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원 건물은 저마다 비슷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건물마다 깨어 붙인 돌들이 투박하고도 견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예수원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마른풀이 내려앉은 지붕들도 여럿 보인다. 사진 박유리 기자
[토요판] 르포
‘설립 50주년’ 예수원에서의 사흘
‘설립 50주년’ 예수원에서의 사흘
▶ 질서 가운데 진정한 자유를 느낀 적이 있는지요. 거기선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와 카메라 사용, 자유로운 옷차림, 샤워, 안락한 잠자리, 기름진 음식, 때를 가리지 않는 대화. 하루에 288번의 종이 울리는 예수원에선 하루 3번의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노동이 곧 기도이기 때문에 함께 일을 합니다. 50년을 맞은 산골짜기 예수원으로 연간 5000여명의 사람들이 안식을 찾아 나섭니다. 강원도 태백행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길을 달렸습니다.
“이 집은 개인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원이나 힐링센터가 아닙니다. 물론 개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도가 중요하겠지만, 여기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집입니다.”
강원도 태백 하사미동 예수원에서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반납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여기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곳이다. 아침 여섯시 전에 일어나, 하루 세번 이상의 침묵 시간을 지키고, 같은 시간에 함께 노동을 하고, 다 같이 같은 밥을 먹고, 기도를 한다.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 된 지 오래지만,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위안과 치유는 절실해질 것이다.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 패배자가 아닌 척 눈물을 숨겨야 하는 사회에서 위로는 다들 저마다의 독방에서 나 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고, 치유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홀로 끝없이 길을 걷는다. 충전과 방전을 되풀이하며 죽지 않는 휴대전화처럼 사회에서 제 몫의 기능을 이어가다 방전이 될 때쯤 힐링을 찾아 떠난다.
힐링센터가 아니라는 이곳 산골 마을 예수원으로 찾아오는 이가 연간 5000여명이다. 더운물도 거의 나오지 않아 샤워나 머리 감기도 쉽지 않은 오지 마을의 50년 된 오래된 집을 찾아 나선다. 옷차림도 제한한다. 이날 같은 시간에 예수원에 도착한 한 여성은 몸매가 드러나는 스키니진을 입었다가 예수원 안내부에서 주는 헐렁한 치마를 걸쳐 입었다. 휴대전화, 카메라를 반납해야 하고 침묵을 알리는 삼종이 울리면 모두 그 자리에 멈춘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예수원을 방문하긴 하지만, 편안하게 기도하고 쉼을 누릴 수 있는 기도원은 도처에 있다. 1965년 미국인 출신의 대천덕(1918~2002) 신부가 기독교 공동체를 지향하며 만든 예수원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이름 모르는 그를 위한 기도
지난 26일 서울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태백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두어시간에 한대 다니는 예수원행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40여분을 달리다 시골길에 내렸다. 같은 버스에서 여성 대여섯명이 내렸다. 예수원으로 가려는 사람들이다. 산턱에 있는 예수원으로 15분을 걸어 올라간다. 몇 채의 집을 지나면 민가는 보이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 나무, 들꽃만 있을 뿐. 어둑어둑한 길 끝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나오는 돌로 만든 집들이 보인다. 마른풀이 내려앉은 지붕 아래로 가을이 물들인 붉고 노란 담쟁이덩굴이 석벽을 타고 올라간 집이다.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제출하고 생활 안내와 이불 커버, 손님 숙소를 안내받았다. 예수원은 예약을 하고 찾아온 손님만 인원을 한정해서 받는다. 3개월, 1년, 또는 매년 여기서 살며 공동체를 이뤄 함께 일하는 50여명의 사람들도 있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6시, 흙바닥을 지나 예배당에 가는데 종이 울린다. 발을 멈추고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황혼의 들판에서 일하던 여자와 남자가 농기구를 옆에 두고 기도를 드린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처럼 예수원 각각의 건물에 있을 사람들이 저마다 하던 것을 멈춘다. 정전처럼 찾아온 침묵이었다. 눈을 감으니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무엇도 행하지 않는 나, 그저 존재하는 내가 되어 침묵을 견뎠다. 2분이 지나자 해동이 된 것처럼 다시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도 다시 길을 걸었다. 예수원은 손님방,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숙소, 예배당, 티룸(차 마시는 방), 도서실, 침묵 기도실, 야외 기도처 등으로 공간을 구분한다. 돌계단이나 흙길을 따라 이동하며 다녀야 한다.
