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록볼록하고 검은 마감재로 내부를 가린 서울 청담동 ㅈ 매장은 1층에만 유리창을 내어 명품을 보여준다. 비밀스러운 성안에 전시된 듯한 가방과 의상은 그 자체로도 위엄과 권위를 드러낸다.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청담사거리까지 유동 인구가 적은데다 실제 구매자가 아니고서는 명품 매장 문을 여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지난달 30일 남녀 4명이 ㅈ 매장 앞을 스쳐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박유리의 서울, 공간 (4) 청담동 명품거리
▶ 서울의 얼굴이 되지 못한 뒤안길을 따라가던 <박유리의 서울, 공간>이 4회를 맞아 서울 청담동으로 갔습니다. 먹고 살아간다는 것, 살아 낸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의 아름다움은 세상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명품점, 중고명품점, 명품을 받는 전당포, 명품 전문 수선점이 늘어선 갤러리아 백화점부터 청담 사거리까지 걸으며 무수한 손을 만났습니다. 배꼽 아래에 얹은 공손한 두 손, 어루만지듯 명품을 꺼내는 조심스러운 손들입니다.
지하철은 서울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달리며 다른 세상에 데려다준다. 2분30초 간격으로 문이 열리면 지하철역이 자리한 땅의 값과 그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소비 규모 안에 얼추 들어맞는 복식을 한 사람들이 입장을 한다. 서울의 남쪽으로 달려갈수록 지하철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서울의 서쪽이나 동쪽 끝과 격차를 벌린다. 지하철은 땅 밑에서도, 불과 몇십분 만에 서울의 서쪽과 남쪽이, 북쪽과 남쪽이 얼마나 다른 세상인지를 암시한다.
서울뿐이겠는가. 한국의 남쪽에서 기차를 타면 들이나 얕은 산, 한가로이 노는 대지를 지나 몇시간이면 서울에 닿는다. 서울에 다가설수록 손바닥만한 땅도 놀려선 안 된다는 강박에 눌린 빽빽한 풍경이 창문 밖에서 들어온다. 한두시간 전의 여백 덩어리인 풍경들과 비교해보면 그리 크지 않은 한국의 땅덩어리들이 얼마나 다른 시간을 거쳐왔으며, 그 시간 속에서 다른 개발이 이뤄졌는지를 느낀다. 이 불균질한 땅을 좇아 희망도 움직인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선 서울로, 서울의 서쪽이나 북쪽에선 남쪽으로 가기를 갈구하니 서울의 남쪽은 삶의 자리를 옮기기 바라는 소망의 최정점이다.
강북과 먼 서울 남쪽의 남쪽,
황금의 땅에선 시크한 눈빛
절제한 창과 알 수 없는 입구
비밀스러움도 검은색도
다가서기 힘든 권위가 된다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장갑 낀 두 손이 명품가방을
꺼내고 꽃게에 붙은 톱밥과
채소에 붙은 흙을 털어낸다
이 손들은 누구의 것일까 어깨마다 검은 샤넬백 한국의 남쪽, 바다 짠내가 나는 항구와 산동네들이 즐비한 곳에서 태어나 처음 마주한 도시, 서울은 다른 세상이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이 주소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구매력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임을 알게 됐을 때, “어디 산다”고 하면 어느 수준의 경제력인지 파악했다는 자동반사적인 표정을 마주할 때가 그랬다. 사는 동네에 대한 자부심은 두 발을 딛고 사는 땅의 값, 딱 그만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서울의 남쪽은 다른 세상이다. 서울의 남쪽에서도 저 안쪽, 강북과 더 떨어진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의 남쪽. 남쪽의 남쪽에서도 값비싼 물건을 파는 청담사거리와 갤러리아백화점. 땅 밑 지하철을 타고 몇십분 만에 도착했다. 삶의 자리를 옮기기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과 그 희망의 최정점이 거기 있는지, 그 희망은 아름답고 찬란하여 유혹적인지 알고 싶었다. 죄다 검은색이다.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청담사거리로 이어지는 명품 거리까지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들어간 곳은 갤러리아 명품관 서관 지하 1층 식품관 ‘고메이494’다.