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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영어학원은 이렇게 현대사를 관통했다

등록 2015-01-30 20:10수정 2015-01-31 15:52

영어학원은 시대마다 부침을 겪었다. 고인경 전 회장은 1968년의 중학 무시험제도 도입과 전두환 신군부의 과외금지 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영어학원에 뛰어든 1980년 이후 몇차례 학원을 옮긴 끝에 종로2가 파고다어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거쳐간 학원이 다 주변에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영어학원은 시대마다 부침을 겪었다. 고인경 전 회장은 1968년의 중학 무시험제도 도입과 전두환 신군부의 과외금지 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영어학원에 뛰어든 1980년 이후 몇차례 학원을 옮긴 끝에 종로2가 파고다어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거쳐간 학원이 다 주변에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특집
‘이혼소송’ 고인경 파고다어학원 전 회장
▶ 지난해부터 파고다어학원이 관심 대상이 됐습니다. 설립자 부부는 오랜 결혼생활 끝에 재산 분할 등을 다투는 이혼소송을 냈습니다. 지난해 1심 판결이 났습니다. 이와 별개로 민형사 재판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 28일 고인경 파고다교육그룹 전 회장이 고소한 형사사건에서 박경실 회장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한겨레>는 사인간의 재산 분쟁보다 영어산업의 역사에 주목했습니다. 고인경 전 회장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여러 언론에 ‘파고다어학원’이 보도됐다. 오랫동안 부부였고 공동 경영자였던 고인경(70) 파고다교육그룹 전 회장과 박경실(59) 회장의 이혼소송 및 고소사건 때문이었다. 파고다어학원 등 거액의 재산 분할 문제도 이혼재판의 핵심 쟁점이 됐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파고다어학원은 역사가 오래된 학원이다. 1980~90년대 영어학원 중에 매출과 수강생 규모로 1~2위를 오갔다. 일개 학원의 경영 갈등에 전국의 신문·방송이 주목한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한겨레>는 고 전 회장을 두차례에 걸쳐 인터뷰했다. 개인들의 이혼소송에 보도의 공익성이 어디 있을까 고민했다. 이혼소송 자체보다 그가 1969년 이후 45년간 겪은 한국 영어교육시장의 역사를 주로 물었다. 그의 재산은 영어교육시장에서 형성됐고 이혼소송은 그 역사의 마지막 챕터라 생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월21일과 1월12일 서울시내 호텔 커피숍에서 두차례, 총 4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고 전 회장은 176㎝쯤 되는 키에 70살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좋았고 등이 넓었다. 고 전 회장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표현은 풍부했지만 복문과 중문이 엉켜 비문이 꽤 많았다. 문답이 정돈된 형태로 이어지지 않았다. 때로 재확인 문답이 오갔다. ‘영어교육 시작-학원 설립-위기 극복과 성장-이혼소송’ 등 인터뷰 전체의 큰 흐름은 건드리지 않되 발언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손봤다. 존댓말도 반말체로 바꿨다. 혹시 발언 취지가 왜곡된 것은 없는지 고 전 회장에게 재확인받았다.

오제도 검사 아들 과외를 하다

-1960년대는 지금처럼 영어 수요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어교육에 뛰어든 계기부터 설명해달라.

“아버님이 대학 강사셨다. 원래 잘살았는데 어렸을 때 집안이 어려워졌다. 돈을 벌어야 했다. 남이 대학 다닐 때에 돈을 벌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아버지 포함해 네식구가 한방에서 살았다. 아버지 제자 가운데 한분이 ‘너 초등학교 4~5학년짜리 가르칠 수 있지?’라고 물었다. 당시 중학 입시명문으로 유명했던 덕수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덕수초등학교는 옛날에 강남의 8학군이었다. 거기 들어가면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를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어서 어떤 학부모는 위장전입하고 난리가 났었다. 당시 경기중, 경기여중, 이화여고, 경기고가 전부 광화문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었거든. 그래서 입주 가정교사가 됐다. 먹는 게 해결됐다. 그때 먹는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재벌 집에서. ㅅ그룹 조아무개 회장 댁에서 초등학교 5학년 딸을 가르쳤다. 나 말고 다른 가정교사 두명이 더 있었다. 서울대 3학년생, 4학년생이었다. 군대도 다 갔다 왔다. 나는 학벌도 없고, 가르쳐본 경험도 없었다. 그분들은 시골에서 올라와서 입주 가정교사 경험이 있어서 어떻게 요령있게 가르치는지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곧 사는 길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던지.”