밥을 먹고 저녁 7시30분, 저녁예배 시간이 되었다. 예배를 인도하는 신부도, 사제도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과 오늘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눈을 감았다. 이날은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침묵하며 생각이 나는 것과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아무나 어떤 대상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하면, 다 같이 그것을 떠올리고 생각하며 기도를 이어간다.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이 연상되는 무엇을 털어놓으면 기도가 계속된다. 처음부터 계획한 순서는 없었다.
“소외된 곳에 있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주거 문제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하자 조용히, 또는 조그만 소리를 내어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또 누군가 입을 열었다.
“홈리스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절망으로 떨어진 분들을 위해, 또 그들을 위해 일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기도가 이어지다 어떤 여성이 이런 고백을 했다.
“그러함에도 저는 (홈리스들을) 구분 짓고, 멸시했습니다.”
저마다의 마음에 들어온 소망을 이어붙이다 보니 1시간30분이 지났다. 주거, 난민 등 그날 기도한 것들 가운데 새로울 것도 없었다. 세상은 불평등으로 인한 결핍된 존재로 가득 차 있고, ‘왜 세상은 불공평한가?’ 분노하게 되고, 왜 불평등한지를 분석하고 논쟁한다. 불공평과 결핍의 이유에 대한 생각은 각자의 진영에 따라 다르다. 이 결핍된 세상에서, 어떤 관련도, 관계도 없는 누군가가 좀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이렇게 긴 시간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단 한번도 없었다. 나의 도덕적 우월함이 드러나지 않는 순수한 열망을 가졌던 적도 없었다.
고통에 처해 있을 이름 모를 누군가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느끼며, 안타까워하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진심을 의식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간절해졌다. 바라고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만 타인을 위해 함께하는 기도는 역설적으로 내가 얼마나 나만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했다.
휴대전화와 카메라 반납
말하는 시간도 제한된 곳
하루 288번의 종이 울리면
우리는 침묵으로 들어간다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 모르는 이들과 같은 곳에서
함께 눈 감고, 모르는 이들의
행복을 바라고 간구하면서
알 수 없이 평안해졌다
그곳에서 나를 보았다 휴대전화 없는 시간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들로부터, 의미없는 연락, 책임과 의무 이상의 설명하기 모호한 것들이 요구되는 사회생활, 경쟁과 올라서기와 살아남기로 터질 것 같은 세상으로부터. 일로 만난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도 싶었다. 빈곤, 절망, 체념, 욕망, 빚과 덫, 범죄, 계급, 외로움, 폭력, 트라우마, 소외…. 취재 현장에서 마주한 고통을 곱씹고 곱씹어 삼키는 데 지쳤다. 글을 쓰기 위해, 또는 더 잘 쓰고 싶어서 이런 것들이 도망가지 않게 곁에 붙들어매다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커져버린 감정들에 허우적거렸다. 세상 고통이니 슬픔 따위에서 멀어지려고 3시간10분간 고속버스를 타고, 두어시간 만에 한대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 가방을 메고 15분간 산길을 걸어 통신사 3사 가운데 2곳은 터지지도 않는 태백산맥의 줄기인 덕항산 산골짜기로 왔다. 나를 온전히 만나려고.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눈을 감고,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간구하면서 알 수 없이 평안해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서 나를 보았다. 더 잘 쓰고 싶은 것도 성공과 상승, 명예를 위한 나를 위한 욕망이었다. 명분있고 의미있는 일인들 ‘온전한 이타심’을 가지거나 잠깐이라도 스쳐가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래서 진심을 다한 타인을 위한 기도는 그저 입에서 뱉는 말들이 아니다. 뼛속까지 나밖에 없는 영혼의 바닥을 직면하고 닦아내며 잠시나마 이타심이란 윤기를 내는 일이다. 곧 먼지가 가득할 테지만. 그날 밤에 침묵 기도실에 갔다. 기도를 부탁하는 글이 적힌 공책을 펼쳤다. ‘언니 가정이 위태롭습니다. 형부는 도박중독으로 교도소에 갔고 언니는 술에 자주 취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지 않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참 아프겠구나,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미국 출신의 대천덕 신부는 성미가엘신학원(성공회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65년 12명의 청년들과 이곳에 몇달간 텐트를 치고 살며 예수원을 세웠다. 