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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내일도 스물여덟, 영원히 위대한 서정시의 탄생

등록 2016-03-04 22:10수정 2016-03-06 15:24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특집 / 동주가 돌아왔다
▶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장례가 1945년 3월6일 뒤늦게 치러졌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서거 71주기입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지난 2월24일~3월1일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고,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저예산 영화 <동주>도 조용한 흥행몰이 중입니다. 몰락한 시대, 끝없이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시가 어깨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의 시가 다시 불어오는 것은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탓일까요.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 1942.4.14.-

이름 잃은 사내가 빛 잃은 거리를 서성이다 모퉁이 속으로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랑하는 그림자를 어둠 속에 소리 없이 보내고 뒷골목을 돌아 찾아온 방. 시들어간 귀를 안고 황혼으로 물드는 작은 방에 앉는다. 양처럼 풀포기를 뜯자. 그제야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이름 잃은 사내는 히라누마 도주(25). 시인 윤동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자리한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先科) 1학년 윤동주는 1942년 4월14일 일본인들 사이를 서성이다 돌아와 시를 쓴다. 12일 전 입학한 신입생은 어쩐지 괴롭고 그립다.

태극기 날리는 간도 명동소학교
잃어버린 조국 밖의 조국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나라 잃은 설움에도 꿋꿋했다
몽규와 동주는 문학을 사랑했다

열일곱 몽규가 신춘문예 등단
동주는 시에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몽규는 열여덟에 무장투쟁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동주가 남았다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이 그립다

시 ‘십자가’ 육필 원고.
시 ‘십자가’ 육필 원고.

흐르는 거리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이름을 잃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10일 총독부 제령 19호로 ‘창씨개명’을 공포하고 참여가 저조하자 소설가 이광수 등을 동원해 1940년 8월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린다. 1941년 11월 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에게 제재조치를 공표한다. ‘자녀는 학교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행정기관은 모든 민원 사무 취급을 안 한다.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해 경찰 수첩에 기입해 철저히 사찰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 제출한다.

유학을 결심한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선 일본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닷새 전 그는 한 편 시를 원고지에 적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1942.1.24.-

그가 ‘참회록’을 쓰고 원고지 아랫부분 왼쪽에 끄적거려본다. ‘詩人의 告白’(시인의 고백). 연필이 쉬이 그를 놓지 않는다. 그 아래 적는다. ‘渡航 證明’(도항 증명). 일본으로 떠나는 도항을 증명한다. 시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가 종이 위에 답한다. ‘詩란 不知道’(시란 부지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동주는 1942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일본행 배를 탔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교토제대 사학과에 입학한 송몽규, 릿쿄대 영문학과생 윤동주는 미리 유학와 있는 당숙 윤영춘을 만난다. “나는 둘의 손목을 잡고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를 내 집 뜨락처럼 쏘다녔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 시와 조선이라는 이름은 말버릇처럼 동주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1976년 여름호)

넉넉한 집안의 아들 동주는 대학노트를 끼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어느 밤 바닥에 그려진 낯선 그림자처럼 부끄러움이 그를 길게 따라다닌다. 그런 밤 동주는 잠이 들지 않고 원고지에 자신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밤비가 속살거린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1942.6.3.-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의 탄압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학풍 가운데 공부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새로운 길’)을 잠시 그려보지만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다시 수난의 시간을 맞는다. 1941년 3월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데 이어 이듬해 4월 문학잡지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된다. 윤동주가 존경한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는 1938년 11월 강제 해직됐다가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된다. 연희전문은 이제 수탈된 조국에서 숨을 트는 호흡기가 아니다. 대학 4학년 가을, 시인은 잃어버린 길 위에 섰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1941.9.31.-