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식자재를 파는 식품관과 레스토랑이 합쳐진 공간은 어느 백화점 지하 식품관과 달리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검정을 기본으로 황금색과 원목이 인테리어 포인트로 들어가는 식품관은 식품관치고 어두운 조명을 썼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물건을 골랐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흰색이나 회색 정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뿐이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청색으로 포인트를 준 옷차림이다. 어깨에는 나이와 관계없이 검은 샤넬백이 한 점씩 걸려 있다. 복사한 그림들처럼 말이다. 멋 부리지 않은 듯한 차림에 낮은 신발을 신었지만, 고급스러운 소재의 검은 원단은 일종의 공식이었다. 어떤 특정 시대의 상징들처럼 말이다. 가슴을 깊이 파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어 허리가 더욱 가늘어 보이는 드레스를 본다면 16~18세기 로코코 시대를 떠올리듯 말이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무채색과 무심한 듯 시크한 의상에서 나오는 숨길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남쪽의 남쪽을 상징하는 문화적 양식인지 모르겠다. 부의 축적은 다양한 패션과 양식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데 남쪽의 남쪽에서 그 양식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듯했다. 아이스크림 코너에선 한 여자가 통화를 했다. 라즈베리, 블랙베리, 요거트맛 가운데 무엇을 살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는데 라즈베리의 아르(r), 블랙베리의 엘(l), 요거트의 아르(r) 발음에서 엘과 아르의 차이가 무척 명확해 통화 내용이 귀에 쏙 들어왔다. 분유 등 아기 제품을 파는 코너에선 한 젊은 여자가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제품의 성분 표시를 읽었다. 주로 주인공의 엄마 역할을 맡는 배우가 식품관에 들어왔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배우의 딸로 출연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온다 한들 기웃대거나 사인을 요청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가슴과 허리선을 가려버린 드레스가 로코코 시대의 양식이 아니듯, 시크하고 무심해야 하는 검은 세상에서 누군가를 동경하는 눈빛을 보여선 어색하다. 정장에 행커치프를 한 노신사는 쇼핑 카트기 앞에서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쇼핑 카트기들은 한데 모여 살균처리되고 있었다. 시식 코너는 추석 때 먹을 강정, 한방차, 향고버섯(표고버섯의 옛 이름)뿐이다. 만두 같은 냉동식품은 없다. 호텔 프런트 직원처럼 단정한 정장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매장을 점검했다. 식품관에서 충북 제천 약초시장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한방차를 끓일 약재들이 마트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홍화씨, 우슬, 오가목, 여주, 노루궁뎅이버섯, 맥문동, 말린 모과 등이 품목별로 쌓여 있다. “요즘 감기가 난리잖아. 면역력을 키워준다니까. 먹어야지. 너 먹을 거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은 유모차에 타고 있는 두세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한방차를 한 잔 건넨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위생용 머릿수건을 한 직원은 질문을 건넨 젊은 여성이 아닌, 그 옆에서 유모차를 끌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한방차 우리는 방법을 설명한다. 아주머니는 가사도우미거나 보육도우미일 것이다.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채소, 과일은 대다수 ‘유기농’, ‘무농약’이었고 공산품 가운데 세제 코너는 ‘에코, 바이오, 천연’을 빼면 상품 설명이 완성되지 않았다. 친절 넘은 공경, 또는 압박 배가 고파졌다. 지하 식품 코너에 자리한 식당들이지만 셀프서비스는 없다. 주문을 하면 점원이 가져다주고 치운다. 음식이 담긴 쟁반 위에는 기내식처럼 밀봉된 소형 생수, 물티슈가 함께 나온다. 가쓰돈(돈가스 덮밥)을 시켜 먹으며 벽걸이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식품관을 홍보하는 영상이 무한 반복된다. 