코이노니아를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성경의 맥락과 상황에 따라 ‘교제’ ‘참여’ 등으로 해석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공동 재정을 기반으로 신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반해 현대의 교회는 점점 개인화되었다. 예배당은 잠깐 들어가 내 곁의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설교를 듣고 빠져나와 각자 사는 독서실이 되었다.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로 역할이 구분되었다. 대천덕 신부는 함께 살아가고 교제하며 기도하는 공동체를 실험하려고 예수원을 만들었다. 지금도 예수원의 사람들은 공동의 시간표를 토대로 함께 일하고 밥을 먹으며 재정을 공유해 살림을 꾸린다. 예수원이 운영하는 목장에서 벌어들인 수익 등과 방문자들이 자발적으로 낸 헌금이 이곳의 재정이다. 잘 드나들지 않는 곳에 헌금함이 한곳 있을 뿐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다.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다. 다음날인 27일 아침 8시부터 남자, 여자가 나눠 노동을 한다. 남자들은 장작을 패고 찬바람이 들지 않게 창문에 비닐을 바르고 여자들은 김장을 준비하려 마늘을 깠다. 예수원에서 1년간 살기로 했다는 어떤 여성 옆에 앉아 마늘을 들었다. 함께 산다는 게 뭐냐고 질문했다. “자격을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이 생활하면서 부대끼면서 오히려 제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판단하고, 재단했어요. ‘저 사람, 예수원에 오래 살았다면서 왜 저런 말을 하지?’ 그런 생각들이죠. 저의 자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자격에 대해 늘 그런 거죠. 그렇게 얽매인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은 불편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흘간 이동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머무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대전화가 없는 시간들은 그 이전보다 결과 질이 풍성해졌다. 느끼고 집중하고 대화하고 침묵하는 정도가 깊어졌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휴대전화를 받고, 걸고, 카카오톡을 보내고 답하고, 문자를 보는 일이 몇 시간인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들을 제하더라도 깨어 있는 시간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리지 않게 본능에 가깝게 간수하는 것은 종일 그것에 마음을 쓴다는 얘기다. 그날 오후가 되자 오전에 일을 한 사람은 쉬어도 된다고 하여 자유시간이 돌아왔다. 예수원 뒤편 산속에 십자가가 있는 야외 기도 장소로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곳이다. 헐벗은 나뭇가지에 달린 마른 잎들, 물기 머금지 않은 건조한 나무들로 채워진 숲이 바람의 연주에 따라 가을 노래를 했다. 바람이 모는 대로 여기서, 저기서, 또 동시에 잎사귀들이 부딪는 소리와 마른나무들이 움직이는 소리 가운데 홀로 있었다. 본능에 대한 역행과 침묵 저녁 종이 울리고 침묵을 하고 밥을 먹고 예배를 보고 하루가 끝난다. 단조롭지만 이를 무기력하거나 심심하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은 하루 288번 울리는 종과 하루 몇 차례 주어지는 대침묵과 소침묵 덕분이다. 대침묵 시간에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눈을 감고, 소침묵 시간에는 작은 소리의 간단한 대화만 가능하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들음이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의 사귐이다. 힐링을 찾는 시대에,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 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 한 소리를 예수원의 종소리가 불러들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28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야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꺼진 휴대전화를 켜니 받지 않은 전화, 문자, 카카오톡들이 쌓여 있다. 홀로 있으려고, 내가 누군지 직면하려고 떠난 거기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거리를 헤매는 자와 남편을 잃은 여자, 죽음 가운데 도망친 난민들이 어려움에서 헤쳐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느라 홀로 있지 못했다. 오히려 본능을 거스르는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내게 돌아오는 바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진정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러했고, 노동시간에 어떤 이들은 빠지고 또 누군가는 참여했는데 사람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려는 마음을 거슬러 지금 이 순간 손과 몸을 움직이며 곁에서 노동하는 이의 말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그랬다. 