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역 뒤편 인적 드문 공원에 노숙인들의 텐트와 박스집이 있다. 박스와 비닐, 합판 등으로 만들어진 이들의 박스집은 구조와 설계가 다르다. 땅에 놓인 박스집도 있고, 벤치 위에 올려진 박스집도 있다. 이들이 거리에 나온 삶의 이유가 다르듯 박스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저마다 다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박유리의 서울, 공간 ③ 용산역 노숙인촌(상)
박유리의 서울, 공간 ③ 용산역 노숙인촌(상)
▶ 서울에 스며든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서울의 얼굴이 되지 못한 뒤안길을 따라갑니다. 도시의 밤을 걸어봅니다. 이 도시에 깃든 고독과 꿈, 그리움과 우울, 따스함과 설움, 사랑과 고립을 그리려 합니다. 낯선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세번째로 서울 용산역 뒤쪽 공원에 텐트나 박스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공간을 찾았습니다. 노숙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삶도 같은 나무뿌리에서 자라난 수많은 잎새들처럼 달랐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저마다의 다름. 가장 인간적인 말이 아닐는지요.
고요한 절망의 끝에서 기차는 달리네
밤 열한시 십분에 마지막 기차가 서울에서 다른 도시를 향해 떠나면 새벽 세시 십오분에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마지막 기차가 피로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역으로 들어온다. 긴 밤을 뚫고 붉은 해가 뜨면 기차보다 날렵한 지하철이 새벽 다섯시 십사분에 따따따따 가벼운 음악을 울리며 새벽녘 첫출발을 한다. 모든 것이 매일 정확한 시간에 일어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차가 들어오고 떠나며, 기차표를 산 여행자는 시간을 기다리다 정확하게 기차에 올라탄다. 기차 역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전광판이나 시계를 주시하며 언제 떠날지를 기다린다. 사실 떠나기 위해 역에 들어오는 것이다. 역은 그런 곳이다. 떠나고 들어오고,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며, 가졌다가 잃어버리기를 반복하는 인생 같은 것이 아닐까. 제어되지 않을 만큼 질주하다 어느덧 멈춰설 수밖에 없는 곳. 쉬었다 다시 달리게 되는 곳. 그러다 노후한 기차가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영원히 멈추게 되는 곳. 폐기차가 치워진 철로에 반짝이는 새 기차가 들어와 서툴지만 신나는 첫 여행을 시작하는 곳.
시간을 달리는 기차 철로 옆에 웅크려 누워 매일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남자가 있다. 서울 용산역 뒤편, 고가도로 밑에 인적이 거의 없는 작은 공원이 있다. 우거진 소나무숲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는데 공원 옆으로 철로가 나 있어서 하루 종일 철로와 육중한 기차가 부딪치고 마찰하는 쇳소리가 들린다. 노숙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텐트나 종이박스로 만든 집 20여채를 짓고 이곳에 산다. 서울 강남에 살면 강남 사람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아파트에 산다고 아파트인, 한옥에 산다고 한옥인, 옥탑방에 산다고 옥상인으로 불리진 않는다. 거리에 살면 주거 형태는 사람을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주요한 잣대가 된다. 노숙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이 남자도 5년 전부터 텐트를 치고 산다. 소설가 이외수처럼 기다란 꽁지머리를 가지런하게 묶은 남자는 쉰일곱살이다. 꽁지머리 남자는 매일 텐트를 찾아오는 밤이 싫다. 밤마다 텐트가 흔들릴 만큼 기차 소리가 정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것도, 어두운 것도, 혼자인 것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도, 가족들이 보고 싶은 것도. 꽁지머리 남자는 라디오를 켜고 이어폰을 꽂아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곁에서 말해주는 것 같다. 디제이가 사연을 읽어주면 어떨 땐 내 이야기 같고, 음악을 들려주면 이 밤에 혼자인 것도 조금 괜찮아졌다. 꽁지머리 남자는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이어폰을 탯줄처럼 두르고 매일 밤 잠이 들었다.
