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치를 운치있게 살려주는 낙엽을 꼭 그때그때 쓸어 없애야 하나 의문을 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물기에 젖은 낙엽은 보행자가 미끄러지기 쉽게 만든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방침은 조금씩 다르지만, 낙엽을 그때그때 청소하는 이유다. 11일 아침 서울 용산구 소월길에서 청소업체 직원들이 떨어진 은행잎을 비질하며 치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소월길의 단풍잎 청소
소월길의 단풍잎 청소
▶ 프랑스 시인 구르몽은 “시몬, 너는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낙엽이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 청소노동자들은 쌓인 낙엽을 치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합니다. 이들은 악취 나는 은행 열매도 견뎌내야 합니다. 낙엽을 치우는 사람들, 그리고 낙엽을 밟으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러 서울 남산의 소월길을 가보았습니다.
나무에게 가을은 작별의 계절이다. 봄과 인사하며 입었던 초록의 털옷을 벗고 벌거벗은 몸뚱이만으로 차가운 계절을 보낼 준비를 한다. 정들었던 나무와 이별을 하는 초록의 옷들은 저마다의 아쉬움을 표정 속에 담는다. 어떤 이는 지난밤 석별의 술잔을 기울인 듯 불콰한 색으로, 어떤 이는 지난밤 뜬눈으로 지새운 듯 샛노랗게 질린 색으로, 산과 들에서 형형색색 이별의 잔치를 벌인다.
행인의 발길에 치이는 낙엽은 전날 이별의 행사를 끝낸 이들의 메마른 주검이다. 밟을 때 스며 나오는 바스락거림은 주검을 부수는 나뭇잎 생의 마지막을 담은 소리다. 모든 생명의 주검이 그렇듯 그것은 다시 토양이 되어 새 생명의 자양분 구실을 할 것이다. 낙엽은 생명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은행나무는 어떻게 번성했나
“아쉽지요. 그래도 몇개월 동안 오가며 인사했던 놈들인데 이렇게 땅에 떨어져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11일 아침 서울 용산구 남산 자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작은 길가에서 청소노동자 김아무개(59)씨가 새벽 5시부터 나와 길에 떨어진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분주했다. 동료 5명이 그와 함께했다. 이들이 비질을 한번씩 할 때마다 길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은행잎들은 잠에서 깬 듯 허공으로 몸을 휙 날리고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솨아악솨아악’거리는 비질 소리와 함께 은행잎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푸른 나뭇잎의 탄생과 늙어 메말라간 낙엽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이들이다. 김씨는 가끔 나무와 대화를 한다. “아마 나무도 속으로 ‘제가 벗어놓은 옷들을 깨끗하게 치워주셔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는 대답하죠. ‘기왕이면 우리 너무 고생시키지 말고 한꺼번에 옷 좀 벗어 내놓으라’고.”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낙엽 탓에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씨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가을은 평범한 사람들을 시인처럼 만든다. 청소일을 하는 김씨이지만 이날만큼은 제법 그의 입에서 시인의 언어가 나온다.
가을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있다. 전국의 산과 들은 붉게 물든 단풍잎과 떨어진 낙엽을 눈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서울 도심에도 낙엽과 단풍을 즐길 수 있는 곳들이 많다.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남산 자락의 소월길도 많은 이들이 찾는 도심 산책로다. 이곳엔 양옆으로 은행나무가 끝없이 심어져 있다. 위로는 남산의 형형색색 단풍과 아래로는 후암동과 서울 시내 전경이 함께 펼쳐져 이래저래 눈이 즐겁다. 트렌치코트라도 입으면 영화 <만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색다른 기분으로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곳 소월길에 쌓이는 낙엽들은 청소노동자들에게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의 대상이다. “굳이 이 낙엽을 치워야 하나요? 놔두면 사람들이 밟고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순진하게 내뱉은 질문에 작업 관리자 황규형(59)씨가 곧장 답변했다. “이곳에는 주로 은행잎들이 많이 떨어져요. 은행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져도 잘게 부서지지 않기 때문에 물기라도 머금으면 지나는 사람들이 밟고 미끄러져 다칠 수 있어요. 은행잎이 배수구에 들어가 쌓이면 상하수도 시설이 막힐 수도 있지요.” 황씨의 말을 듣고 은행잎을 주워 살펴보니 오리발을 닮은 작은 몸뚱이에서 제법 질긴 촉감이 느껴진다. 역시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은 느낌의 차이가 많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세상의 주인이던 2억5천만년 전부터 번성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고 한다. 질긴 생명력 덕분에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 대접을 받기도 한다. 은행(銀杏)은 살구를 닮은 열매에서 흰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생지는 원래 중국 대륙이었으나 불교나 유교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의 사상가 공자가 은행나무 행단(杏壇)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은행나무와 유교는 형제처럼 붙어 다녔다. 우리 선조들이 학문을 배우는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 등에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도 이와 관련 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의 문묘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도 유명하다.