-어떤 아이들을 가르쳤는지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

“얘(ㅅ그룹 딸)가 공부를 수송초등학교에서 1, 2등을 했다. 그런데 조금 뒤 당시 오제도라는 유명한 검사가,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는 검사인데, 오 검사 자녀를 포함해 5명을 그 집에서 방을 하나 내줘서 과외를 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기도 했지만 우리 집 네식구를 먹여 살리는 길이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당시 서울의 경기중에 들어가는 길은 곧 서울대를 가는 길목이라고 생각들을 했다. 일부 현직 교사가 몰래 과외를 했다. 몇몇은 명문중 입학제조기로 불렸다. 그래서 내가 자칫 잘못하면 입학제조기로 불린 현직 선생님들과 바꿔치기 당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굉장히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열심히 가르쳤다. 1965년에 경기중 2명, 경기여중 2명, 이화여중 1명 입학했다. 그랬더니 저를 처음 추천했던 덕수초등학교 선생님이 저를 주위에 선전을 했다. 나한테 배우겠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 지금 광화문에 한글학회가 있다. 한글학회 주변 밑 골목 안에 과외집이 무진장 많았다. 1966년에 학부모들이 한글학회 건물 밑 2층집 방을 얻어줬다.”

-그때부터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ㅅ그룹 계열사 사장 등 제자들과 아직도 교류한다. 아무튼 나는 내세울 학벌이 없잖나. 그래서 학벌이 대단한 녀석들을 옆에 놓고 그 사람들이 채점하고 시험 보고 숙제검사 하도록 시켰다. 당시 내가 보조선생 네명을 썼다. 그러니 반이 다섯개가 돌아가더라. 내가 1944년생이니 내가 열아홉, 스무살 시절이다.”

-중학입시 전문가가 된 거네?

“외국어하곤 전혀 관계도 없는 거였다. 그게 사는 길이었다. 소년가장이었다. 우리 집을 다시 일으키는 길이었고 단칸 셋방에서 탈출하는 길이었다.”

고 전 회장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던 아버지 고응국씨와 어머니 김효순씨 사이에서 1944년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지만 전쟁 때 월남했다. 고 전 회장 집안은 교육 수준이 높았다. 고 전 회장은 할아버지 고광하(高光夏)씨가 식민지 시절 판사로 일하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국가기록원을 검색해보니 1921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본적이 황해도 해주군 추화면 약원리인 ‘고광하(高光夏)’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6월의 판결을 받은 기록이 검색된다. 할머니 김화내(김에스더)씨는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과 함께 초창기 이화학당을 다녔다고 고 전 회장은 설명했다. 졸업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화 100년사>의 졸업생 명단에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 전 회장은 어려서부터 할머니로부터 이화학당 시절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영어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고 전 회장은 종로구에서 태어났고 종로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미장원을 여럿 운영했다고 한다. 집이 300평(990㎡) 넘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업 보증을 잘못 섰다고 설명했다.

35년 함께 산 부인 박경실 회장과
재산분할 이혼소송 등 벌이는
고인경 파고다어학원 전 회장이
45년간 겪은 한국 영어교육시장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먹고살려고 초등학생 과외 하다
1969년 중학 무시험으로 바뀌며
영어과외 시작한 게 사실상 원년
미8군내 미국대학 분교에서
인맥 쌓으며 성공의 다리 놓다

‘잘 못 알아듣고’ 청강한 미8군 메릴랜드대

-영어교육에는 어떻게 뛰어든 건가?

“입시정책이 바뀌어버렸다. 1969년도에 (중학입학) 무시험 체계로 바뀌어버렸다. ‘뺑뺑이’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망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어머님들이, 자식이 어느 중학교를 가든 공부 잘하길 바랐다. 당시 중학교에서 새로 배운 과목이 영어였다. 내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하더라. 내가 ‘A, B, C, 굿모닝 굿애프터눈’까지는 할 수 있지만 영어를 가르칠 능력이 되나. 그렇지만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일단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단어였다. 발음기호를 가르쳐서 사전만 보고 발음을 비슷하게 하게끔 했다. 머리 좋은 애들이 단어를 외우니 엄청나게 외우더라. 엄마들이 깜짝 놀라기 시작했다. 엄마들한테서 월사금을 받아 가지고 내가 고용한 선생님들 강사료 주고 집세 주는 그런 형태였다. 그러다 1969년 중학 무시험으로 바뀌며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파고다외국어학원의 원년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안 가르치던 영어를 가르쳐야 하니 고생했겠다.

