시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고 답했다.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는 박 전 장관의 대북활동에 대한 언급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를 짐작하냐고 물었으나 박 전 장관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