최근 도심에 유독 은행나무가 번성하게 된 것은 은행나무가 병충해에 강하고 도심의 미세먼지 등 공해물질을 흡착해 제거하는 능력이 뛰어나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적으로 심어왔기 때문이다. 은행 열매에는 전분과 단백질이 많고 비타민 A, C도 들어 있다. 도로가의 은행 열매는 중금속에 오염되었을 것이란 걱정도 들지만, 얼마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수거조사 결과를 보면 그리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요즘은 은행이 뿜어내는 악취 탓에 시민들의 민원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은행 열매는 익어가며 ‘빌로볼’이란 독성물질을 발산하는데 초식 공룡들이 열매를 다 먹어치우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나무가 이런 식으로 진화한 것 아닌지 추정한다고 한다.
치워도 치워도 끝없는 낙엽
고된 하루 보내는 청소노동자들
은행잎은 잘게 부서지지 않아
안 치우면 밟고 미끄러질 수도
은행열매 악취에 샤워도 두번씩 지자체마다 낙엽처리방식 달라
그냥 소각해버리거나 퇴비 활용
서울 송파구는 춘천 남이섬에
은행잎을 깔아주기도 하고
정화조에 넣어 모기유충 쫓기도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교체중 용산구청은 수시로 은행잎과 떨어진 은행 열매를 치우고 있다. 소월길은 서울 중구 남창동 51-1번지에서 하얏트 호텔을 거쳐 용산구 한남동 외국인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3.7㎞ 길이의 4차선 도로를 말한다. 시인 김소월의 호를 따다 붙인 이름이다. 낙엽을 밟으면 자연스레 시상이 떠오르기 때문에 시인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일까. 요즘 청소노동자들은 몇시간이면 수북이 쌓이는 낙엽을 치우느라 경조사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분주하다고 한다. 11월 말까지는 떨어진 낙엽들만 부스러지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몸도 부스러질 것처럼 고된 기간이다.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며 청소를 하던 감성적인 김씨도 고된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새벽 4시부터 나왔어요. 오후 4시까지 일해야 하지요. 비질을 하면 어깨를 계속 써야 하니까 요즘은 매일 파스를 붙이고 살아요. 팔목도 시큰거리고.” 은행잎은 다른 낙엽과 달리 바닥에 착 달라붙는 성질이 있어 비질에 잘 쓸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낙엽이 떨어지면 ‘와 낙엽이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와 일감 쏟아진다’라고 말하지요.” 김씨와 그의 동료들은 비질로 모아둔 낙엽들을 직접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몸을 웅크려 두 팔로 낙엽더미를 헤집었다. 돕고 싶은 마음에 다가가자 한 사내가 손사래를 친다. 은행 열매에 독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고 보니 노동자들은 모두 장갑을 끼었다. 고약한 은행 열매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도 청소노동자들은 견뎌내어야 한다. “집에 가서 샤워를 두번은 해야 해요. 그래야 냄새가 사라져요. 손톱 틈 사이에 은행 열매 때라도 묻으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도 일이니까 참고 해야죠.” 비질에 열심이던 김영채(61)씨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그제서야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서울시도 나름대로 은행나무의 악취를 제거하려고 노력중이다. 열매가 떨어지기 전 자치구별로 채취반을 따로 꾸려 조기 수확하기도 하고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한다. 서울시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11만4천그루 정도인데 이 중 암나무가 3만그루 정도다. 은행 열매는 암나무에서만 열리기에 서울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와 버스정류장 인근을 중심으로 은행나무 수종을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단계적으로 교체하고 있다. 과거에는 디엔에이(DNA) 검사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열매가 열리기 전까지는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심기 전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바람이 불었다. 은행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품고 있던 잎들을 허공으로 쏟아내었다. 마치 잘개 쪼갠 은박지 조각을 누군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처럼 소월로는 일순간 거대한 반짝임의 물결에 휩싸였다. “와! 계속 떨어져요!” 후암동에서 선생님을 따라 산책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흥분했다. 낮 12시께 작은 트럭이 나타나 청소노동자들이 파란 쓰레기봉투에 한가득 담아둔 낙엽더미를 수거해갔다. 노동자들은 그제서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수거한 낙엽의 처리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냥 소각해버리기도 하지만 퇴비로 쓰기도 한다. 서울 송파구는 춘천 남이섬에 수거한 은행잎을 깔아주기도 한다. 일부 지자체는 은행잎을 정화조에 넣어 모기 유충을 쫓는 데 쓰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의 가을이란 노동자들이 점심을 먹으러 떠난 사이 소월길과 인근 남산의 산책길은 온전히 시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손을 붙잡고 나온 연인들, 어린아이와 함께 소풍을 나온 가족들, 함께 마실을 나온 동네 주민들. 