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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엄마는 다리를 못 썼고 아들은 뇌성마비였다

등록 2015-08-14 19:39수정 2015-08-16 09:44

[토요판]
[르포] 한수산이 만난 ‘합천 원폭 피해자’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옆 위령각에는 1057위의 원폭 희생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난 6일 원폭 피해자 할머니들이 위패를 살펴보고 있다.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옆 위령각에는 1057위의 원폭 희생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난 6일 원폭 피해자 할머니들이 위패를 살펴보고 있다.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노동과 이후 원폭 피해의 역사를 담은 대하소설 <까마귀>의 한수산(69) 작가가 5~6일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에 다녀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원폭 피해 1세는 2584명이 남은 것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2세들이다. 2002년 숨진 김형률씨의 분투로 만들어진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여러 노력에도 한·일 양국 정부는 여전히 2세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합천 시내를 끼고 흐르는 황강이 물소리도 없이 어둠 속에 싸여가고 있었다. 8월5일 저녁이었다. 황강 강변공원에서는 피폭 70년을 기념하고 비핵·평화를 열망하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합천으로 떠나면서 바라본 광화문 거리에는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 ‘당신이 역사이고 미래입니다’ 하는 걸개들이, 빌딩 벽을 뒤덮은 대형 태극기와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휴가철인데도 고속도로는 막힘없이 뚫려 있었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가는 길은 ‘위대한 여정’이 아니었다. ‘70년의 망각’을 찾아, 지난 70년을 가장 뼈저린 고난으로 견뎌낸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한국인 4만명이 폭사하고, 3만명이 중경상을 입고 귀국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몇만명이라는 이 숫자 또한 일본의 시민단체나 인권운동가들이 내놓은 추정치에 불과하다. 수만명의 제 나라 제 민족이 목숨을 잃었는데 0000뿐, 천 자리 숫자도 백 자리 숫자도 없다.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아니 하지 않은 채 우리는 70년을 보냈다.

4시간 남짓 합천으로 향하며 동행한 사진작가에게 해인사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해인사는 88고속도로를 타고 고령으로 해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때부터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라고 외우며 합천읍내 어디쯤에 해인사가 있으리라고 믿으며 자란 나는 뭐란 말인가.

해인사가 없는 합천에서 나를 맞은 건 팔팔 끓는 더위였다. 해맑은 햇살이 살갗을 태울 듯 내리쬐고 있었다. 복지회관을 둘러보며 피폭자들을 만나는 첫발을 내디뎠다.

1996년 한·일 양국 정부가 기금을 지원해 설립된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도 어느새 스무해를 넘긴다. 긴 침묵을 깨고 한·일 양국 정부가 각 40억엔을 출연해 한국 원폭 피해자 복지사업에 합의한 것이 1990년 5월이었다. 그러나 기금관리를 대한적십자사가 맡고 이 복지회관이 문을 열기까지는 또 6년이 흘러야 했다.

숲 속에 자리한 복지회관은 외관도 내부도 정갈했다.

‘모든 게 편하고, 집안이나 똑같아. 더 좋아.’

93살의 유국자 할머니는 그런 말로 감사를 대신했다. 부모를 따라 히로시마에 가서 살다 18살에 결혼한 할머니는 피폭 당시 4살배기 아기의 엄마였다.

아흔셋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할머니는 정정했다. 꽃이 수놓인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계시는 할머니는, ‘참 고우세요’ 하는 내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예쁜 옷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칼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샀지. 장에 가서 내가 골랐어.’ 요양원에서 시내까지 하루 세번 셔틀버스가 다닌다고 했다.

양국 정부가 이뤄낸 결실이다. 그러나 아쉽다. 110명 정원의 복지회관에는 현재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대기자가 또 110명에 이른다.