쉽게 찾아오는 휴대전화 연락들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내 안의 소리를 무시했으나 거기선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마음에 불어오는 소리를 들으려 침묵했다. 사실 우린 아주 깊은 사귐도, 침묵도 하지 못한 채 공동체도, 나홀로 있음도 감당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사귐 없는 침묵은 외롭고 침묵 없는 사귐은 허망하다. 고립되려 들어간 예수원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와 존재들을 깊이 사귀게 되었다. 침묵이라는 길 끝에서 만난 기쁨이며 위로였다. 고통이 헤아려질 때 깊이 침묵하며 내 안의 뿌리로 내려보내 삭혀서 거름으로 만들 때, 슬픔을 먹은 잎은 푸르고 선명하다. 나를 할퀴는 타인들의 슬픔이 아니라 풍요롭게 채워주는 슬픔의 시간, 침묵 그리고 기도. 태백/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지난 26일 어둠이 내린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동 예수원 건물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대천덕 신부의 가르침인 ‘노동이 기도라’는 바위를 지나 예수원에서 처음 마주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안내를 받고 휴대전화를 맡기는 것으로 3일간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진 박유리 기자
말하는 시간도 제한된 곳
하루 288번의 종이 울리면
우리는 침묵으로 들어간다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 모르는 이들과 같은 곳에서
함께 눈 감고, 모르는 이들의
행복을 바라고 간구하면서
알 수 없이 평안해졌다
그곳에서 나를 보았다 휴대전화 없는 시간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들로부터, 의미없는 연락, 책임과 의무 이상의 설명하기 모호한 것들이 요구되는 사회생활, 경쟁과 올라서기와 살아남기로 터질 것 같은 세상으로부터. 일로 만난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도 싶었다. 빈곤, 절망, 체념, 욕망, 빚과 덫, 범죄, 계급, 외로움, 폭력, 트라우마, 소외…. 취재 현장에서 마주한 고통을 곱씹고 곱씹어 삼키는 데 지쳤다. 글을 쓰기 위해, 또는 더 잘 쓰고 싶어서 이런 것들이 도망가지 않게 곁에 붙들어매다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커져버린 감정들에 허우적거렸다. 세상 고통이니 슬픔 따위에서 멀어지려고 3시간10분간 고속버스를 타고, 두어시간 만에 한대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 가방을 메고 15분간 산길을 걸어 통신사 3사 가운데 2곳은 터지지도 않는 태백산맥의 줄기인 덕항산 산골짜기로 왔다. 나를 온전히 만나려고.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눈을 감고,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간구하면서 알 수 없이 평안해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서 나를 보았다. 더 잘 쓰고 싶은 것도 성공과 상승, 명예를 위한 나를 위한 욕망이었다. 명분있고 의미있는 일인들 ‘온전한 이타심’을 가지거나 잠깐이라도 스쳐가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래서 진심을 다한 타인을 위한 기도는 그저 입에서 뱉는 말들이 아니다. 뼛속까지 나밖에 없는 영혼의 바닥을 직면하고 닦아내며 잠시나마 이타심이란 윤기를 내는 일이다. 곧 먼지가 가득할 테지만. 그날 밤에 침묵 기도실에 갔다. 기도를 부탁하는 글이 적힌 공책을 펼쳤다. ‘언니 가정이 위태롭습니다. 형부는 도박중독으로 교도소에 갔고 언니는 술에 자주 취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지 않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참 아프겠구나,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미국 출신의 대천덕 신부는 성미가엘신학원(성공회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65년 12명의 청년들과 이곳에 몇달간 텐트를 치고 살며 예수원을 세웠다. 코이노니아를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성경의 맥락과 상황에 따라 ‘교제’ ‘참여’ 등으로 해석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공동 재정을 기반으로 신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반해 현대의 교회는 점점 개인화되었다. 예배당은 잠깐 들어가 내 곁의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설교를 듣고 빠져나와 각자 사는 독서실이 되었다.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로 역할이 구분되었다. 대천덕 신부는 함께 살아가고 교제하며 기도하는 공동체를 실험하려고 예수원을 만들었다. 지금도 예수원의 사람들은 공동의 시간표를 토대로 함께 일하고 밥을 먹으며 재정을 공유해 살림을 꾸린다. 예수원이 운영하는 목장에서 벌어들인 수익 등과 방문자들이 자발적으로 낸 헌금이 이곳의 재정이다. 잘 드나들지 않는 곳에 헌금함이 한곳 있을 뿐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다.