검은 배경으로 식품이나 음식에만 강하게 조명을 비추어 찍은 영상은 얼마나 고급스럽고 건강에 좋은지를, 얼마나 희귀하고 정성스러운 식재료인지를 설명한다. “일본 고베 화우의 생산 방법인 맥주 급여 방식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맥주 대신 한약재가 들어간 발효 막걸리를 소에게 급여하는 이 생산 방식은….” “오래된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아치 형태의 매장은 마치 도서관 안의 높은 책장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책을 고르듯 와인을….”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하는 쌈채류는 즉석에서 뿌리째 또는 잎사귀만 잘라내 구매할 수 있으며….”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의 맑은 공기와 뜨거운 태양을 머금은 유기농 과일로 만들어 더욱 당도가 높은….” “베이크(bake) 서비스는 고구마, 감자 등 간식을 즉석 조리해 판매합니다. 고구마는 경북 영주에서 3대째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으며 당도를 높이기 위해 저장고에서 2개월 이상 숙성….” 정성스러운 자막과 식자재들이 클로즈업된 영상이 상영됐다. 손이 포도 한 알을 터뜨리자 과육이 톡, 하고 터지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해산물 요리사의 손은 꽃게 껍질에 묻은 톱밥을 명품 다루듯 정성스럽게 털어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은 또 다른 손은 뿌리채소에 묻은 흙을 부드럽게, 천천히 쓸어내려 갔는데 저 속도로는 아침에 채소를 다듬으면 저녁에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우의 위생성을 설명할 때는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같은 장면들이 나왔다. 비를 맞는 소의 청량한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운 식자재라며 연신 감탄하며 보다가, 반복되는 클리셰에 지겨워졌다. 샤워를 하듯 비를 맞는 소의 모습에선 클로즈업된 포도알처럼 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녁 8시. 청담동 명품 매장들이 문을 닫는 시간대다. 불 꺼진 한 매장 앞에 서 있었다. 쇼윈도에는 가죽장갑을 낀 모형 손이 조각처럼 있었는데 두 손이 가죽가방을 떠받쳤다. 이런 손들은 쇼윈도뿐만이 아니다. 이 거리에서 다소 저렴한, 50만원대 가방을 파는 ㄲ 매장을 제외하곤, 대다수 직원들은 장갑을 끼고 정성스럽게 진열대에서 가방을 꺼내 열어보였다. 고가 매장일수록 정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 직원이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서 있었다. 유동 인구도 많지 않은 곳에서 혹여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를 하고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어두움이 내리고 유럽 건물처럼 생긴 명품 매장의 아치형 유리창에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는데 정장 남자는 정물처럼 그 조명을 받으며 문에 서 있었다. 건물 가까이 다가가니 인사를 하려고 준비를 하다가 지나쳐버리자 다시 정장 남자가 긴장을 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직원들은 극한의 친절을 보였다. 친절이라는 말은 그나마 수평적 관계에서 어울리는 배려적 단어다. 공경에 가깝게 느껴졌다. ㅍ 매장에 들어가 구두를 둘러보았다. 여자 직원은 어깨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진열된 구두를 따라 걷는 내 발걸음 그대로 정확히 1m 정도의 거리를 두며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나는 진열된 구두를 따라가고 그녀는 등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데 무엇을 물으면 등 뒤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인사를 하고, 항공사 승무원보다 더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공경의 언어를 쓰는데 이들의 배려는 이래도 사지 않으시겠느냐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거리에서 나는 상품을 평가하기도, 평가당하기도 했다. 