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야마 유키가 2일 제주시 애월읍 작은고모 신금자(오른쪽)씨 집에서 큰고모 신옥랑(가운데)씨와 함께 평산 신씨 족보를 살펴보고 있다. 유키는 평산 신씨 신승겸 장군 가문의 36대손인 ‘신웅귀’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족보에 올려져 있었다. 사진 허재현 기자
▶ 한 일본인 청년의 ‘뿌리 찾기 여행’ 이야기를 지난주 전해드렸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대체로 응원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반면, <한겨레> 인터넷 일본어판 기사를 본 일본 독자들은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부디 오늘 두번째 전해드리는 이야기를 통해 양쪽 독자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주에서 고모들을 찾은 청년은 펑펑 울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보시죠.
(지난회 요약: 일본인인 히라야마 유키(34)는 자신이 재일조선인의 후손(3세)이라는 것을 3년 전에야 알았다. 자식이 차별받지 않고 크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모는 이 사실을 숨겨왔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유키는 자신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3년간 일본 외무성 등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한 끝에 할아버지 본적이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지난달 말 자신의 한국 친척을 찾으려고 제주에 왔다. 그 단서만으로 유키는 과연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유키의 ‘뿌리찾기 여행’ (상): 일부러 ‘조센진’ 욕했던 엄마는 조선인이었다
유키가 지난달 30일 저녁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땐 제주 하늘에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뒤였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기상예보 탓인지 제주의 대기는 거센 바람이 주인이었다. 바람과 여자, 돌이 많은 제주에서 바람만 제대로 보고 돌아가겠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꼭 만나고 가야 할 가족이 있다. 만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기에 유키의 가슴속에도 바람이 분다.
“제주에 왔으면 흑돼지를 먹어봐야지.” 제주공항에서 나온 유키는 자신의 ‘뿌리찾기 여행’에 동행한 직장 동료 허미선(39)씨와 함께 고깃집을 찾았다. 유키는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 허씨가 통역을 도와주었다. 큼지막하게 덩어리째 불판에 놓인 돼지고기가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테이블에는 시큼한 맛의 김치가 반찬 그릇 위에 놓였다. 고기가 익기도 전에 그는 김치 한그릇부터 뚝딱 해치웠다.
“저는 김치가 너무 좋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가 김치를 처음 먹었어요. 당연히 한국 음식인지 모르고 먹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하고 놀랐지요. 이후 슈퍼에 가서 600그램짜리 김치를 사 와서 혼자 다 먹었어요. 목이 붓더라고요. 병원 갔더니 감기가 아니고 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의사가 설명했어요. 엄마는 저를 크게 혼내면서도 속으로 ‘아들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좋아하셨다는 걸 뒤에 알게 됐죠.”
비바람 속에서 귀덕리 골목 돌며
헤매다가 읍사무소 직원 도움으로
제주시에 있는 고모의 아파트 찾아
오래 연락 끊긴 것 섭섭해한 고모
이내 조카 유키를 보듬어주었다
간직해온 족보를 건네준 고모
유키는 ‘평산 신’씨 36대손이었다
할아버지 산소 찾고 다시 일본행
일본에 있는 여자친구의 부모께
자신의 ‘뿌리’를 설명해야 한다
“어젯밤 꿈에 네 아버지 왔는데…”
아직 친척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 며칠 전 작은어머니로부터 받은 제주 고모 사진이 전부다. 제주에 살던 아버지 히라야마 히로시(1947년생)의 이복누나 신옥랑(77)씨 사진이다. 1997년 가을께 신씨는 갑자기 오사카의 동생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아무 설명 없이 신씨와 사진 한장만 찍고 급히 돌려보냈다. 어린 아들은 어렴풋하게 그 사건을 기억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한림읍사무소를 찾았다. 읍사무소 직원은 난감해했다. “갖고 오신 서류에 적힌 ‘귀덕리 1621번지’(할아버지 본적지)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도 직원은 신옥랑씨가 살아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생존 여부를 확인해보겠다고 설명했다.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직접 귀덕리 일대를 다니며 고모를 수소문하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거센 바람이 들고 있던 우산의 몸뚱이를 수시로 꺾어 괴롭혔다.
“혹시 신옥랑 할머니 아세요? 강병화씨란 분과 결혼해 이곳에서 살았다는데….” 작은 미용실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쪽이 여자 노인회장 집인데요. 한번 거기 가보세요.” 귀덕리 여자 노인회장 홍아무개(80)씨를 만났다. 홍씨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15년째 여기 노인회장인데 이런 사람은 못 봤어요. 신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가 몇 있었는데 지금은 다 죽고 없어요.”