70주기 원폭 희생자 추모제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평화 기원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모습.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70주기 원폭 희생자 추모제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평화 기원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모습.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피폭 2세, 일반인보다 심장계통 질환 89배

합천읍을 끼고 흐르는 황강변 야외공연장에서 열리고 있는 비핵·평화 한마당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학살 기념관은 희생자의 이름을 잊지 말라는 뜻의 야드 바솀이다. 이번 행사도 ‘원폭 피해자,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깊어가는 여름밤, ‘만들어요, 핵 없는 세상’ 난장판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반핵의 노래가 황강변의 하늘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독일 바이마르 시 외곽 부헨발트 유대인 수용소로 연합군이 진입할 때 동행했던 <라이프>지의 여성 사진기자 마거릿 버크화이트가 찍은 사진 속에는 참새구이 같은 앙상한 몸으로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다. 침상 둘째 칸 왼쪽에서 여섯째에 누워 있는 사람, 그가 훗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이다. 그는 말했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그렇기에 묻게 된다.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두번이 아니라 70년 동안 피폭자를 죽여오고 있지 않은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피폭자를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생존자는 2584명이다. 평균연령이 82살인 이들은 오늘도 방사능 후유증을 등에 업고 살아간다.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 원폭 피해자의 기초 현황과 건강 실태 조사를 통해, 피폭 1, 2세가 열악한 건강상태와 사회적 소외 속에 있으며, 입법대책과 정밀조사가 절실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 조사는 놀랍게도 피폭 1세에게 일반인보다 우울증 93배, 조혈계통의 암 70배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피폭 2세의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이들은 일반인보다 심장 계통 질환 89배, 빈혈 88배, 백혈병 13배를 앓고 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경악할 수치인가. 짧은 기간의 조사가 이러한데도, 국가적 차원의 실태조사나 의료지원이 전무한 채 피폭자들은 고통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원폭 피해자와 그 자녀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안은 2012년부터 4건이나 발의되었지만 자동폐기로 물거품이 되었다. 19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돼 소위에 계류 중이지만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이번 국회에서 또 자동폐기 된다면 이 통한을 어찌할 것인가.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2003년부터 원폭 피해자 1세들이 일본으로부터 받고 있는 원호수당이 있다. 이것조차 징병 1기생으로 히로시마에 끌려가 피폭당한 곽귀훈 선생이 오랜 세월 치열한 법정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다. 과거사 투쟁에 한 획을 그으며 승소를 이끈 곽 선생의 노고는 위대했다. 그가 길고 피나는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우리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나 도움은 전무했다.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현재 국내 중고교 역사교과서 29종 가운데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사실뿐, 한국인 피폭자를 언급한 교과서는 두산동아가 출판한 단 하나라고 한다.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피폭자들이 살아낸 ‘참혹한 여정 70년’이다.

한국 피폭자 수는 세계서 두번째
현재 생존자 2584명, 평균연령 82살
70년을 뼈저린 고난으로 견뎌낸
그들을 70주기 원폭희생자 추모제가
열린 합천의 복지회관에서 만났다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으로
인생 부서진 피폭2세 한정순씨
뇌성마비 아들까지 돌보는 이중고
절망 늪에서 수술받아 일어선 뒤
다른 피폭2세 환우 위한 활동 시작

피폭 2세 환우 한정순씨. 그에게 원폭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피폭 2세 환우 한정순씨. 그에게 원폭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원폭 때문이 아니다, 굶어 죽었다”

피폭 2세 환우 한정순(59살)씨. 그녀는 올해도 광복절이 기쁘지 않다. 그녀에게 일제 강점기의 고통은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녀가 들려준 사연, 그 절절함과 기구함은 듣는 내내 그랬듯이 옮겨 적기에도 힘겹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로 삶의 기반을 잃고 히로시마로 건너갔던 부모는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만난다. 그때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건물이 무너지면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목숨을 구한 부모는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지만, 피폭의 고통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제가 2남 4녀의 다섯째입니다. 첫째 오빠는 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세상을 떠났고, 저는 어릴 때부터 다리의 통증으로 고생했습니다. 피폭 후유증이 저에게도 나타난 거죠.”

병명도 알 수 없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직장생활도 접어야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며 태어난 첫아들이 뇌성마비였다.