“외삼촌이 당시 재무부 총무과장이었다. 지금이야 기업도 있고 경제부처가 많지만 당시 재무부 과장은 엄청난 자리였다. 외삼촌은 자기 친구 아들들이 다 서울대 들어갔는데 자기 아들만 못 들어갔다고 마음에 응어리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미국 유학이 거의 없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도 고위층 자녀들은 ‘유학 아닌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게 용산 미8군 안에 있는 메릴랜드대학이었다. 복무 중인 미군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학점은행처럼 운영됐다. 우리나라 고위층 자녀들이 거기 다니고 있더라. 외삼촌이 아들이 메릴랜드 야간대학을 다녀야 하는데 걱정된 모양이었다. 공부 안 하고 당구만 칠까봐. ‘형인 네가 보디가드 해줘라’고 했다. 나쁠 것 없었다. 더구나 과외는 토·일요일은 일찍 끝났다. 동생을 데리고 같이 다녔다. 동생과 같이 청강을 하는데 이놈도 못 알아듣고 나도 못 알아듣는 거였다.”

-용산 미군기지 안으로 다닌 건가?

“그렇다.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는데 도대체 불가능하니까 교과서를 베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수가 우리를 칭찬했다. 그 칭찬해주는 소리조차도 못 알아들었다. 감각으로만 ‘아 우리 얘기 하는가 보다’라고 알았지. 행운이 따랐다. 같이 다니는 학생 중에 헬리콥터 조종사인 준위가 있었다. 짐 맥더모트라고. ‘내가 신문로에서 과외 하는데 시간 날 때마다 와라’라고 했다. 심심했는지 진짜로 오더라. ‘야, 이거 학생들한테 읽어줘라’ 했다. 당시 어느 과외에서 네이티브 스피커가 오겠나. 게다가 준위 계급장을 달고. 내가 맥더모트와 대화하니, 간단한 회화인데도 내가 무척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명문 중학교 선생님 모셔온 거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니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갈 때 택시 타고 가라’고 돈 줬다. 이 친구는 분명 자기는 놀러 왔는데 급료를 주니 좋아했다. 그런데, 덜컥 과외가 갑자기 없어지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0월 대선 전에 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사실상 미군이 책임진 국방과 미국의 원조물자를 포함하면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기댄 점을 지적했다. 그런 상태를 타개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에도 그런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의 존재는 오랫동안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메릴랜드대학 누리집(홈페이지)을 종합하면, 메릴랜드대학은 1956년 일본, 오키나와, 괌, 한국 등 미군 주둔지에 분교를 설치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67년 대선 때 재선됐다. <동아일보> 1969년 보도를 보면 박정희 정부는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1968년 7월 중학입시를 폐지하고 무시험 제도로 바꿨다. <경향신문>은 1969년 5월5일 ‘중학입시 없어진 후 얼마나 자랐나’ 기사에서 입시 폐지 뒤 아이들 성장률이 높아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 전 회장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그러나 영어는 낯설고 어려운 과목이었다. 영어 동영상도, 테이프도, 변변한 교재도, 원어민 강사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영어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지금 종로2가 옛 파고다어학원 건물 앞 동판에는 ‘PAGODA FOREIGN LANGUAGE INSTITUTE since 1969’라고 쓰여 있다. 약 10년간 고 전 회장은 영어 과외로 꽤 성공했다. 그사이 군대도 다녀왔다. 1971년 백마부대 정훈병으로 베트남에 다녀왔다. <머나먼 쏭바강>의 작가 박영한과 같이 근무했다. 1973년 영어잡지 경영자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나 1978년께 이혼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다. 고 전 회장은 첫부인 집안에서 학벌과 불안정한 벌이를 이유로 자신의 자존심을 많이 훼손했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께 박경실 대표와 결혼했다. 딸을 낳았다.