꿈은 깨어지고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윤동주는 중국 만주 간도의 명동마을에서 자랐다. 1917년 12월30일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1945년 2월16일 일본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본토를 떠나 타지로 갔다. 만주 간도에서, 경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마을을 고 문익환 목사는 1976년 4월 <월간중앙>에서 이렇게 기억한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어보면, 한국인들은 북간도에서 중국인들에게 행패를 당해 망국민의 설움을 톡톡이 당한 것처럼 되어 있다. 물론 그런 곳도 적지 않았고 그런 사건도 있었다. 명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동에서 이야기된 일이 밖으로 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전 주민이 민족애로 뭉쳐 있었다. (…) 동주와 내가 졸업하던 1931년까지 명동학교는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다. 작문시간에는 어떤 제목이 나오든 조선독립으로 결론을 끌고 가지 않으면 제대로 점수를 못 받았을 정도였다. 망국의 울분을 짓씹으면서도 우리는 조국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었고 땅속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활촉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구 같은 생활도구들이 땅을 가는 보습에 걸려 나왔다. 거기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거기만은 조국이 살아 있었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다녀온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는 1918년 한일병합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명이다.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안중근이 명동마을 뒷산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두 명의 주인공이 출연한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와 윤동주. 둘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함께했다. 시인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달랐지만 그 길 끝은 죽음이었다. 둘은 문학을 사랑했다. 명동소학교 동급생인 시인 김정우의 기억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5학년 때 잡지 <새 명동>을 몇 호 발간했다. 몽규는 동주보다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1934년 12월 은진중학교 3학년, 열일곱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으로 당선된 것. 몽규가 당선된 그해 12월24일부터 동주는 시에 날짜를 기록한다. “동주는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지’라는 말을 가끔했다. 몽규를 의식하는 말이었다.”(고 문익환 목사, 1976년 4월 <월간중앙>)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세 사람은 은진중학교에서 한 명의 은사를 만난다.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명희조 선생. 명희조 선생은 유학 시절 일본인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전차를 타지 않았다. 명희조 선생은 몽규를 눈여겨봤다.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은진중학교는 교실마다 태극기를 걸고 삼일절과 단군 기념일을 지켰다.

“명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으로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기어이 은진중학교를 못 마치고 같은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마치고 연전(연희전문)으로 올라온다. 일본 경찰은 동주보다 몽규를 주목하고 있었으리라.”(문익환)

송몽규는 1935년 4월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난징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으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김구 선생이 반일 민족독립전쟁에 나서려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명희조 선생의 소개였다. 몽규는 신춘문예 당선으로 열린 출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3월에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문익환은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숭실중학교로 먼저 편입했다. 당시 연희전문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불리했다. 송몽규는 중국으로 떠났다.”(김응교, <처럼>, 문학동네, 2016)

윤동주는 문익환보다 늦은 1935년 9월 편입시험을 보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민족애국주의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침략된 조국의 좌절을 처음 맞닥뜨린다. 당시 기독교는 신사 참배파와 반대파로 갈등을 겪었고 1935년 12월4일 숭실중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해산했다.

“학생들은 모두 와카마쓰 신학교 앞에 모였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다음으로 크고 장엄하게 지었다는 평양신궁은 모란봉 산정 부근에 위치했다. 신궁에 올라가기 위해서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이미 참배를 마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숭실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었던 학생장 임인식 형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뒤로돌아’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 이 일로 숭실학교의 조지 S. 매퀸 교장(한국명 윤산온)은 다음해인 1936년 1월20일 파면됐다. 그 며칠 후 2월 초였다. 윤 교장의 파면 소식을 듣고 학생들이 두 명씩 세 명씩 교정에 모여들었다. 새로 학생장이 된 유성복 형의 인솔로 교장을 내놓으라며 데모가 시작됐다. (줄임) 이 일로 인해 숭실학교는 무기 휴교가 되고 나를 포함한 주동 학생들이 피검되었다. 당시 급우였던 애국 시인 윤동주는 광명학교로 옮겨야 했다.”(김두찬,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동아일보> 1982년 8월16일)

열아홉 윤동주는 깊은 겨울밤 불 꺼진 화독을 품에 안았다. 재만 남은 가슴으로, 문풍지 소리에 떠는 가슴으로 시를 쓴다.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 1’, 1936.3.25.-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가슴 3’, 1936.7.24.-

윤동주와 문익환은 1936년 3월 평양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간도의 용정으로 돌아온다. 둘은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된 광명학원 중학부에 입학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들이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회고한다. 한달 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지난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송몽규는 일본 경찰 블랙리스트에 기록된다. 함경북도의 어느 교도소에 투옥된다. ‘이런 날에는/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이런 날’, 1936.6.10)

