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텅 빈 거기 흰 국화만이

등록 2016-01-15 20:05수정 2016-01-17 14:04

[토요판] 르포2
박유리의 서울, 공간 ⑦ 용산 남일당 터
회색 벽에 꽂힌 국화꽃 너머로 우뚝 솟은 용산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보인다. 지난 13일 오전 10시 용산 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는 철거된 남일당 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참석자들이 벽에 기억과 추모의 꽃을 꽂았다. ‘오줌 금지’ ‘전국 담보 대출’ 낙서와 벽보가 붙은 벽이었다.   김성광 기자 <A href="mailto:flysg2@hani.co.kr">flysg2@hani.co.kr</A>
회색 벽에 꽂힌 국화꽃 너머로 우뚝 솟은 용산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보인다. 지난 13일 오전 10시 용산 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는 철거된 남일당 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참석자들이 벽에 기억과 추모의 꽃을 꽂았다. ‘오줌 금지’ ‘전국 담보 대출’ 낙서와 벽보가 붙은 벽이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폐허가 돼버린 남일당 터의 2016년 1월12~13일과, 죽음과 몰락이 시작된 2009년 1월20일. 7년 전 1월19일 철거민들은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84에 망루를 세웠습니다. 다음날 철거민 가운데 다섯 명과 경찰관 한 명이 불에 타 숨졌습니다. 망루를 세웠던 생존자 다섯 사람이 2016년 1월13일 철거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을 밟으며 말을 합니다. 그 뒤로 기자가 따라 걷습니다. 같은 공간을 뚫고 달리는 시간은 어떻게 변하는 걸까요. 우리들의 말은, 기억은요?

그날 아무도 없었어. 날씨가 영하 9도까지 떨어져 털모자를 써도 살갗이 떨어질 만큼 시렸어. 왕복 8차선 대로 옆으로 벽이 하나 있었어. 희끗희끗한 회색 벽 앞에 홀로 있었어. 울분에 찬 벽이었어. 누군가 송곳 같은 걸로 벽을 그어 날카로운 자국을 남겼어. ‘물에는 물로, 불에는 불로, 피에는 피로’ ‘여기가 무섭지 않으냐’ 누더기가 된 벽보는 갈기갈기 찢어발겨 있었어. ‘여기 람이 있 ㅐ임자를 ㅓ벌하라’ 말 못하는 화난 장애인처럼 ‘으, 어, 으, 어’ 벽이 울부짖었어. 벽에서 찢긴 글자들은 바람에 날렸을지 바닥에 떨어져 행인이 밟았을지 쓰레기처리장에 갔을지 행방을 알 수 없었어. ‘사’ ‘있’ ‘었’ ‘다’ ‘ㅊ’ ‘ㄱ’이었을 흩어진 글자들을 벽보 위로 가만히 올려놓았어. 그 자리로. ‘여기 사람이 있었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가난한 벽이었어. ‘숙박무료 010-9271-91**’ ‘전국 담보 대출’ 명함만한 종이가 덕지덕지 붙은. 붉은 래커 스프레이로 삐뚤빼뚤 글자들이 갈겨 있었어. ‘소변 금지’ 술 취한 남자가 캄캄한 밤 지퍼를 열고 고추를 꺼내 오줌을 찍 갈겨놓았을 벽이었어. 벽 앞에 홀로 있었어. 국방색 바지에 회색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푸른색 안전모를 쓰고 벽 앞으로 걸어나왔지. 흙먼지 가득한 신발이었어. 벽 앞에 있는 건널목 신호등 옆에서 한참 담배를 태웠어. 건조한 연기가 추운 하늘로 올라갔어. 이른 점심시간이었는데 똑같은 복장의 아저씨가 맞은편 건널목을 건너오고 있었어. 입안에 혀를 굴려 이에 낀 찌꺼기들을 빼내고 있었어. 몇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들고 말이야. 꾹 다문 입을 웅얼거리는 아저씨는 가난한 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어. 회색 벽을 지나 자갈처럼 작은 돌멩이들이 깔린 주차장을 지나 저기 붉은 흙이 야트막한 산처럼 쌓인 곳으로 걸어갔어. 나 홀로 주차장에 멈추었어. 온통 사방이 차량인데 겨울 햇빛이 유리창을 때려 반질거렸어.

담배꽁초가 많았고 작은 돌멩이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 주차장 모서리에는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었어. 종이컵들, 검은 운동화 한 짝, 검은 폐타이어. 시든 풀들 사이로 살아 있는 건 몇 마리 비둘기와 참새였어. 비둘기들이 쓰레기 더미 위를 뒤뚱거렸어. 가까이 다가가자 참새들이 날아올랐어. 휙 날아 회색 벽 위에 올라앉았지. 살아 있는 건 비둘기 몇 마리, 참새 몇 마리였어.