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다. 다음날인 27일 아침 8시부터 남자, 여자가 나눠 노동을 한다. 남자들은 장작을 패고 찬바람이 들지 않게 창문에 비닐을 바르고 여자들은 김장을 준비하려 마늘을 깠다. 예수원에서 1년간 살기로 했다는 어떤 여성 옆에 앉아 마늘을 들었다. 함께 산다는 게 뭐냐고 질문했다. “자격을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이 생활하면서 부대끼면서 오히려 제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판단하고, 재단했어요. ‘저 사람, 예수원에 오래 살았다면서 왜 저런 말을 하지?’ 그런 생각들이죠. 저의 자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자격에 대해 늘 그런 거죠. 그렇게 얽매인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은 불편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흘간 이동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머무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대전화가 없는 시간들은 그 이전보다 결과 질이 풍성해졌다. 느끼고 집중하고 대화하고 침묵하는 정도가 깊어졌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휴대전화를 받고, 걸고, 카카오톡을 보내고 답하고, 문자를 보는 일이 몇 시간인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들을 제하더라도 깨어 있는 시간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리지 않게 본능에 가깝게 간수하는 것은 종일 그것에 마음을 쓴다는 얘기다. 그날 오후가 되자 오전에 일을 한 사람은 쉬어도 된다고 하여 자유시간이 돌아왔다. 예수원 뒤편 산속에 십자가가 있는 야외 기도 장소로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곳이다. 헐벗은 나뭇가지에 달린 마른 잎들, 물기 머금지 않은 건조한 나무들로 채워진 숲이 바람의 연주에 따라 가을 노래를 했다. 바람이 모는 대로 여기서, 저기서, 또 동시에 잎사귀들이 부딪는 소리와 마른나무들이 움직이는 소리 가운데 홀로 있었다. 본능에 대한 역행과 침묵 저녁 종이 울리고 침묵을 하고 밥을 먹고 예배를 보고 하루가 끝난다. 단조롭지만 이를 무기력하거나 심심하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은 하루 288번 울리는 종과 하루 몇 차례 주어지는 대침묵과 소침묵 덕분이다. 대침묵 시간에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눈을 감고, 소침묵 시간에는 작은 소리의 간단한 대화만 가능하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들음이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의 사귐이다. 힐링을 찾는 시대에,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 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 한 소리를 예수원의 종소리가 불러들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28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야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꺼진 휴대전화를 켜니 받지 않은 전화, 문자, 카카오톡들이 쌓여 있다. 홀로 있으려고, 내가 누군지 직면하려고 떠난 거기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거리를 헤매는 자와 남편을 잃은 여자, 죽음 가운데 도망친 난민들이 어려움에서 헤쳐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느라 홀로 있지 못했다. 오히려 본능을 거스르는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내게 돌아오는 바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진정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러했고, 노동시간에 어떤 이들은 빠지고 또 누군가는 참여했는데 사람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려는 마음을 거슬러 지금 이 순간 손과 몸을 움직이며 곁에서 노동하는 이의 말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그랬다. 쉽게 찾아오는 휴대전화 연락들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내 안의 소리를 무시했으나 거기선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마음에 불어오는 소리를 들으려 침묵했다. 사실 우린 아주 깊은 사귐도, 침묵도 하지 못한 채 공동체도, 나홀로 있음도 감당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사귐 없는 침묵은 외롭고 침묵 없는 사귐은 허망하다. 고립되려 들어간 예수원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와 존재들을 깊이 사귀게 되었다. 침묵이라는 길 끝에서 만난 기쁨이며 위로였다. 고통이 헤아려질 때 깊이 침묵하며 내 안의 뿌리로 내려보내 삭혀서 거름으로 만들 때, 슬픔을 먹은 잎은 푸르고 선명하다. 나를 할퀴는 타인들의 슬픔이 아니라 풍요롭게 채워주는 슬픔의 시간, 침묵 그리고 기도. 태백/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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