헬기 조종사 맥더모트 준위의 추억

-영어학원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과외로 돈을 잘 벌었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덜컥 들어섰다. 과외를 문제 삼았다. 1980년 여름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과외금지조치란 걸 내세웠다. 합법적으로 가르쳐야 했다. 당시 종로에 합법적인 관인학원인 ‘신국제어학원’이 있었다. 말이 관인학원이지 성인 대상 외국어학원은 당시 파리 날리고 있었다. 수요가 없으니까.

내가 선생과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강의실 대여섯개를 빌려 썼다. 그전 학원 운영을 할 때보다 수입이 엄청나게 커졌다. 나보고 부원장을 하라더라. 주부숙녀 에이비시 영어기초회화 교실을 만들었다. 당시 내가 아직 어린 나이였다. 돈은 벌었는데 영어는 좀 알고 싶고 그래서 모이신 50~60대 아주머니들을 가르쳤다. 그때 맥더모트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맥더모트가 추천한 후임 헬리콥터 조종사가 강사로 왔다. 그 친구도 저도 젊은 선생이었잖나. 그림이 괜찮았다. 어떤 학원도 네이티브 스피커가 없던 시절이었어다. 매출이 막 올라갔다.”

-그게 어딘가?

“지금 종로2가 버거킹 건물이다. 그런데 바로 건너편에 ‘종로외국어학원’이 있었다. 파고다 아케이드 옆에 별표전축 7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헐리고 없다. 그 건물에 종로외국어학원이 있었는데 저에게 부원장이 아니라 원장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스카우트를 한 거네?

“그렇다. 초혼에 실패하고 애 둘 데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겨우 일궜는데 과외금지법이 생긴 거다. 당시 재학생까지도 학원에서 수강등록이 불가능하게 해놨다. 그런데 학생들이 외국어학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건 합법이었다. 나는 그냥 살기 위해 한길을 가다 보니 그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스카우트 제의가 왔으니까 갔다. 학생을 다 놓고 왔다. 그래서 종로외국어학원 원장까지 됐는데, 말이 원장이지 아침에 6시 반에 나와서 강의실 석유난로에 기름을 다 직접 집어넣었다. 그때도 부동산업자들의 횡포가 심했다. 세무서 과장 출신이라는 사람이 빌딩을 샀다. 말도 없이 집세를 전부 두배로 올렸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겨울에 발발 떨면서 선물을 사들고 사무실 찾아가도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사무실 꼭대기 층에서 만나면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한마디만 했다. 동업하는 사람이 올린 집세를 같이 내면 되는데 안 냈다. 나보고 내라는 거다. 결국 1982년에 헤어졌다.”

-그래서 파고다어학원을 만든 건가?

“그렇다. 당시 경영이 어려웠던 ‘한미외국어학원’이 서울시청 옆에 있었다. 강사들 월급을 못 주고 문 닫기 일보직전이었다. 내가 인수해 1982년 11월에 관인학원으로 파고다로 명의를 바꾸고 1983년부터 수강생을 받았다. 파고다라는 이름으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파고다공원 앞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도 있다. 파고다공원이 독립운동의 발상지였으니까. 드디어 설립자가 된 거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나.”

영어는 그냥 교과목이 아니다. 한국 사회생활의 주요한 고비에 다 영어가 있다. 영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다. 영어의 역사는 세계사다. 미국과 영국의 경제와 정치가 세계를 석권한 역사와 흐름이 같다. 한편 영어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사다. 선교사가 가르친 언어였다. 1945년 이후엔 남한을 직접 통치했거나(미군정), 거대한 영향을 미친 나라(미국)의 언어였다. 학벌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가장 신경써야 했던 과목이었다. 지금과 규모나 성격이 다르지만 1960~1970년대부터 영어교육시장이 형성됐다.