유키와 허미선씨는 수시간을 헤맨 끝에 다시 한림읍사무소로 돌아와야 했다.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어떡하지? 신씨 종친회를 좀 찾아가볼까요?” 그때 한림읍사무소 직원이 찾아왔다. “신옥랑씨가 귀덕리가 아니라 제주 시내에 살고 있네요.” “지금 살아 계신다고요? 아…!” 유키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키는 제주시로 향하는 차 창밖에서 말없이 비 내리는 제주 하늘을 지켜보았다. 사실 어떤 만남이 될지 알 수 없다. 아버지와 친척들이 사이가 좋았으면 다행이지만 꼭 그렇다는 보장이 없다. 마음을 다잡았다. 손에 들린 쇼핑백 꾸러미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함께 애를 태웠다.
직원이 알려준 집주소로 찾아가보니 작고 허름한 아파트가 유키를 맞았다.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침묵 속에 긴장감이 흘렀다. 1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누구세요?”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겨 있던 철문이 열렸다. 작고 왜소한 체구의 할머니였다. 사진 속의 고모가 좀 더 나이 든 모습으로 앞에 서 있었다.
신옥랑씨는 조카를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두 손을 잡았다. 신씨의 네평 남짓한 작은 방은 곧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젯밤 꿈에 이상하게 아버지(유키 할아버지)가 보이더라고. 동생(유키 아버지) 닮은 사람이 날 찾아와서 반지를 껴주었어.” 고모의 꿈은 조카의 방문을 예감했을까. 허씨의 통역을 전해 듣고 유키의 눈이 커졌다. 고모는 조카의 손을 붙잡고 땅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성묘를 마치고 작은고모와 함께. 사진 허재현 기자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안 오고 너 혼자 왔어?”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언제?” “2005년요. 자살하셨어요.” “아이고. 내 동생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신옥랑씨의 연락을 받고 작은고모 금자(74)씨가 찾아왔다. 그의 표정은 옥랑씨만큼 밝지 않았다. 유키는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던 집안 이야기를 작은고모로부터 들었다.
“네 아버지가 2000년도쯤에 여기를 다녀갔어. 너와 형제들을 신씨 가문 족보에 올려놓고 돌아갔지. 제주도에 가족 명의 땅이 좀 있었는데 그것도 분배를 받았어. 그 뒤로 우리가 전화하면 차갑게 받거나 나중에는 아예 전화를 안 받았어. 한국말 배워서 다시 온다더니 소식도 영 없고.” 금자씨의 서운한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준 것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이 고마워.” 두 고모는 조카를 끌어안았다. 조카는 손수건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쳤다.
한국어 초급 교본, 유품의 비밀
두 고모를 통해 전해 들은 집안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러했다. 할아버지 신석준씨는 전처와의 사이에 4남매(1남3녀)를, 일본에서 만난 후처와의 사이에 4남매(3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신씨는 제주에 남겨둔 자식들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전처는 자식들을 홀로 키우다 해방 전후 숨졌고 4남매는 홀로 생존해야 했다. 왜 한국에 남겨둔 자식들이 잘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자세한 내용을 아는 큰고모(장녀)는 수년 전 세상을 떠났다. 고모들은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며 지냈다.