남산 둘레길 탐방에 나선 주부 고미향(54)씨도 목에 작은 카메라를 걸고 낙엽을 밟고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랑 한달에 한번씩 여기저기 놀러 가거든요. 오늘은 남산을 찾았어요. 어떤 곳은 노랗고 어떤 곳은 붉고 하네요. 가만히 있기보다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색깔의 단풍을 보는 게 좋네요.” 고씨는 이날 찍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딸에게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웠단다. 단풍잎처럼 황갈색으로 물든 잠바를 입은 고씨가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저물어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이 듦이란 무엇일까. 나뭇잎의 색깔을 상투적으로 푸르다고 부르는 것이 과연 맞을까. 세상에는 검은 머리칼만 있는 것이 아니듯 나뭇잎의 색깔도 푸르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낙엽은 왜 저 멀리 날아가지 않고 고작 자기가 붙어 있던 나무의 발아래로 떨어지고 말까. 마치 헤어졌지만 헤어짐을 받아들이기 싫은 연인처럼. 팍팍한 삶에 주름져 살던 뇌에 맑은 가을의 공기가 스며들자 어느덧 철학의 공간이 들어찬다. 발자국마다 감겨오는 낙엽 소리에 닫혀 있던 귀를 열고 운치 있게 말라가는 낙엽을 눈으로 담으며 길을 걷는데 김아무개(65·여)씨가 말을 걸어왔다. “글 쓰는 분이세요?” 수첩을 들고 있는 이를 보고 김씨가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작가는 아니고 기자라고 답하자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 역시 해질녘 낙엽길에서 어떻게 늙어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던 차라고 했다. “가을의 잎들은 물기를 빼내며 생을 다해 가지요. 그래도 그냥 늙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색으로 변해요. 아름답게 늙는 거죠. 저도 나이를 먹고 있는데 아름다운 색으로 늙고 싶어요. 순수한 마음과 영혼도 유지하고 싶고. 그래서 이렇게 산에도 오르고 건강관리를 하려 노력하지요.” 김씨는 이날 낮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고 남산으로 왔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큰 병에 걸린 뒤로부터 꾸준히 산을 찾는다고 한다. 김씨가 걷던 남산 둘레길을 곧이어 두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지나갔다. 그 길을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 흥얼거리며 지나갔다. 이들은 지금 한창 인생의 봄을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의 인생에도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올 것이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의 낙엽들이 쌓여갈 즈음 붉게 물들어 있던 하늘색도 어느덧 어둑어둑해졌다. 남산 자락 소월길의 노오란 은행잎도 까만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고된 하루 보내는 청소노동자들
은행잎은 잘게 부서지지 않아
안 치우면 밟고 미끄러질 수도
은행열매 악취에 샤워도 두번씩 지자체마다 낙엽처리방식 달라
그냥 소각해버리거나 퇴비 활용
서울 송파구는 춘천 남이섬에
은행잎을 깔아주기도 하고
정화조에 넣어 모기유충 쫓기도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교체중 용산구청은 수시로 은행잎과 떨어진 은행 열매를 치우고 있다. 소월길은 서울 중구 남창동 51-1번지에서 하얏트 호텔을 거쳐 용산구 한남동 외국인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3.7㎞ 길이의 4차선 도로를 말한다. 시인 김소월의 호를 따다 붙인 이름이다. 낙엽을 밟으면 자연스레 시상이 떠오르기 때문에 시인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일까. 요즘 청소노동자들은 몇시간이면 수북이 쌓이는 낙엽을 치우느라 경조사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분주하다고 한다. 11월 말까지는 떨어진 낙엽들만 부스러지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몸도 부스러질 것처럼 고된 기간이다.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며 청소를 하던 감성적인 김씨도 고된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새벽 4시부터 나왔어요. 오후 4시까지 일해야 하지요. 비질을 하면 어깨를 계속 써야 하니까 요즘은 매일 파스를 붙이고 살아요. 팔목도 시큰거리고.” 은행잎은 다른 낙엽과 달리 바닥에 착 달라붙는 성질이 있어 비질에 잘 쓸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낙엽이 떨어지면 ‘와 낙엽이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와 일감 쏟아진다’라고 말하지요.” 김씨와 그의 동료들은 비질로 모아둔 낙엽들을 직접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몸을 웅크려 두 팔로 낙엽더미를 헤집었다. 돕고 싶은 마음에 다가가자 한 사내가 손사래를 친다. 은행 열매에 독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고 보니 노동자들은 모두 장갑을 끼었다. 고약한 은행 열매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도 청소노동자들은 견뎌내어야 한다. “집에 가서 샤워를 두번은 해야 해요. 그래야 냄새가 사라져요. 