60~70년대 영어교육시장의 양대 산맥이 있었다. ‘와이비엠시사영어사’와 ‘시사영어학원’이다. ‘와이비엠시사영어사’를 만든 민영빈씨도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민영빈씨의 자서전 <영어강국 코리아를 키운 3·8따라지>를 보면, 민씨는 분단 뒤 월남했다. 돈이 없어 고학을 했다. 민씨의 형은 1945년 “이제 무슨 직업을 가지든 영어 하나만은 잘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편지를 썼다. 고려대에 입학해 영자신문을 만들었고 졸업 뒤 <코리아 헤럴드> 기자가 됐다. 이런 바탕이 도움이 됐다.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위해 만든 영어교재 <잉글리시 900>을 들여와 팔았다. 크게 성공했다. 1982년 미국에서 토익을 단독으로 도입했다. 1983년 미국인 강사 7명을 데리고 학원을 만들었다. 시사영어학원은 <타임> 등을 활용한 고난도 독해 수업으로 유명했다. 문창순 원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한겨레> 1988년 8월10일치에, 전 전 대통령이 문 원장 등과 골프 회동을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 치열한 경쟁에 파고다어학원이 뛰어든 것이다.

전두환 정권 과외금지 조치에도
학생 외국어학원 수강은 합법
종로외국어학원에 스카우트됐다가
1983년 파고다어학원을 세우고
1990년대 영어학원계 정상 올라

고 전 회장, 부인 박회장과 두 딸 등
네 명이 얽힌 복잡한 지분구조
97년 고 전 회장 구속 뒤 갈등 시작
고 전 회장 보직변경 당한 뒤 퇴임
둘이 나눠가질 재산총액 1137억

회화 중심으로 양대 산맥 이겼다

-와이비엠시사영어사와 시사영어학원 등 강자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나?

“이화학당을 다녔던 할머니가 늘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50~60년 뒤진 거 같다’고. 친할머니 김화내(김에스더)가 늘 나보고 ‘영어 이렇게 배우면 벙어리 영어밖에 안 된다’고 하셨다. 당시 이화학당은 서당식이었는데 우선 교사가 원어민이었다. 선교사라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있었고 반 규모가 작았다. 할머니는 ‘너희는 60명을 가르치는데 그런 콩나물교실에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또 말하는 방법에 대해 ‘쓸데없는 문법을 많이 가르치는데 말하고 듣고 쓰고 읽기를 동시에 안 하면 그건 꿀 먹은 영어다’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당시 대부분 학생들은 메들리의 <삼위일체 영어의 연구>나 <성문종합영어> <영어왕도> <1200제 영어> 같은 걸 봤다.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봤다.”

-<성문종합영어>는 저도 봤다.

“할머니가 ‘영어를 하이 굿모닝 굿애프터눈부터 가르쳐야지, 디스 이즈 북 대츠 더 테이블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왓 이즈 유어 네임, 이런 말은 실제 미국에서는 경찰서에나 가야 들어본다, 더 정중한 말로 메이 아이 해브 유어 네임 이런 식으로 가르쳐야 되는데 교과서가 다 잘못됐다’고 하시는 거다. 잘못됐을 수밖에 없는 게 일본 영어교과서를 베꼈으니까.”

-회화 중심으로 갔단 말인가?

“그렇다. 유명한 회화 교재로 <사이드 바이 사이드>(Side by Side)가 있었다. 1982년쯤 미국으로 교재 저자 빌 블리스를 찾아갔다.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려고. 당시 한달 수강료가 1만2000원이던 시절이었는데 법대로 로열티를 내면 도저히 학원을 운영할 수 없었다. 내가 블리스에게 ‘이걸 수입해서 팔면 등록금이 9000여원밖에 안 되는데 책값은 9800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으냐.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한 나라니 일단 교육용으로만 복사해서 쓰고 언젠가 잘살게 되면 저작권료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하더라. 우리 학원만 <사이드 바이 사이드>를 가르치니까 학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두번째는 기자시험 준비 수업이었다.”

-기자시험 영어?

“당시에도 기자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때 기자시험은 영어 장문해석이 나왔다. 1982년 한 영자신문의 광복절 사설을 보고 무릎을 쳤다. 너무 잘 써서. 한아무개 논설위원을 무작정 찾아가 만났다. 무진장 술을 많이 마시는 분이었다. 그분을 강사로 모시고 ‘기자시험준비영어’ 수업을 만들었다.”