여기 사람이 불타 죽은 데였어. 여섯 명이나. 죽음 위에 자동차들이 쉬고 있었어. 내가 디딘 발은 망각 위에 있었어. 죽음 위였어. 죽음 전의 삶들이었어. 말들이었어. 노래였어. 웃음이었어. 걱정이었어. 통곡이었어. 고통이었어. 절규였어. 저기 멀리 붉은 흙산 옆에 모델하우스가 보였어. ‘누가 용산을 대표하는가. 용산, 단 하나의 정상.’ 그 너머엔 수십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번쩍거리며 높이 솟았어. 바벨탑처럼. 나는 죽음을 꾹꾹 밟고 주차장 위를 맴돌았어. 땅은 땅이고 돌멩이는 돌멩이들이었지. 말이 없었어. 2016년 1월12일,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84였어. 남일당 건물 꼭대기에 망루를 짓고 호프집, 복어집, 구두공장 아저씨, 이 동네 아저씨, 다른 철거 동네 아저씨들이 올라갔다가 불에 타 죽은 자리였어. 2009년 1월20일 재개발 지역인 용산4구역에서 남자 다섯명과 경찰관 한 사람이 죽었어. 크레인이 와 2010년 12월1일 남일당 건물을 철거했어. 철근들이 엿가락처럼 부러지고 콘크리트, 유리창이 조각조각 되어 바닥에 떨어졌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아무것도.

여섯 사람이 죽은 남일당
죽음 위에 자동차가 쉬고
살아 있는 건 비둘기와 참새
고개 숙인 건 쓰레기 위 갈대
망각의 땅 솟아난 붉은 흙산

주차장 벽엔 송곳 자국들
‘불에는 불로, 피에는 피로’
글자가 찢어발겨진 벽보들
‘여기 람이 있 ㅐ임자 ㅓ벌’
텅 빈 거기 눈 맞는 흰 국화만이

한강대로 84, 2009년 1월20일

“2009년 1월20일 현장은 전쟁터였다. 검게 그을린 건물 외벽과 창에 위태롭게 매달린 유리 조각들은 참담한 상황을 증언했다. 전경 500여명이 건물을 에워쌌다. 철거민들은 가족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건물 진입을 시도했다. 전경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자 두 명이 울부짖었다. 실신한 여자들은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다. 건물 앞에 흰 국화 80여송이가 놓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오후 4시30분께 현장을 찾았다. 시민들이 야유를 던졌다. 가장 많은 부상자가 옮겨진 용산 중앙대병원 응급실 입구에 농성자와 전국철거민연합 관계자 80여명이 있었다. 차가운 복도에 주저앉았다.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게 허공을 바라봤다. 중상을 입은 이충연(37)씨의 부인 정아무개씨는 농성 현장에서 실종된 시아버지 이상림(71)씨를 애타게 찾았다. 이씨는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한겨레> 2009년 1월21일치)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보내다니…’ 참사로 숨진 한대성(53)씨의 아내는 1월22일 오전 분향소에 도착하자마자 한씨의 영정사진을 두 팔로 부여잡은 채 통곡했다.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은 이날 온종일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유족들은 흰 국화로 둘러싸인 이상림(71) 양회성(56) 이성수(50)씨 등 숨진 이들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 가슴을 치며 쓰러졌다. 분향소 어귀 복도에는 김형오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가 보낸 화환들이 내팽개쳐져 있었다.”(1월23일치)

“참사가 난 지난 20일 밤 사고 현장에 모인 시민 1500명이 거리 행진을 벌이자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섰다.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 돌을 던지자 경찰은 이에 맞서 보호장구가 없는 시위대를 향해 돌을 던졌다. 경찰은 한 여성 시위자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치고 넥타이를 맨 40대 남성을 방패로 찍었다. 참사 현장을 찾은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도 폭행을 당했다.”(1월22일치)

“경찰은 20일 저녁부터 21일 새벽까지 철거민 사망자 5명의 주검이 안치된 서울 용산 순천향병원을 통제했다. 유족들은 병원으로 달려가 항의했지만 상부의 지시라며 주검 확인을 거부했다. 항의가 거세지자 경찰은 21일 새벽 1시께 사망자별로 유족 대표 한 명만 확인하는 조건으로 안치실을 열어줬다. 경찰은 유족들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사망자 부검을 실시했다.”(1월22일치)

“경찰이 지난 20일 용산 철거민 농성을 강제 진압할 때 무장한 용역업체 직원들과 합동 작전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경찰 무전 기록이 나왔다.”(1월24일치)