손톱 틈 사이에 은행 열매 때라도 묻으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도 일이니까 참고 해야죠.” 비질에 열심이던 김영채(61)씨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그제서야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서울시도 나름대로 은행나무의 악취를 제거하려고 노력중이다. 열매가 떨어지기 전 자치구별로 채취반을 따로 꾸려 조기 수확하기도 하고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한다. 서울시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11만4천그루 정도인데 이 중 암나무가 3만그루 정도다. 은행 열매는 암나무에서만 열리기에 서울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와 버스정류장 인근을 중심으로 은행나무 수종을 암나무에서 수나무로 단계적으로 교체하고 있다. 과거에는 디엔에이(DNA) 검사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열매가 열리기 전까지는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심기 전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바람이 불었다. 은행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품고 있던 잎들을 허공으로 쏟아내었다. 마치 잘개 쪼갠 은박지 조각을 누군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처럼 소월로는 일순간 거대한 반짝임의 물결에 휩싸였다. “와! 계속 떨어져요!” 후암동에서 선생님을 따라 산책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흥분했다. 낮 12시께 작은 트럭이 나타나 청소노동자들이 파란 쓰레기봉투에 한가득 담아둔 낙엽더미를 수거해갔다. 노동자들은 그제서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수거한 낙엽의 처리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냥 소각해버리기도 하지만 퇴비로 쓰기도 한다. 서울 송파구는 춘천 남이섬에 수거한 은행잎을 깔아주기도 한다. 일부 지자체는 은행잎을 정화조에 넣어 모기 유충을 쫓는 데 쓰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의 가을이란 노동자들이 점심을 먹으러 떠난 사이 소월길과 인근 남산의 산책길은 온전히 시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손을 붙잡고 나온 연인들, 어린아이와 함께 소풍을 나온 가족들, 함께 마실을 나온 동네 주민들. 남산 둘레길 탐방에 나선 주부 고미향(54)씨도 목에 작은 카메라를 걸고 낙엽을 밟고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랑 한달에 한번씩 여기저기 놀러 가거든요. 오늘은 남산을 찾았어요. 어떤 곳은 노랗고 어떤 곳은 붉고 하네요. 가만히 있기보다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색깔의 단풍을 보는 게 좋네요.” 고씨는 이날 찍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딸에게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웠단다. 단풍잎처럼 황갈색으로 물든 잠바를 입은 고씨가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저물어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이 듦이란 무엇일까. 나뭇잎의 색깔을 상투적으로 푸르다고 부르는 것이 과연 맞을까. 세상에는 검은 머리칼만 있는 것이 아니듯 나뭇잎의 색깔도 푸르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낙엽은 왜 저 멀리 날아가지 않고 고작 자기가 붙어 있던 나무의 발아래로 떨어지고 말까. 마치 헤어졌지만 헤어짐을 받아들이기 싫은 연인처럼. 팍팍한 삶에 주름져 살던 뇌에 맑은 가을의 공기가 스며들자 어느덧 철학의 공간이 들어찬다. 발자국마다 감겨오는 낙엽 소리에 닫혀 있던 귀를 열고 운치 있게 말라가는 낙엽을 눈으로 담으며 길을 걷는데 김아무개(65·여)씨가 말을 걸어왔다. “글 쓰는 분이세요?” 수첩을 들고 있는 이를 보고 김씨가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작가는 아니고 기자라고 답하자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 역시 해질녘 낙엽길에서 어떻게 늙어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던 차라고 했다. “가을의 잎들은 물기를 빼내며 생을 다해 가지요. 그래도 그냥 늙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색으로 변해요. 아름답게 늙는 거죠. 저도 나이를 먹고 있는데 아름다운 색으로 늙고 싶어요. 순수한 마음과 영혼도 유지하고 싶고. 그래서 이렇게 산에도 오르고 건강관리를 하려 노력하지요.” 김씨는 이날 낮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고 남산으로 왔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큰 병에 걸린 뒤로부터 꾸준히 산을 찾는다고 한다. 김씨가 걷던 남산 둘레길을 곧이어 두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지나갔다. 그 길을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 흥얼거리며 지나갔다. 이들은 지금 한창 인생의 봄을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의 인생에도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올 것이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의 낙엽들이 쌓여갈 즈음 붉게 물들어 있던 하늘색도 어느덧 어둑어둑해졌다. 남산 자락 소월길의 노오란 은행잎도 까만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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