자유로운 학풍, 연희전문에 입학
곧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암흑의 시기에 오래 침묵한다
시인은 창씨개명계를 내고
‘참회록’ 시로 부끄러워한다

동주는 시집을 출간하려다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후배는 시집을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땅속 항아리에서 기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무서운 시간

1938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는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번갈아 했는데 1940년 두 학년 아래인 정병욱을 기숙사에서 만난다.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하던 1941년 봄, 기숙사를 떠나기로 하고 누상동 마루터기에 있는 하숙방을 구했다. 한 달이 지나고 하숙집 사정으로 떠나야 할 신세가 되어 새 하숙을 구하러 길을 나선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송씨의 부인 조성녀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동주의 시집 제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1941년 5월과 6월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어도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우울한 세태 속에서 환대하는 하숙집 주인 내외분을 만난 기쁨 가운데 시를 쓸 수 있었다. (…) 빈틈없고 알찬 일상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1941.11.5.-

두 사람은 1941년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 소설가 김송씨의 집을 나와 북아현동의 하숙집에 살았다. ‘별 헤는 밤’은 이때 쓰인 시다.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시를 보였다.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윤동주는 정병욱의 말을 듣고 마지막 네 줄을 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현재 시집의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이 마지막 넉 줄을 덧붙인 것이 과연 이 시를 살렸는지 사족이 되게 하였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려니와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존중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동주의 너그러운 아량에 다시금 머리가 수그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정병욱, 위의 책)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은 자필 시고 3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한 부를 본인이 가졌다. 이 시집의 이름은 ‘병원’으로 지으려다 바뀐 것이다.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여서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이양하 선생은 검열에 통과할 수 없다며 출판 보류를 권했다.

윤동주가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 후 반년이 지나 정병욱도 학병으로 끌려갔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시집을 맡기며 “나나 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잘 간수”해 달라고 부탁한다. 혹시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꼭 알려달라는 유언이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전남 광양시 망덕리 집 마루 아래에 흙을 파내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싼 시집을 묻었다. 땅속에 오래도록 묻힌 시집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슬픈 족속

윤동주는 릿쿄대학을 자퇴하고 1942년 10월1일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입학한다. 송몽규와 윤동주의 집은 걸어서 4~5분 거리. 1942년 겨울 윤동주를 만난 당숙 윤영춘의 기억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방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 두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이것이 거의 그날그날의 과제인 모양이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이듬해 여름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된 시기는 송몽규 1943년 7월10일, 윤동주 7월14일. 둘을 포함해 같은 공부 모임에 있던 학생 7명이 체포됐다. 죄명은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체포된 윤동주는 교토경찰서 형사의 지시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판결은 이러하다.

“소무라 무케이(송몽규)와 소화 18년(1943) 4월 중순경 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교쿠 시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초 60번지 시미즈 에이치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에겐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로 교환하며 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하면서 함께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서로 비판하며(…) 위 사람과 찬드라 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대해 논의하고….”

윤동주의 독립운동 혐의가 어느 층위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송몽규와 주도한 것인지, 몽규의 모임에 참석만 한 것인지는.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당숙 윤영춘이 형무소를 찾아갔다.

“죽은 동주는 후에 찾기로 하고 산 사람부터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몽규를 먼저 찾았다. (…)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다. (…) 일본 청년 간수 하나가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운명했다’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윤영춘, 위의 책)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이 옥사했다. 윤동주가 죽은 열흘 뒤인 3월7일 송몽규도 숨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경(일본 경찰)은 이 남의 나라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물었을 테고 동주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고 죽은 것이 아닐까? ‘너는 유태인의 왕이냐?’ 하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맞다’고 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대답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듯 일경도 동주의 말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했을 때 그는 일차원적인 고향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6일에 치러진다. 윤동주는 가장 몰락한 시대에 서정시를 썼다. “서정시는 가장 외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시인 윤동주의 죄는 끝없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기사는 <처럼>(김응교, 문학동네, 2016),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정병욱, 집문당, 1980), <월간중앙>(1976년 4월호)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제목은 윤동주의 시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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