가방이 무거우시지 않으시냐며 의자에 놓으라고 권하며 빠르게 내 가방을 훑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열린 바자회에서 20유로를 주고 산, 누가 썼는지 모를 중고 가방에서 브랜드명을 찾긴 힘들었을 것이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적당히 붉은 입술, 타이트한 검정 스커트 정장 유니폼에 검은 스타킹, 가슴에 새겨진 이름표와 공손한 두 손. 격식 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직원을 대할 때마다 유니폼이 의미하는 공경의 의미가 되새겨졌다. 재벌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정갈한 앞치마와 치마 정장을 입은 집사나 가사도우미처럼 직원도 이 공간에선 아무렇게나 입어선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에서 정성스럽지 않으며 공손하지 않은 손을 본 적이 없다. 갤러리아 명품관 서관 지하 식품 매장에서 보여주던 영상에서도 두 손은 꽃게에 묻은 톱밥을 부드럽게 털어냈고 뿌리채소에 묻은 흙도 머리카락 빗기듯 털어냈다. 찬란한 매혹은 없었다 공손한 두 손들이 떠받치는 명품 매장의 건물들을 지난달 22~24일, 30일 수차례 걸어다녔다. 명품 매장이 입점한 건물들은 검은 세상처럼 일정한 양식을 숨기고 있다. 저마다 다른 마감재와 색깔을 썼지만 건물에서 창만은 절제했다. 1층에 낸 몇개의 제한된 유리창으로 명품을 전시할 뿐, 2층부터는 전면에서 봤을 때 창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 세워진 건물이라 아직 리모델링을 못 한 건물이라면 창문을 블라인드로 막았다. 햇빛은 건물 전면이 아닌, 건물 측면이나 후면으로 들어오도록 돼 있다. 이런 양식은 이 거리에서 다소 저렴해 명품이라고 할 수 없는 브랜드 비이커(Beaker), 디케이엔와이(DKNY)를 빼고는 모두 적용된다. 조르조 아르마니 건물은 모래색 건물 전면에 제대로 된 창문을 아예 내지 않았다. 마네킹 한개 보일 정도의 좁고 기다란 쇼윈도가 건물 전면의 중심부가 아닌, 오른쪽 하단에 설치됐을 뿐이다. 들어가는 입구도 건물 전면에선 보이지 않는다. 건물 바깥에서 봤을 때 조르조 아르마니의 것이라곤 단 한개의 마네킹이 입은 옷뿐이다. 쉽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움, 절제와 제한은 건물의 도도함을 넘어서 권위를 드러냈다. 실제 구매력이 없다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건물들이다. 다리가 아파왔다. 꽃봉오리 형상을 한 크리스티앙 디오르 건물로 걸어갔다. 건물 꼭대기인 5층이자 물결치는 듯한 꽃봉오리의 상부에는 디저트와 음료를 판다. 디오르 카페 바이 피에르 에르메다.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고 텅텅 비어 조용하다.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설치미술처럼, 비닐 소재의 짧은 줄들이 촘촘히 박힌 둥그런 구조물이 파라솔 기능을 한다. 이 얇은 비닐 소재 줄들이 가을바람에 날리며 갈대 소리를 낸다. 그러나 땅에 뿌리내린 굵고 거친 갈대들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여렸다. 평당 매맷값 1억5000만~2억원으로 알려진 황금의 땅 상공에서 듣는 갈대 소리, 그리고 홍차 한 잔에 지불한 값은 1만8000원이다. 나흘간 이 거리에서 느낀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지상에 피어나지 않은 갈대 소리를 들을 때였다. 당대에는 사치품이었으나 후대에 문명으로 남겨질 문화적 유산, 찬란한 아름다움과 매혹을 만나진 못했다. 그리스 고대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들처럼 비밀스러움과 권위를 받치는 공손한 두 손들을 반복적으로 만났을 뿐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황금의 땅에선 시크한 눈빛
절제한 창과 알 수 없는 입구
비밀스러움도 검은색도
다가서기 힘든 권위가 된다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장갑 낀 두 손이 명품가방을
꺼내고 꽃게에 붙은 톱밥과
채소에 붙은 흙을 털어낸다
이 손들은 누구의 것일까 어깨마다 검은 샤넬백 한국의 남쪽, 바다 짠내가 나는 항구와 산동네들이 즐비한 곳에서 태어나 처음 마주한 도시, 서울은 다른 세상이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이 주소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구매력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임을 알게 됐을 때, “어디 산다”고 하면 어느 수준의 경제력인지 파악했다는 자동반사적인 표정을 마주할 때가 그랬다. 사는 동네에 대한 자부심은 두 발을 딛고 사는 땅의 값, 딱 그만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서울의 남쪽은 다른 세상이다. 