이어서 4형제 모두에게 홍반이라는, 살이 달걀만큼 부어오르는 병고가 덮쳤다. 그 뒤를 이어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기이한 병이 그녀를 산산이 부숴나갔다. 대퇴부의 관절이 무너져 내리며,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뇌성마비 아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다. 걸을 수가 없으니 집안에서도 두 손으로 몸을 끌며 꿈틀거려야 했다. 뇌성마비 아들을 위해 라면을 끓였지만,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방 안에 묻혀 가며 몸을 끌고 다니느라 어느새 불어터진 라면을 보며 통곡하기는 얼마였던가.

더 어떻게도 삶을 이어갈 여력이 없던 절망의 늪에서 수술을 받은 것이 93년이었다. 인공관절을 한 몸이 놀랍게도… 일어서고, 걷고, 뛸 수도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결심했다. 이제부터의 내 삶은 덤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누군가를 위하여 살자.

“정말 내가 아팠기에 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요. 내가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지요.”

‘아픈 사람’을 위해 살기로 한 그녀가 찾아 나선 길은 병원의 간병인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아팠기에 나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안다’는 성찰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해 자신과 같은 피폭 2세 환우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고, 합천을 진원지로 하는 ‘반핵운동’에도 동참했다.

89살의 몸으로 합천 복지회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어머니는 귀국하며 낳은 첫아이가 원폭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원폭 때문이 아니다. 아기는 굶어 죽었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 가슴의 피눈물을 나는 압니다. 피해를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는 그 피눈물을.”

피폭자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게 대책을 마련하라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이 조직은 피폭 2세의 대책을 절규하며 35살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형률씨가 2002년 설립했다.

그녀는 말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고리원전과 밀양 송전탑, 중국에 증설되는 핵발전소 등을 보면 또 우리 같은 피해자가 나타날까봐 두렵습니다. 전쟁만이 아니라 이제는 생활 속의 핵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수산 소설가.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수산 소설가. 장성하 사진작가 제공
육체적인 고통과 장애인 아이를 둔 처절한 삶을 모성애로 함께 극복하고, 개인의 비극과 절망을 넘어서 ‘함께한다’는 연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 갔던 한정순씨. 고통받는 자들끼리 고통을 나누는 것도 치유의 하나임을 보여주는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절절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 피폭 2세의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그녀는 지금도 거동이 불가능한 서른살의 아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합천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망각으로 봉인’된 무관심의 70년

귀가 멍한 더위 속을 뚫고 자지러지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만이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1945년 그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도 매미는 그렇게 울어댔다고 했다.

‘70주기 원폭희생자 추모제’가 복지회관 옆 위령각 앞에서 시작되었다. 위령각에는 1057위의 원폭 희생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추모식장 옆으로는 피폭 1세들이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그린 그림들이 내걸려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조촐한 추모제가 진행되는 내내 위령각에 내걸린 ‘해원을 넘어 평화의 언덕으로’라는 슬로건을 바라보았다. 이 말이 위안이 된다. 우리의 뜻은 인류의 평화를 위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추모제를 마치고 합천을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합천평화의집’으로 향했다. 원폭 피해자를 위한 쉼터로 출발한 이곳은 비핵·평화운동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한 스님의 열정과 노고가 일궈낸 결실이다.

2세 환우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살펴보는 사이 이곳 사무총장 이남재씨가 여성 팀원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한계에 힘이 부친다는 그녀에게 이남재씨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끝까지 가봅시다. 힘내시고!’

그렇다. 냉대와 외면 속에 그래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포기하지 않는 열정 이것이 희망의 불씨가 아닌가.

‘우리들의 망각’과 함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저들의 왜곡’이다. 멸실되기 전에 정확한 자료를 모으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영원히 남겨야 한다. 합천군이 주도하는 원폭기념관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것도 희망의 불씨 아닌가.

일제 강점기를 다룬 내 소설 <까마귀>의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면면히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온갖 역사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피폭 1세, 아직도 끝나지 않은 <까마귀>의 비극을 이어가고 있는 2세들에게, ‘망각으로 봉인’된 냉대와 무관심의 70년을 깨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힘차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한수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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