“돈 한푼 없이 와, 그게 진짜야”
“그런데 말입니다. 귀신 아닙니까?”
지난 7일 밤 9시께 술에 취한 ‘체 게바라’ 아저씨(45)는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바짝 다가와 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쿠바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의 용산역 뒤편 공원에 사는 어느 노숙인의 검정 티셔츠에 기념돼 있었다. 늘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임씨 아저씨는 조명도 없고 어두컴컴한 공원에 검정 옷을 입고 나타난 내가 귀신 같다고 했다.
공원 나무벤치에는 이미 다 마셔버린 소주 몇 병이 누워 있었다. 술을 마신 사람들이 벤치 주위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성공회재단이 노숙인 재활을 돕기 위해 만든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활동가 등과 함께 찾아갔지만 내일부터 혼자 이 공간에 있을 생각을 하니 긴장되었다. 이곳에 텐트를 쳐도 되냐고 하니 술에 취해 그랬는지, 잘못 들었는지 사람들이 거절은 하지 않았다.
“내일은 돈 하나도 없이 오라고. 돈 한푼 없이. 그게 진짜지.”
“옷차림이 이게 뭐야? 너무 다르잖아.”
어떤 아저씨는 여기서 지내며 일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고, 또다른 아저씨는 한국의 정치 지형에 관해 한참 동안 끊이지 않고 설명을 해댔다. 그때 홀로 취하지 않은 꽁지머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도와주겠다고 했다.
“날 취재한다 해도… 그런데 여기 살아가는 사람들도 방식이 저마다 달라서….”
“저희 회사 사람들도 각자 다 다르게 살아가는데요. 사람은 다 다르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지어요?”
“박스집도 있고 텐트집도 있는데 텐트가 낫지. 3만9000원 주면 마트에서 살 수 있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돼요?”
“땅에 나무를 깔고 공간을 띄운 다음 그 위에 텐트를 치지. 그럼 비가 안 새. 그런데 며칠 잠깐 있을 거면 그냥 땅에 바로 치면 돼.”
꽁지머리 아저씨와는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공원을 나섰다. 용산역으로 돌아가려 고가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고가도로 귀퉁이, 노란 가로등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는 아저씨가 있었다. 마흔아홉살 임씨 아저씨다. 앞니 빠진 아저씨는 검정 점퍼에 검정 모자를 쓰고 길게 드러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책을 넘겼다. 경사가 진 고가도로에 누운 아저씨의 몸도 비스듬하다. 목적지로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아무리 굉음을 내며 지나가도 아저씨는 가로등 아래서 책만 보았다. 아저씨는 공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밤에는 판타지 소설을 보고 낮에는 폐지나 고물을 줍는다. 고물을 주워 번 돈으로 헌책방에서 1000원짜리 판타지 소설을 사거나 이미 읽은 책과 바꾼다. 판타지 소설 속의 이계(異界), 아저씨가 사는 이 세상과 다른 세계는 그의 유일한 낙이다. 판타지 소설 아저씨에게는 늘 ‘저녁이 있는 삶’이 찾아오는데, 어느 야당 정치인이 말한 휴식이 있는 삶이나 질 높은 삶이 아니다. 책 읽기는 그가 무수한 저녁과 밤을 견디는 방법이다. 판타지 소설은 아저씨의 하루를, 하루와 하루가 연결되어 이어지는 삶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둑 같은 것이다.