서울의 남쪽에서도 저 안쪽, 강북과 더 떨어진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의 남쪽. 남쪽의 남쪽에서도 값비싼 물건을 파는 청담사거리와 갤러리아백화점. 땅 밑 지하철을 타고 몇십분 만에 도착했다. 삶의 자리를 옮기기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과 그 희망의 최정점이 거기 있는지, 그 희망은 아름답고 찬란하여 유혹적인지 알고 싶었다. 죄다 검은색이다.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청담사거리로 이어지는 명품 거리까지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들어간 곳은 갤러리아 명품관 서관 지하 1층 식품관 ‘고메이494’다.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식자재를 파는 식품관과 레스토랑이 합쳐진 공간은 어느 백화점 지하 식품관과 달리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검정을 기본으로 황금색과 원목이 인테리어 포인트로 들어가는 식품관은 식품관치고 어두운 조명을 썼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물건을 골랐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흰색이나 회색 정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뿐이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청색으로 포인트를 준 옷차림이다. 어깨에는 나이와 관계없이 검은 샤넬백이 한 점씩 걸려 있다. 복사한 그림들처럼 말이다. 멋 부리지 않은 듯한 차림에 낮은 신발을 신었지만, 고급스러운 소재의 검은 원단은 일종의 공식이었다. 어떤 특정 시대의 상징들처럼 말이다. 가슴을 깊이 파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어 허리가 더욱 가늘어 보이는 드레스를 본다면 16~18세기 로코코 시대를 떠올리듯 말이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무채색과 무심한 듯 시크한 의상에서 나오는 숨길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남쪽의 남쪽을 상징하는 문화적 양식인지 모르겠다. 부의 축적은 다양한 패션과 양식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데 남쪽의 남쪽에서 그 양식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듯했다. 아이스크림 코너에선 한 여자가 통화를 했다. 라즈베리, 블랙베리, 요거트맛 가운데 무엇을 살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는데 라즈베리의 아르(r), 블랙베리의 엘(l), 요거트의 아르(r) 발음에서 엘과 아르의 차이가 무척 명확해 통화 내용이 귀에 쏙 들어왔다. 분유 등 아기 제품을 파는 코너에선 한 젊은 여자가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제품의 성분 표시를 읽었다. 주로 주인공의 엄마 역할을 맡는 배우가 식품관에 들어왔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배우의 딸로 출연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온다 한들 기웃대거나 사인을 요청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가슴과 허리선을 가려버린 드레스가 로코코 시대의 양식이 아니듯, 시크하고 무심해야 하는 검은 세상에서 누군가를 동경하는 눈빛을 보여선 어색하다. 정장에 행커치프를 한 노신사는 쇼핑 카트기 앞에서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쇼핑 카트기들은 한데 모여 살균처리되고 있었다. 시식 코너는 추석 때 먹을 강정, 한방차, 향고버섯(표고버섯의 옛 이름)뿐이다. 만두 같은 냉동식품은 없다. 호텔 프런트 직원처럼 단정한 정장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매장을 점검했다. 식품관에서 충북 제천 약초시장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한방차를 끓일 약재들이 마트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홍화씨, 우슬, 오가목, 여주, 노루궁뎅이버섯, 맥문동, 말린 모과 등이 품목별로 쌓여 있다. “요즘 감기가 난리잖아. 면역력을 키워준다니까. 먹어야지. 