“박장규 용산구청장이 참사가 일어난 지난 20일 오전 ‘이 사람들 세입자들 아니에요.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개발하는 데마다 돈 내놓으라고 그래서 떼잡이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데모를 해가지고 무슨 사고가 났다 그럽디다’라며 책임을 세입자들에게 떠넘겼다.”(1월24일치)

“서울 용산구청 정문 앞에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내용이 적힌 안내판은 용사 참사가 발생한 20일 고층 건물이 우뚝 올라선 용산 지역의 미래 조감도로 교체됐다.”(1월23일치)

“검찰은 연행자들의 구속영장 청구 전 체포 시한이 임박했기 때문에 영장을 청구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6명 가운데 망루에 남아 있던 3명에게 특수공무방해치사상 혐의 등을, 나머지에게는 화염병처벌법 등을 적용했다.”(1월23일치)

“(지하 7층, 지상 40층짜리 초대형 건물 6개가 들어설) 용산 4구역 재개발지역 조합원들은 1인당 5억4000여만원의 개발이익을 얻은 반면 주거·상가 세입자들은 불과 1680만원·2500만원의 보상금을 받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세입자들은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 등에도 훨씬 못 미치는 보상금을 받고 쫓겨났거나 수천만원의 보상금 차액을 보전하고자 발버둥치다 참변을 당했다.”(1월29일치)

한강대로 84, 2016년 1월13일

‘진,상,규,명,김,석,기,책,임.’ 2016년 1월13일 날씨는 영하 8도로 떨어졌어. 여섯 사람이 죽은 2009년 1월20일은 영하 7도였는데 그때처럼 추웠어. 사람 없던 주차장에 사람 50여명이 모였어. 망루에 올라갔던 다섯 사람도 있었어. 사람들은 한 사람씩 한 글자를 머리 위에 올렸지. “김석기에 ‘기’ 자는 어딨는 거야?” “‘기’ 여기 있네, 여기.” 사람들은 마이크를 들고 황망한 땅에 선 심정을 열거하기 시작했어. 표정이 없었어.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어. 침묵처럼 표정에는 어떤 말이 없었어. 기자들은 많지 않은데 기자회견을 했어. 사방이 공사장이었어. 기계 소리, 철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을 에워쌌어. 말이 들렸어.

아무도 찾지 않던 회색 벽에 사람들이 흰 국화를 꽂았어. 언제 찢겨나갈지 모를 종이를 다시 붙였어. ‘용산역 바로 앞 대우 푸르지오 단지 내 상가 분양. 착한 가격! 중도금 무이자!’ 노란 벽보 위에 흰 종이를 붙였지. ‘김석기가 설 곳은 국회가 아니라 감옥!’ 저 멀리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들이 있었고 맞은편 용산 아이파크몰 건물 꼭대기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어. 오전 10시에 시작된 기자회견이 끝났어. 7년 전 망루에 올라선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갔어.

남일당에 망루를 세웠던 생존자 다섯 사람이 지난 13일 철거가 끝난 뒤 주차장이 된 땅 위에 서 있다. 김성광 기자 <A href="mailto:flysg2@hani.co.kr">flysg2@hani.co.kr</A>
남일당에 망루를 세웠던 생존자 다섯 사람이 지난 13일 철거가 끝난 뒤 주차장이 된 땅 위에 서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출소하고 한참 지나 그때 본 거야. 이 주차장을. 그냥 머리가 하얘. 무슨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이랬어야 했는가. 집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지,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 헷갈리는 거야. 사람을 위한 개발이 아니구나. 정부가 업주야. 은행에 잠자는 돈 돌려야 할 거 아니야. 여기가 이상한 대한민국 축소해놓은 데야. 철거를 하면 하루하루 지나면서 악이라는 게 (생기는데) 나중에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안 밀려나겠다, 나는 너를 이겨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용역하고 싸우지, 경찰하고 싸우지. 싸움을 배우게 돼.”(천주석·53살·2013년 1월31일 출소)