하루종일 기차와 전철 오고가는
용산역 뒤편 인적 없는 작은 공원
텐트와 종이박스로 만든 집 20채
57살 꽁지머리 남자는 밤이 싫다
이어폰을 탯줄처럼 두르고 잔다 술에 취한 ‘체 게바라’ 임씨는
검은 옷 입은 내가 귀신 같단다
앞니 빠진 임씨는 소설만 읽는다
어떻게 완벽히 혼자가 되었을까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용산역과 할머니의 기억, 그리고 30만원 다음날인 8일 용산역 마트에서 원래 가격보다 20% 할인된 3만1200원으로 텐트를 샀다. 용산역 공원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고물을 주워 생계를 잇는데 3만1200원은 폐깡통 39㎏을 팔면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지갑을 놓고 집을 나설까 잠시 고민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지갑 없는 삶은, 저녁이 없는 삶보다 막막하고 절박하다. 밥은 어떻게 먹고, 차는 어떻게 타며 그런 구체적인 상황도 문제지만, 100원짜리 하나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 공포다. 돈은 그 자체로 세상을 살아가는 따스한 도움의 손길이다. 배가 고프고 잠이 오고 아플 때도 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 돈이 없으면 허기를 채울 수 없고,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없고, 아프면 앞으로도 쭉 아파야 한다. 전날 입은 1만5000원짜리 검은색 바지보다 허름해 보이는 바지에 칙칙한 남방을 입고 집을 나섰지만 지갑만은 놓을 수 없었다. 꽁지머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아저씨 텐트 옆에 내 텐트를 쳤다. 꽁지머리 아저씨와 내 텐트 사이엔 기다란 의자가 있다. 아저씨가 소나무 아래에 나무합판으로 만든 의자다. 소나무에 얹어진 우산이나 박스는 여름날 뜨거운 햇빛을 가려준다. 아저씨도 처음부터 돈 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네살 때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어머니는 재혼한 뒤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 손에 자란 꽁지머리 아저씨는 중학교까지 학교를 다녔다. 인천에 살았고, 연안부두에 정박한 배에서 잠을 자며 배를 지켜주는 대가로 돈을 벌었다. 다방 디제이도, 중국집 배달도 했다. 아는 사람 소개로 서른네살에 당시 대우중공업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건물 보안을 담당하는 일종의 경비였다. 월급은 130만~15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스물다섯살에 만난 여자와 동거를 해 두 딸을 낳았다. 첫아이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처갓집의 도움으로 스무평 남짓한 다세대주택을 샀다. 겨울이면 처형이 있는 강원도 속초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도박장을 차리는 ‘하우스 도박’에 우연히 돈을 걸게 되었고, 빠져들었고, 사채를 쓰게 되었고, 이자는 이자를 낳아 4억원까지 치솟았다. 빚쟁이들이 협박을 하러 집으로 찾아왔다. 고등학생인 딸들이 상처를 받았다. 아저씨는 집을 나와 여관방을 얻어 그곳에서 3년간 직장을 다녔다. 아내와는 별거를 했다. 아이들은 아주 가끔씩 만났다. 홍수로 범람하고 포효하는 강물처럼 빚은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협박 등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아내와 이혼을 했다. 2010년 5월. 3년간 살던 인천의 여관방에서 짐을 정리해 가방을 꾸렸다. 여관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갔는데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몸이 편찮으셨던 아저씨의 할머니는 손자 손을 잡고 인천에서 용산까지 와서 약방에서 약을 지었다. 그 기억 하나를 붙잡고 용산역으로 왔다. 딸이 생일날 사주었던 반팔 티셔츠에 얇은 점퍼를 걸치고. 주머니에 든 돈은 삼십만원. 며칠간 술을 마시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잠을 잤다. 우연히 이 공원을 알게 되었고 주머니에서 꺼낸 몇 만원으로 보쌈과 소주를 사서 이곳 노숙인에게 대접했다. 노숙인들이 아저씨에게 여기에 살라고 했다. 용산역에 온 지 두달이 지났을 때 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세상에 없는 번호였다. 완벽하게 버려져 혼자가 되었다. 홀로 내던져졌다. “이 생활 하다보면 미친 사람들을 자주 봐요. 처음부터 미친 건 아니었어요. 