결국 파고다어학원은 1983년 이후 1990년대까지 영어학원계의 정상에 올랐다. 두 강자 사이에서 살아남고 성공한 것이다. 당시 파고다어학원의 ‘강점’으로 ‘회화 중심 수업’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종로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대어학원’을 운영했던 정봉주 전 의원도 이 점을 인정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 2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고 전 회장과의 악연을 전했다. “1990년대 중반 고 전 회장이 외대어학원을 상대로 교육청에 여러차례 진정을 내 고생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은 “그전까지 페이퍼 중심이던 영어교육시장에 회화 중심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고 인정했다.

정 전 의원은 ‘세개의 축’으로 1960~2000년대의 한국 영어교육시장을 설명했다. 첫번째 축은 영어교재 등 출판에 주력한 학원이다. 정 전 의원은 와이비엠시사영어사가 출판을 주력으로 성장했다고 평했다. 일본 영어교재를 번역하는 등 출판업으로 성공했다고 평했다. 다른 축이 강의에 주력한 학원이다. 파고다어학원이 회화를 장점으로 내세웠다고 평했다. 두 축이 대학생·성인을 상대로 한 시장이라면 세번째 축은 어린이 영어교육 시장이다. 어린이 영어교육 시장은 철저히 학습지 위주였으며 ‘윤 선생 영어교실’이 절대강자가 됐다고 정 전 의원은 평했다.

파고다어학원에서 오래 근무했던 곽영일 단국대 겸임교수도 ‘회화 중심’을 성공 비결로 꼽았다. 그는 2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고 전 회장이 처음으로 원어민반을 만드는 등 회화 중심 영어를 가르쳤다”고 말했다. 고 전 회장이 영어강사 처우를 개선하고 수준을 향상시킨 점도 성공 비결로 꼽았다. 실제로 국회도서관에서 확인한 <삼위일체 영어의 연구>는 라틴어 접두사를 이용한 단어·숙어 암기법으로 회화와 거리가 멀었다.

고 전 회장의 세번째 위기는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 때 닥쳤다. 영어학원 시장이 개방됐다. 유수의 외국계 어학원이 한국에 진출했다. 고 전 회장이 정 전 의원을 만난 것도 이즈음이다. 고 전 회장은 “정 전 의원이 파고다어학원 옆에 ‘외대어학원’을 만들었다. 내가 찾아가서 ‘당신이 외대에 로열티를 줌으로써 선례를 남긴 거다. 앞으로 미국의 랭귀지 스쿨이 로열티 받는 조건으로 들어올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정 전 의원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 전 회장은 외국계 어학원의 공세에 “수강료를 낮춰 버텼다”고 말했다.

시장을 석권할 것으로 보였던 외국계 어학원은 대부분 실패했다. 정 전 의원은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비합리적인 프리미엄 고가정책으로 스스로 망했다”고 분석했다. 정 전 의원의 설명을 종합하면, 외국계 어학원은 한국의 사교육시장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시장인지 모른 채 무턱대고 프리미엄 정책을 고수해 실패했다. 외국계 어학원이 진출한 직후인 1997년 아이엠에프 외환위기가 닥친 점도 이유로 꼽았다.

1990년대는 고 전 회장의 황금기였다. 파고다어학원은 성공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1997년에 파고다어학원은 “서울 종로 본원 외에 신촌 등 5곳에 분원을 두고 있으며 수강생이 매월 1만2000~2만명에 이르는 대형 외국어 학원”이 됐다. 산악인 엄홍길씨를 지원했다. 1993년에는 아예 엄씨와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1994년에는 남극탐험도 다녀왔다. 형사처벌 받는 일도 있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1997년 11월 20억여원의 종합소득세 등을 포탈한 혐의로 고 전 회장을 구속하고 전 경리부장 장아무개(56)씨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1992년부터 3년 동안 이중장부를 만들어 수강료 수입액의 40% 정도를 누락시키는 수법으로 세무서에 매출액 44억여원을 줄여 신고함으로써 종합소득세와 법인세 20억7000만여원을 포탈한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2012년 이후 부인 박경실씨와 벌이는 법적 분쟁에 비하면 작은 일이었다.

갈등이 법적으로 불거진 것은 2012년부터다. 부인 박경실 회장은 파고다어학원에서 재무 관리를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고다어학원은 1993년 11월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고 전 회장, 박 회장, 전처와 사이에 낳은 딸, 박 회장과 낳은 딸 등 4명이 각각 ‘45:45:5:5’의 비율로 지분을 나눠 가진 가족기업이었다. 박 회장은 1994년부터 법률상 공동대표가 됐다. 2000년대 들어 갈등이 커졌고, 부부 사이에 법률 쟁송이 되었고 이제 언론 보도의 대상이 됐다.