“1990년부터 여기서 구두공장을 했어. 2002년, 2003년에 여기 평당 600만원, 800만원쯤 했어. 2007년, 2008년 개발 투기꾼들이 땅을 사서 1500만원, 늦게 들어온 사람은 2000만원, 3000만원에 들어왔어. 그렇게 투기꾼들이 돈을 벌어갔어. 구두 만드는 곳에.”(김진흥·62살·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여기 왜 주차장인지 알아요? 2010년 11월에 법원이 서울 용산 국제빌딩 4구역 관리처분계획 무효 확인을 했어요. 과거에 조합이 나무도장을 만들어서 조합원 대신에 도장을 찍고 절차를 지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효 되니까 다시 처음부터 재개발 단계를 밟느라 아직 주차장이에요. 우리는 믿을 곳이 없었어요. 망루에 오르기 전이었어요. 길을 가는데, 저기 내 가게가 있는데 용역 30명이 그냥 길을 막고 못 가게 해요. ‘왜 못 가?’ 하니까 돌아가래요. ‘니들이 왜?’ 욕을 하고 신고를 했는데 안 와. 112 번호로 신고해도 안 와서 경찰청에 전화하니 30분 만에 왔었나. 와서 하는 소리가 ‘돌아가면 되지 않냐?’고. 그게 개발지역 현실이에요. 대한민국 법이 있는데 그 법이라는 게 개발지역에서는 철거민들은 그냥 범죄자예요. 개발 자체가 땅을 가진 조합원들의 동의만 받고 진행될 수 있으니까 우리 같은 세입자들이 이주 대책을 요구하면 위법행위가 되고 우리는 범법자가 돼. 우리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아. 또 다른 개발지역인 아현동 아현 4지구에 갔어요. 2008년 여름이었을 거예요. 거기 용역 40, 50명이 저희한테 달려들어서 때려서 한 분은 머리 찢어지고 기절하고 광대뼈 깨지고. 마포경찰서에 고소를 했어요. 서부지검을 가서 수사관 앞에서 용역 셋이랑 대질을 하는데 ‘사장님 잘 계시냐’고 수사관이 용역에게 안부를 물어요. 서초동에 있을 때 같이 조기축구 했다고. 그리고 부부장 검사놈이 부르더니 들어가서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해요. 저희가 이렇게 맞지 않았냐고, 법대로 처벌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 뒤로 아무 통지도 없었어요. 저희가 경찰을 믿고, 검찰을 믿고, 관공서를 믿고(믿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누구를 믿었을까요? 그날 불이 왜 났는지 보려고 남일당 발전기 스위치를 달랬더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갖고 있던 스위치를 분실했대요. 국과수에서?”(이충연·44살·2013년 1월31일 출소)

눈과 국화

다시 회색 벽 앞이었어. 망루에 올라섰던 사람들과 헤어지고 벽으로 돌아왔어. 국화를 보려고. 바닥에 떨어졌는지, 버려졌는지 보려고. 아직 있었어. 차들은 씽씽 달리고 사방에선 집 짓는 소음이 들리는데 회색 벽에 흰 꽃이 피어 있었어. “더는 쫓겨나지 않도록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6시간 전에 기자회견에서 읊은 말들이 허공으로 날아간 자리에 흰 국화꽃이 거기 있었어.

우리들은 자꾸 잊어가. 자꾸 잊혀. 자꾸 잊게 해. 도시는 철근을 뽑아 성형을 하고 못난 것들을 없애. 아무것도 없는 땅이 돼. 기억을 없애. 거기 모든 것들이 사라져. 그리고 집을 지어. 단란한 가족이 들어와 단란한 꿈을 꾸겠지. 들쥐처럼 쫓겨난 사람들과 불에 타 죽은 주검과 불 앞에서 허공만 보던 멍한 눈동자들과 가슴을 치며 혼절한 사람들을 덮은 콘크리트 위에 단란한 꿈이 피어나.

햇빛에 내걸린 우리들의 슬픔은 언젠간 말라가. 빠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뎌져. 마르지 않는 우리들의 슬픔은 없어. 마르지 않은 기억과 슬픔은 햇빛에 걸리지 않은 내 것뿐이야. 내 것들. 저마다의 슬픔들. 우리는, 우리 슬픔이 아닌 내 슬픔을 먹고사는, 그래서 혼자들이야. 우리들의 슬픔은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야.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타인들의 죽음을, 말라가는 슬픔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슬픔을. 그날 오후에 눈이 내렸어. 펑펑 하늘에서 내렸어. 아무도 없는 거기, 국화들이 눈을 맞았어. 하얗게.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땅 꺼지고 주택도 잠겼다…폭우에 전국 900여명 대피 1.

땅 꺼지고 주택도 잠겼다…폭우에 전국 900여명 대피

“36년 봉사에 고발·가압류?…지자체 무책임에 분노” 2.

“36년 봉사에 고발·가압류?…지자체 무책임에 분노”

[현장] “성착취물 떠도는 것 알고 자퇴 고민…꼭 살아 있어 달라” 3.

[현장] “성착취물 떠도는 것 알고 자퇴 고민…꼭 살아 있어 달라”

강남역서 실신한 배우 “끝까지 돌봐주신 시민 두 분께…” 4.

강남역서 실신한 배우 “끝까지 돌봐주신 시민 두 분께…”

“윤 정권, 남은 임기 죽음처럼 길어”…원로 시국선언 5.

“윤 정권, 남은 임기 죽음처럼 길어”…원로 시국선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