3년 전엔 분명 멀쩡했는데 다시 만나보니 혼자 실실 웃고 땅바닥에 말을 하더라고. 자신을 놓게 되는 거지. 다른 노숙인과 어울리지 않고 하루 종일 혼자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많고.” 주거가 일정하지 않아 주민등록은 말소되었고 신용불량자였으며 빚쟁이는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교회를 다니며 500원, 1000원을 받는 ‘짤짤이 코스’를 다녔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신문을 수거해 폐품을 팔았다. 멀쩡해 보이지만 직장을 다닐 때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는 등 장애인 5급 판정을 받은 몸이었다. 길거리에서 밥을 나눠주는 배급소에 줄을 섰다. 노숙인 식당이 있는 곳도 있지만 거리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배급소도 있다. 꽁지머리 아저씨는 옆이나 맞은편에 앉아 식사하는 노숙인 냄새에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같은 노숙인이라고 해서 냄새를 맡는 후각조차 얼어붙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는 급식소에서 밥을 먹지 않고 텐트에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을 갖다놓고 직접 밥을 한다. 라면을 먹기도, 찌개를 끓이기도 한다. “삶의 의미가 없네.” 용산역 공원의 밤은 술로 들썩이다 오전이 되면 휑해진다. 기차 소리 때문에 대부분 아침 7시면 일어나 각자 살아가는 방식으로 흩어진다. 공짜로 밥을 먹고 동전을 받는 코스가 다르고, 고물을 줍는 사람들은 시간대와 동선이 어긋난다. 꽁지머리 아저씨의 텐트는 공원 끄트머리에 있다. 공원 중간엔 어제 술판이 벌어진 벤치가 있다. 이곳 사람들이 장기를 두고 신문을 보거나 술을 마시는 탁자다. 어제 술을 마시고 한참 동안 경상도와 전라도의 표심과 정치에 대해 말하던 반바지 입은 아저씨가 오후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 술을 안 마시니 말이 없다. “삶의 의미가 없어.” 고향이 충남 천안인 반바지 아저씨는 가정불화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말 외에는 대다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아저씨와 나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새는 소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데 공원 옆 철로에 들어온 기차가 정차하며 육중한 쇳소리를 냈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지만, 아저씨는 필리핀 출신의 아내와 결혼을 했었다.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필리핀에 가버렸다고 한다. 어떤 노숙인이 1998년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자 아저씨가 “그때 내가 결혼을 했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 그가 이때쯤 결혼한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이 잠시 앉아 있다 떠나는 용산역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이 철로 옆에서 계속된다. 기차표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놓치면 다음 기차에 올라타고 떠난다. 자꾸만 반복해서 놓치다 보면 다시는 기차에 타지 않게 된다. 철로에 홀로 남겨진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든 빈곤을 낳는 사회구조의 문제든 기차에 몸을 실을 생각을 버리게 된다. 배고픔이나 추위가 닥쳐도 피하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위에서 느껴지는 허기짐과 살이 에는 추위를 느끼는 감각은 여전한데 그조차 늘 겪다보면 고통이 어쩐지 익숙해진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시간에 올라타지 않고 시간 밑에 드러눕는다. 거친 비나 바람이 와도 뛰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비바람이 마구 찢고 헝클고 할퀴어도 드러누워 고요히 맞이하게 된다. 절망은 악마 같아서 한번 잡으면 놓아주지 않는다. 추락하는 절망의 끝, 의미가 부서진 삶의 끝은 의외로 고요하다. <다음주에 계속>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꽁지머리 아저씨의 텐트집(오른쪽)과 기자의 텐트집 사이에 놓인 나무벤치에 아저씨가 지난 8일 앉아 있다. 꽁지머리 아저씨의 텐트 위에 비닐 돗자리와 등이 덮여 있어 비를 막아준다. 박유리 기자