박 회장 쪽에선 인터뷰 거부

부부 사이는 좋지 않다. 부부 사이에 벌어진 여러 행동과 말에 대해 각각 여러 건의 민형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두 사람은 책임을 두고 다툰다. 다툼 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판결 내용 등을 종합하면, 부부는 1979년 결혼해 오래 같이 살았다. 재무 쪽을 돕던 박 회장은 1994년 공동대표가 됐다. 고 전 회장이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1996년 자살했다. 고 전 회장은 1997년 조세포탈 구속 직후 대표이사에서 사임했다. 그새 지분 구성이 변했다. 고 전 회장이 박 회장과 사이에 낳은 딸의 지분과 박 회장 지분이 늘었다. 고 전 회장은 2009년 자신에게 지급되던 유급휴가 수당이 법률상 퇴직금임을 알게 됐다. 2010년 고 전 회장은 다시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고 전 회장은 2012년 박 회장을 ‘적법한 절차 없이’ 파고다 주식을 이전했다며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부부는 재산분할 등에 대한 합의 내용을 담은 인증서를 작성했고 고 전 회장은 고소를 취하했다. 법원이 인증서 내용대로 결정을 내리려 하자 박 회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고 전 회장이 재차 박 회장을 고소하자 박 회장은 2013년 주주총회를 열어 고 전 회장을 비상무이사(비등기이사의 일종)로 바꿔버렸다. 이후 지금까지 언론이 보도한 소송 단신은 어학원의 역사와 부부 갈등의 단면들이다.

서울 종로2가 56번지 앞 옛 파고다어학원 건물에 ‘PAGODA FOREIGN LANGUAGE INSTITUTE since 1969’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회화 중심 수업으로 1990년대에 크게 성장했다. 현 사옥은 청계2가 사거리 근처에 위치해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종로2가 56번지 앞 옛 파고다어학원 건물에 ‘PAGODA FOREIGN LANGUAGE INSTITUTE since 1969’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회화 중심 수업으로 1990년대에 크게 성장했다. 현 사옥은 청계2가 사거리 근처에 위치해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모두 7건의 민사·형사재판이 아직 1·2·3심에서 진행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4단독 위광하 판사는 28일 은행 대출 관련 문서에 고 전 회장 등의 이름을 허락 없이 적어넣은 혐의(사문서 위조 등) 등으로 기소된 박경실 대표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박 회장은 ‘고 전 회장이 (명의를 쓰는 것을) 승낙해 예금을 담보로 제공했다고 주장하지만 고 전 회장이 자신과 무관한 대출에 담보를 제공하기 위해 다투고 있던 박 회장에게 권한을 위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서울고법은 회삿돈 10억원을 부당하게 성과급으로 받아간 혐의(특가법 횡령 등)로 기소된 박 회장의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산분할을 포함한 이혼소송도 서울고법에서 진행 중이다. 1심을 맡은 서울가정법원은 고 전 회장이 박 회장을 상대로 낸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파고다 주식 11만2000주와 534억9800여만원의 재산을 고 전 회장과 박 회장에게 각각 4:6의 비율로 분할한다”고 지난해 8월 판결했다. 가액으로 따지면, 두 사람이 나눠 가질 재산 총액은 1137억5200여만원이다. 당시 가정법원 재판부는 “박 회장이 2000년대 이후 파고다아카데미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면서부터 두드러진 양적 성장을 했다”며 박 회장의 경영 기여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러나 고 전 회장은 “2000년대 이후에도 2013년까지 지속적으로 회사의 위기관리와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해왔다”고 반박했다.

고 전 회장은 전처가 낳은 딸을 박 회장이 부당하게 차별대우한 것이 이혼 사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박 회장의 현재 행동의 동기가 ‘재물욕’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홍보실을 통해 박 회장에게 전자우편과 전화로 어학원의 역사와 운영, 이혼소송 등에 관해 질문했다. 박 회장은 지난 21일 홍보실을 통해 “소송 중인 사안들에 대해 언론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답하지 않았다. 어떤 영어산업 성장사의 마지막 장은 소송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그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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