너 먹을 거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은 유모차에 타고 있는 두세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한방차를 한 잔 건넨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위생용 머릿수건을 한 직원은 질문을 건넨 젊은 여성이 아닌, 그 옆에서 유모차를 끌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한방차 우리는 방법을 설명한다. 아주머니는 가사도우미거나 보육도우미일 것이다.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채소, 과일은 대다수 ‘유기농’, ‘무농약’이었고 공산품 가운데 세제 코너는 ‘에코, 바이오, 천연’을 빼면 상품 설명이 완성되지 않았다. 친절 넘은 공경, 또는 압박 배가 고파졌다. 지하 식품 코너에 자리한 식당들이지만 셀프서비스는 없다. 주문을 하면 점원이 가져다주고 치운다. 음식이 담긴 쟁반 위에는 기내식처럼 밀봉된 소형 생수, 물티슈가 함께 나온다. 가쓰돈(돈가스 덮밥)을 시켜 먹으며 벽걸이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식품관을 홍보하는 영상이 무한 반복된다. 검은 배경으로 식품이나 음식에만 강하게 조명을 비추어 찍은 영상은 얼마나 고급스럽고 건강에 좋은지를, 얼마나 희귀하고 정성스러운 식재료인지를 설명한다. “일본 고베 화우의 생산 방법인 맥주 급여 방식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맥주 대신 한약재가 들어간 발효 막걸리를 소에게 급여하는 이 생산 방식은….” “오래된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아치 형태의 매장은 마치 도서관 안의 높은 책장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책을 고르듯 와인을….”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하는 쌈채류는 즉석에서 뿌리째 또는 잎사귀만 잘라내 구매할 수 있으며….”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의 맑은 공기와 뜨거운 태양을 머금은 유기농 과일로 만들어 더욱 당도가 높은….” “베이크(bake) 서비스는 고구마, 감자 등 간식을 즉석 조리해 판매합니다. 고구마는 경북 영주에서 3대째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으며 당도를 높이기 위해 저장고에서 2개월 이상 숙성….” 정성스러운 자막과 식자재들이 클로즈업된 영상이 상영됐다. 손이 포도 한 알을 터뜨리자 과육이 톡, 하고 터지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해산물 요리사의 손은 꽃게 껍질에 묻은 톱밥을 명품 다루듯 정성스럽게 털어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은 또 다른 손은 뿌리채소에 묻은 흙을 부드럽게, 천천히 쓸어내려 갔는데 저 속도로는 아침에 채소를 다듬으면 저녁에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우의 위생성을 설명할 때는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같은 장면들이 나왔다. 비를 맞는 소의 청량한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운 식자재라며 연신 감탄하며 보다가, 반복되는 클리셰에 지겨워졌다. 샤워를 하듯 비를 맞는 소의 모습에선 클로즈업된 포도알처럼 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녁 8시. 청담동 명품 매장들이 문을 닫는 시간대다. 불 꺼진 한 매장 앞에 서 있었다. 쇼윈도에는 가죽장갑을 낀 모형 손이 조각처럼 있었는데 두 손이 가죽가방을 떠받쳤다. 이런 손들은 쇼윈도뿐만이 아니다. 이 거리에서 다소 저렴한, 50만원대 가방을 파는 ㄲ 매장을 제외하곤, 대다수 직원들은 장갑을 끼고 정성스럽게 진열대에서 가방을 꺼내 열어보였다. 고가 매장일수록 정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 직원이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서 있었다. 유동 인구도 많지 않은 곳에서 혹여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를 하고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어두움이 내리고 유럽 건물처럼 생긴 명품 매장의 아치형 유리창에 황금빛 조명이 반짝이는데 정장 남자는 정물처럼 그 조명을 받으며 문에 서 있었다. 건물 가까이 다가가니 인사를 하려고 준비를 하다가 지나쳐버리자 다시 정장 남자가 긴장을 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직원들은 극한의 친절을 보였다. 친절이라는 말은 그나마 수평적 관계에서 어울리는 배려적 단어다. 공경에 가깝게 느껴졌다. ㅍ 매장에 들어가 구두를 둘러보았다. 