용산역 뒤편 인적 없는 작은 공원
텐트와 종이박스로 만든 집 20채
57살 꽁지머리 남자는 밤이 싫다
이어폰을 탯줄처럼 두르고 잔다 술에 취한 ‘체 게바라’ 임씨는
검은 옷 입은 내가 귀신 같단다
앞니 빠진 임씨는 소설만 읽는다
어떻게 완벽히 혼자가 되었을까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용산역과 할머니의 기억, 그리고 30만원 다음날인 8일 용산역 마트에서 원래 가격보다 20% 할인된 3만1200원으로 텐트를 샀다. 용산역 공원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고물을 주워 생계를 잇는데 3만1200원은 폐깡통 39㎏을 팔면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지갑을 놓고 집을 나설까 잠시 고민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지갑 없는 삶은, 저녁이 없는 삶보다 막막하고 절박하다. 밥은 어떻게 먹고, 차는 어떻게 타며 그런 구체적인 상황도 문제지만, 100원짜리 하나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 공포다. 돈은 그 자체로 세상을 살아가는 따스한 도움의 손길이다. 배가 고프고 잠이 오고 아플 때도 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 돈이 없으면 허기를 채울 수 없고,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없고, 아프면 앞으로도 쭉 아파야 한다. 전날 입은 1만5000원짜리 검은색 바지보다 허름해 보이는 바지에 칙칙한 남방을 입고 집을 나섰지만 지갑만은 놓을 수 없었다. 꽁지머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아저씨 텐트 옆에 내 텐트를 쳤다. 꽁지머리 아저씨와 내 텐트 사이엔 기다란 의자가 있다. 아저씨가 소나무 아래에 나무합판으로 만든 의자다. 소나무에 얹어진 우산이나 박스는 여름날 뜨거운 햇빛을 가려준다. 아저씨도 처음부터 돈 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네살 때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어머니는 재혼한 뒤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 손에 자란 꽁지머리 아저씨는 중학교까지 학교를 다녔다. 인천에 살았고, 연안부두에 정박한 배에서 잠을 자며 배를 지켜주는 대가로 돈을 벌었다. 다방 디제이도, 중국집 배달도 했다. 아는 사람 소개로 서른네살에 당시 대우중공업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건물 보안을 담당하는 일종의 경비였다. 월급은 130만~15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스물다섯살에 만난 여자와 동거를 해 두 딸을 낳았다. 첫아이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처갓집의 도움으로 스무평 남짓한 다세대주택을 샀다. 겨울이면 처형이 있는 강원도 속초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도박장을 차리는 ‘하우스 도박’에 우연히 돈을 걸게 되었고, 빠져들었고, 사채를 쓰게 되었고, 이자는 이자를 낳아 4억원까지 치솟았다. 빚쟁이들이 협박을 하러 집으로 찾아왔다. 고등학생인 딸들이 상처를 받았다. 아저씨는 집을 나와 여관방을 얻어 그곳에서 3년간 직장을 다녔다. 아내와는 별거를 했다. 아이들은 아주 가끔씩 만났다. 홍수로 범람하고 포효하는 강물처럼 빚은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협박 등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아내와 이혼을 했다. 2010년 5월. 3년간 살던 인천의 여관방에서 짐을 정리해 가방을 꾸렸다. 여관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갔는데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몸이 편찮으셨던 아저씨의 할머니는 손자 손을 잡고 인천에서 용산까지 와서 약방에서 약을 지었다. 그 기억 하나를 붙잡고 용산역으로 왔다. 딸이 생일날 사주었던 반팔 티셔츠에 얇은 점퍼를 걸치고. 주머니에 든 돈은 삼십만원. 며칠간 술을 마시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잠을 잤다. 우연히 이 공원을 알게 되었고 주머니에서 꺼낸 몇 만원으로 보쌈과 소주를 사서 이곳 노숙인에게 대접했다. 노숙인들이 아저씨에게 여기에 살라고 했다. 용산역에 온 지 두달이 지났을 때 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세상에 없는 번호였다. 완벽하게 버려져 혼자가 되었다. 홀로 내던져졌다. “이 생활 하다보면 미친 사람들을 자주 봐요. 