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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② 경쟁사회가 끔찍해…22살 민아씨 ‘이민프로젝트’

등록 2016-01-03 21:08수정 2016-01-18 10:55

  대학생 김민아씨가 지난 12월2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청 민원여권과에서 기한이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고 있다. 독일 취업이민을 꿈꾸고 있는 그는 이달 말 단기코스 연수를 위해 캐나다로 출국할 예정이다. 김성광 기자 <A href="mailto:flysg2@hani.co.kr">flysg2@hani.co.kr</A>
대학생 김민아씨가 지난 12월2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청 민원여권과에서 기한이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고 있다. 독일 취업이민을 꿈꾸고 있는 그는 이달 말 단기코스 연수를 위해 캐나다로 출국할 예정이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
서울 ㄱ대학 3학년생인 김민아(22)씨는 머지않은 미래에 독일에서 살 꿈을 키우고 있다. 마음만 먹은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세웠다.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에 들어가 6년 이상 일하면 영주권이 나온다. 루프트한자는 첫 2년 계약직을 거친 뒤 독일어 시험을 통과하면 영구계약이 가능하다. 그는 “해마다 한국인을 채용하는 것은 아니어서 4년 뒤쯤 채용 공고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때까지 취업 준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외국 항공사 6년 일하면 영주권
4년 뒤 시험 기다리며 이민스터디
“한국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민 게시판엔 정보글 수두룩
목돈 마련 위해 이민계 만들기도
여성·취준생·진보성향일수록 많아
하지만 빈곤층은 이민 꿈도 못 꿔

이민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그도 대기업 입사 준비에 올인해볼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취업이 되더라도 승진 등 다음 관문을 위해 끝없는 경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끔찍했다. 한국에선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데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을 것이란 것도 고려했다. 민아씨는 “대학 2학년 때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에 나가서 결선에 올랐고 투자받기 직전에 떨어졌는데, 심사받으러 갔다가 머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며 자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도 여기서는 할 수 없는 게 있구나 싶더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로 당장 떠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이미 ‘탈조선’ 상태에 있는 청년들도 많다. 이들 가운데는 이민에 필요한 목돈을 만들기 위한 ‘이민계’를 만들거나 외국어 공부 등을 위한 ‘이민 스터디’를 만드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한다. 직장 초년생일수록 관심이 높다. 헬조선 담론이 유행하면서 지난해 개설된 인터넷 커뮤니티 ‘헬조선’(www.hellkorea.com)의 베스트게시판에도 ‘탈조선’ 코너가 있다. 이곳에선 서로의 탈조선 팁을 공유한다. ‘미국 시민권의 장점’, ‘캐나다 기술이민 하는 법’ 등과 같은 글이 올라오는 식이다. 캐나다 기술이민에 성공한 한 누리꾼은 “정보기술(IT) 업계 중에서도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이른바 ‘3D 끝판왕’이라 불리는 웹 에이전시 분야에서 일했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피로감은 말로 다 설명 못 할 정도였다”며 이민을 떠나게 된 사연을 올렸다. 그는 용접으로 캐나다 기술이민을 가기로 목표를 세운 뒤, 6년여 동안 교육과 실전경험을 쌓아 이민에 성공했다. 캐나다를 선택한 건 교육·의료 등 복지혜택이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민아씨도 이민 준비를 위해 독일어 스터디를 만들었다. 지난해 1월 ‘스펙업’ 등 청년층이 많이 방문하는 웹사이트를 통해 같이 공부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독일 워킹 홀리데이와 기술이민, 독일 유학 등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들이 손을 들었다. 이 스터디에선 어학 공부 말고도 탈조선을 위한 다양한 정보와 토론이 오간다. 한 예로, 지난해 8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난민 수용 정책을 발표한 직후, 스터디에선 격론이 벌어졌다. 독일 난민정책이 본인들의 이민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유리하게 작용할지가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민아씨는 “독일이 난민을 받게 되면 그들도 일자리를 가져야 할 테니까 이민을 고려하는 한국인 입장에선 불리해질 것이란 의견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임금 수준도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말했다.

청년층의 탈조선 심리는 2015년 12월4~15일 <한겨레>와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실시한 20대 청년 215명의 심층 인터뷰 결과에서도 보여졌다. 이번 심층 인터뷰에서 73%는 한국이 살기 힘들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여성일수록(여성 79.2%, 남성 65.2%), 진보 성향일수록(진보 83.4%, 보수 73.3%)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흥미로운 점은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다. 이들은 취업난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학벌·성별 등에 따른 차별, 경쟁·서열 사회,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외국 살이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한 응답자 중 27.2%)이 가장 많았다. 복지제도의 부족(18.0%)과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15.0%), 취업의 어려움(12.6%) 등도 주된 이유로 꼽혔다.

청년들은 심층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해외에 잠깐 살았을 때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대단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더 쉽게 잘 사는 걸 봤다”(취업준비생 ㄱ씨), “(다른 나라에서 살면)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취업준비생 ㄴ씨), “미래 자녀들은 이런 과열경쟁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직장인 ㄷ씨), “길 잃은 정치 때문에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대학생 ㄹ씨)고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꿈’이 가능한 건 아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빈곤층’에 속한다고 답한 이들의 경우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답변이 47.1%로 낮았다. 중상층 이상(81.0%)과 중간층(72.9%), 중하층(75.0%)이 각각 70~80%대를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부모가 빈곤층에 속한다고 한 직장인 ㅁ씨는 “외국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외국에 사는 게 지금 여건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걸 생각하지 않는다”(중하층 가구 대학생 ㅂ씨)는 답변도 나왔다.

조문영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청년들이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해도 사회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무력감을 많이 느낀다”며 “탈조선은 담론만큼 실제 움직이는 현상이 아직 활발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일 수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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