여자 직원은 어깨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진열된 구두를 따라 걷는 내 발걸음 그대로 정확히 1m 정도의 거리를 두며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나는 진열된 구두를 따라가고 그녀는 등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데 무엇을 물으면 등 뒤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인사를 하고, 항공사 승무원보다 더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공경의 언어를 쓰는데 이들의 배려는 이래도 사지 않으시겠느냐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거리에서 나는 상품을 평가하기도, 평가당하기도 했다. 가방이 무거우시지 않으시냐며 의자에 놓으라고 권하며 빠르게 내 가방을 훑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열린 바자회에서 20유로를 주고 산, 누가 썼는지 모를 중고 가방에서 브랜드명을 찾긴 힘들었을 것이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적당히 붉은 입술, 타이트한 검정 스커트 정장 유니폼에 검은 스타킹, 가슴에 새겨진 이름표와 공손한 두 손. 격식 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직원을 대할 때마다 유니폼이 의미하는 공경의 의미가 되새겨졌다. 재벌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정갈한 앞치마와 치마 정장을 입은 집사나 가사도우미처럼 직원도 이 공간에선 아무렇게나 입어선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에서 정성스럽지 않으며 공손하지 않은 손을 본 적이 없다. 갤러리아 명품관 서관 지하 식품 매장에서 보여주던 영상에서도 두 손은 꽃게에 묻은 톱밥을 부드럽게 털어냈고 뿌리채소에 묻은 흙도 머리카락 빗기듯 털어냈다. 찬란한 매혹은 없었다 공손한 두 손들이 떠받치는 명품 매장의 건물들을 지난달 22~24일, 30일 수차례 걸어다녔다. 명품 매장이 입점한 건물들은 검은 세상처럼 일정한 양식을 숨기고 있다. 저마다 다른 마감재와 색깔을 썼지만 건물에서 창만은 절제했다. 1층에 낸 몇개의 제한된 유리창으로 명품을 전시할 뿐, 2층부터는 전면에서 봤을 때 창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 세워진 건물이라 아직 리모델링을 못 한 건물이라면 창문을 블라인드로 막았다. 햇빛은 건물 전면이 아닌, 건물 측면이나 후면으로 들어오도록 돼 있다. 이런 양식은 이 거리에서 다소 저렴해 명품이라고 할 수 없는 브랜드 비이커(Beaker), 디케이엔와이(DKNY)를 빼고는 모두 적용된다. 조르조 아르마니 건물은 모래색 건물 전면에 제대로 된 창문을 아예 내지 않았다. 마네킹 한개 보일 정도의 좁고 기다란 쇼윈도가 건물 전면의 중심부가 아닌, 오른쪽 하단에 설치됐을 뿐이다. 들어가는 입구도 건물 전면에선 보이지 않는다. 건물 바깥에서 봤을 때 조르조 아르마니의 것이라곤 단 한개의 마네킹이 입은 옷뿐이다. 쉽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움, 절제와 제한은 건물의 도도함을 넘어서 권위를 드러냈다. 실제 구매력이 없다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건물들이다. 다리가 아파왔다. 꽃봉오리 형상을 한 크리스티앙 디오르 건물로 걸어갔다. 건물 꼭대기인 5층이자 물결치는 듯한 꽃봉오리의 상부에는 디저트와 음료를 판다. 디오르 카페 바이 피에르 에르메다.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고 텅텅 비어 조용하다.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설치미술처럼, 비닐 소재의 짧은 줄들이 촘촘히 박힌 둥그런 구조물이 파라솔 기능을 한다. 이 얇은 비닐 소재 줄들이 가을바람에 날리며 갈대 소리를 낸다. 그러나 땅에 뿌리내린 굵고 거친 갈대들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여렸다. 평당 매맷값 1억5000만~2억원으로 알려진 황금의 땅 상공에서 듣는 갈대 소리, 그리고 홍차 한 잔에 지불한 값은 1만8000원이다. 나흘간 이 거리에서 느낀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지상에 피어나지 않은 갈대 소리를 들을 때였다. 당대에는 사치품이었으나 후대에 문명으로 남겨질 문화적 유산, 찬란한 아름다움과 매혹을 만나진 못했다. 그리스 고대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들처럼 비밀스러움과 권위를 받치는 공손한 두 손들을 반복적으로 만났을 뿐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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