처음부터 미친 건 아니었어요. 3년 전엔 분명 멀쩡했는데 다시 만나보니 혼자 실실 웃고 땅바닥에 말을 하더라고. 자신을 놓게 되는 거지. 다른 노숙인과 어울리지 않고 하루 종일 혼자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많고.” 주거가 일정하지 않아 주민등록은 말소되었고 신용불량자였으며 빚쟁이는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교회를 다니며 500원, 1000원을 받는 ‘짤짤이 코스’를 다녔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신문을 수거해 폐품을 팔았다. 멀쩡해 보이지만 직장을 다닐 때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는 등 장애인 5급 판정을 받은 몸이었다. 길거리에서 밥을 나눠주는 배급소에 줄을 섰다. 노숙인 식당이 있는 곳도 있지만 거리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배급소도 있다. 꽁지머리 아저씨는 옆이나 맞은편에 앉아 식사하는 노숙인 냄새에 밥을 먹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같은 노숙인이라고 해서 냄새를 맡는 후각조차 얼어붙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는 급식소에서 밥을 먹지 않고 텐트에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을 갖다놓고 직접 밥을 한다. 라면을 먹기도, 찌개를 끓이기도 한다. “삶의 의미가 없네.” 용산역 공원의 밤은 술로 들썩이다 오전이 되면 휑해진다. 기차 소리 때문에 대부분 아침 7시면 일어나 각자 살아가는 방식으로 흩어진다. 공짜로 밥을 먹고 동전을 받는 코스가 다르고, 고물을 줍는 사람들은 시간대와 동선이 어긋난다. 꽁지머리 아저씨의 텐트는 공원 끄트머리에 있다. 공원 중간엔 어제 술판이 벌어진 벤치가 있다. 이곳 사람들이 장기를 두고 신문을 보거나 술을 마시는 탁자다. 어제 술을 마시고 한참 동안 경상도와 전라도의 표심과 정치에 대해 말하던 반바지 입은 아저씨가 오후에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 술을 안 마시니 말이 없다. “삶의 의미가 없어.” 고향이 충남 천안인 반바지 아저씨는 가정불화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말 외에는 대다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아저씨와 나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새는 소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데 공원 옆 철로에 들어온 기차가 정차하며 육중한 쇳소리를 냈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지만, 아저씨는 필리핀 출신의 아내와 결혼을 했었다.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필리핀에 가버렸다고 한다. 어떤 노숙인이 1998년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자 아저씨가 “그때 내가 결혼을 했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 그가 이때쯤 결혼한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이 잠시 앉아 있다 떠나는 용산역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이 철로 옆에서 계속된다. 기차표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놓치면 다음 기차에 올라타고 떠난다. 자꾸만 반복해서 놓치다 보면 다시는 기차에 타지 않게 된다. 철로에 홀로 남겨진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든 빈곤을 낳는 사회구조의 문제든 기차에 몸을 실을 생각을 버리게 된다. 배고픔이나 추위가 닥쳐도 피하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위에서 느껴지는 허기짐과 살이 에는 추위를 느끼는 감각은 여전한데 그조차 늘 겪다보면 고통이 어쩐지 익숙해진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시간에 올라타지 않고 시간 밑에 드러눕는다. 거친 비나 바람이 와도 뛰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비바람이 마구 찢고 헝클고 할퀴어도 드러누워 고요히 맞이하게 된다. 절망은 악마 같아서 한번 잡으면 놓아주지 않는다. 추락하는 절망의 끝, 의미가 부서진 삶의 끝은 의외로 고요하다. <다음주에 계속>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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