신옥랑씨는 혈육에 대한 애정이 컸다. 일본에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동포 사회를 수소문한 끝에 무작정 찾아갔다는 거다. 유키가 기억하는 ‘1997년 가을 낯선 아주머니의 방문’은 바로 신옥랑씨의 무작정 행보의 결과였다. 그저 혈육이 그리워 찾아갔지만 어렵게 찾은 동생은 냉정했고 신씨는 아직까지 그 이유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키는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신씨에게 다시 전했다. “아버지는 저희가 조선인 출신인 사실을 모르게 키우려고 하셨어요. 일본인으로 자라야 차별 없이 클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그런데 고모가 갑자기 나타나 아버지는 깜짝 놀랐고 자식들이 혹시라도 무언가 알게 될까봐 서둘러 돌려보내신 것에 아주 가슴 아파하셨어요.” 유키는 고모에게 절을 하며 사과했다. “혼토니 고멘나사이.”(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날 점심 작은고모 댁에 초대를 받았다. 전전날 저녁엔 긴장감에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이날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말도 많아졌다. 작은고모 댁에 도착하자 고모 금자씨는 보관 중이던 평산 신씨 가문 족보를 꺼내 보였다. 유키는 평산 신씨 신숭겸 장군 가문의 36대손으로 ‘신웅귀’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족보에 올려져 있었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으로부터 평산 신씨 본관을 부여받았던 인물이었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싸우다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제가 무사의 후손이었던 건가요?”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고모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족보를 보관하고 있었다며 족보를 건넸다. 유키는 이 족보를 일본으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작은고모는 2000년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처럼 옥돔구이를 상에 내어놨다. “동생 많이 먹어.” 유키는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작은고모는 조카를 잠시 동생으로 착각한 듯 말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구경을 시켜줘도 네 아버지는 즐거워하지 않고 답답한 듯 가슴만 쳤어. 한국말을 전혀 모르니 ‘누나 누나’란 말만 반복했지. 나중에 한국 다시 오면 꼭 한국말 배워 오겠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조선인을 비하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공부를 하지 않거나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런 조센진 같은 놈”이라며 나무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누군가를 차별하는 단어란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노년에 남몰래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니. “사실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한국어 초급 교본이 나왔어요. 왜 이런 책이 나왔는가 의아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던 거군요.” 유키는 아버지의 마지막 발자취를 고모에게서 확인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혈육이란 무엇일까. 민족이란 무엇일까. 소통이 단절되고 오해가 쌓이며 앙금과 불신이 커진다. 그러다가도 또한 만나서 대화를 하면 얼었던 장벽이 녹고 대립했던 둘은 서로를 보듬는다. 머릿속은 혼란스럽지만 가슴은 뜨거워졌다. 작은고모는 어제와 달리 “내 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고 아버지를 더 원망하지 않았다. 유키는 “맛있어요”를 반복하며 작은고모가 차려준 밥그릇을 성의껏 비워냈다.
유키가 제주시 애월읍 인근 야산에 묻힌 할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해 작은 고모부 옆에서 절을 하는 모습. 사진 허재현 기자
이들은 이날 오후 유키 할아버지의 묘를 찾았다. 제주시 애월읍 인근의 야트막한 산에 무덤이 있었다. 한국 식으로 두번 반 절을 올렸다. 고모들은 조카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빼게 하고 제주시의 호텔에 방을 새로 잡아주었다. 저녁 늦게까지 이들은 식사를 함께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재일조선인’으로 불렸으면 좋겠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해방!”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제주에서 찾은 가족들과 얘기가 잘 되어서 기뻐요. 가족에 대한 문화가 일본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국적의 차이라든지 이런 것을 계속 신경쓰며 불안해했는데 한국의 가족들은 ‘우린 가족이야’라는 말밖에 하지 않네요. 좀 무서운 표정이었던 작은고모도 하루 만에 인자하게 바뀌었고요. 다만 저희 가족의 스토리가 (4·3항쟁이나 일제 강제이주 따위의) 현대사의 아픔을 가진 것인지 확인 안 되었으니 기자님이 실망하시진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렇지 않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많은 이방인 자녀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한국에는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처럼 말 못할 차별의 아픔을 갖고 사는 소수자들이 있다. 해방 정국 이후 화교 자녀들이 그러했고, 미군 기지촌의 혼혈 자녀들이 그러했고, 동남아시아 혹은 조선족 부모를 둔 지금의 아이들이 그럴 것이다. 이들도 아이를 낳으면 어쩌면 부모 세대의 뿌리를 아이들에게 숨길지 모른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재외동포들이 겪는 이방인으로서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또 다른 우리 안의 이방인을 만들고 그들의 상처에 무감각하다.
유키에게 혹시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그는 씨익 웃었다. “여러분도 호적을 꼭 한번 직접 떼어서 살펴보세요.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게 있을지 모르니!”
다음날 낮 유키는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제주공항 외국인 출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일본에 여자친구가 있어요. 동거를 하고 싶은데 여자친구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제가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저는 ‘재일한국인’이나 ‘재일동포’로 불리고 싶지 않고 ‘재일조선인’으로 불리고 싶어요. 왜냐면 ‘한국’이란 단어는 국가의 의미이지만 ‘조선’은 한반도에 살던 그 민족을 말하는 단어잖아요.”
그는 어렵게 한국의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과정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지금부터일 것이다. 일본에는 재일동포 60만명이 살고 있다. <끝>
제주/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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