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느닷없이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기로 남북이 합의했다. 그 얼마 전까지 서로 전쟁을 하니 마니 하면서 으르렁대더니 고위급 회담이 급작스럽게 열렸다. 회담이 결렬되면 다연장이든 미사일이든 뭐라도 주고받고 하겠나 하면서 며칠을 야간근무하게 하더니 밤샘논의 뒤 합의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격적’이어서 남북관계도 다이내믹 코리아의 범주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그럼 며칠 동안 한반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어 동포의 애간장을 태운 것은 뭔지…. 어째 그 다이내믹은 남이나 북이나 똑같을까? 다이내믹이 말로는 그럴듯한데 사실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 나라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21세기를 사는 문명국가에서 그 말은 그만 들었으면 한다. 가끔 신문 1면 거리가 딱히 없을 때 선수들끼리는 장난말 비슷하게 “다이내믹 코리아잖아?”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차분하게 예측 가능한 나라에서 사는 게 변화무쌍한 다이내믹한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최소한 피곤함은 덜할 것 같다. 이제 한반도는 그만 피곤해도 좀 되는 거 아닌가?
그 과정이야 어찌됐건 몇십년을 생사도 모르고 사는 이산가족이 상봉한다는 뉴스는 정말이지 좋은 소식이었다. 기획팀은 바로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이산가족의 절절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복잡함보다 단순함으로 표현하자는 결론에 닿았다. 그냥 남쪽 상봉자가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의 사진을 들고 기념사진처럼 찍어서 쭉 모아 보여주자는 것. 수십년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던 혈육이 만남을 기다리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헤어질 당시 사진, 그 사진이면 끝 아닌가? 좋다. 그렇게 가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의 세월을 너무 얕게 보았다고 할까? 헤어지기 전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깨진 거울 반쪽을 주면서 “먼 훗날 우리 다시 만나면…” 이러면서 헤어졌을 것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을 줄 알았건만 분단과 이산은 그 정도의 낭만(?)도 허락하지 않았다. 집 나가는 남편을 보내면서 오늘 저녁 들어와서 먹을 밥을 지어 놓았는데 그길로 그 밥을 먹을 사람이 60년이 지나도록 안 들어온 것이고 잠깐 지방으로 간 아버지가 남겨진 아들이 손자를 볼 때까지도 안 들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방 출장 가거나 아침에 출근하면서 영영 이별할 사람처럼 가족사진을 들고 가진 않을 테다. 어찌 보면 헤어진 사람의 사진을 안 들고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분단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상봉 신청을 한 이산가족 중에 10가구를 접촉했으나 헤어진 혈육의 사진을 가지고 있던 가구는 3가구였다. 그나마 사진이라도 가지고 있는 가족은 운이 좋은 경우다. 나머지 가족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헤어질 당시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어 그 흔적도 점점 옅어지건만 사무치는 그리움이 흔들리는 기억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사진은 경북 예천이 고향인 권혁동(66)씨가 보여준 아버지 권오은(89)씨의 사진이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들 권씨의 사진도 보인다. 헤어질 당시 23살이던 아버지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없다. 아버지가 군에 가고 4개월 뒤에 태어났으니 권씨는 아버지 얼굴도 본 적이 없다. 다행히 사진 한 장 남아 있어 이분이 내 아버지였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당시 스무살 꽃다운 나이였던 어머니 임기옥씨는 이젠 인생의 황혼기인 여든다섯이다. 사진을 어루만지는 아들의 손이 헤어질 당시 한창 혈기왕성했던 아버지 얼굴보다 더 주름졌다. 사진 속 아버지의 세월은 전쟁으로 멈춰 서 있는데 중학교 교복을 입었던 아들의 세월만 흘러간 것 같다.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에 권씨 모자는 안타깝게 포함되지 않았다. 남쪽에만 6만6천여명의 이산가족이 있으니 100명 남짓한 상봉명단에 포함되는 게 로또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주름지고 병들고 약해져도 좋으련만 보고 싶은 혈육을 기다려주지 않고 가야만 하는 세월이 야속하다.
윤운식 사진부 뉴스사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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