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이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4국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강호의 고수 둘이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간에서 만났다. 서로 그 명성을 들어 온지라 상대방을 잘 아는 터, 칼날의 부딪침이 몇 번 이뤄지고 한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빠르군!’ 그다음 다른 고수의 얼굴이 잡힌다. ‘역시, 강하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장점이 설명된다. 몇 번의 합이 겨뤄지고 이젠 상대방의 약점이 노출된다. 친절한 설명 역시 빠지지 않는다.
‘너는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는군. 그렇다면 나의 비격검법으로 너의 명치를 노리리라.’ 그러면 상대는 서슬 퍼런 칼날 너머 매서운 눈을 부릅뜨고 그보다 한발 앞선 합을 생각한다. ‘마음의 짐을 놓고 그동안 갈고닦은 심심검법으로….’ 이쯤 되면 대결의 막바지다. 천지를 가를 기합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전광석화와 같은 장면이 지나고 서로 등을 지고 있다. 어찌했는지 한 사람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승자는 칼을 거둔다. 그러곤 누구 들으란 건지 설명을 한다. 내가 왜 이겼으며 네가 왜 졌는지를. 패자는 죽어가면서 이야기한다. “으…내가 졌다.”
고수들은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 겨루다가 패하면 내가 왜 졌는지, 결정적인 수는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 한 수가 꼼수가 아니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신의 한 수였다면 깨끗하게 승복한다. 이것이 고수들의 세계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복잡하고 철학적인 게임인 바둑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선과 선이 겹치는 곳에 한 수 한 수 돌을 놓다가 승부가 결정되면 상대방의 돌을 판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졌음을 인정한다. 승자는 기쁨을 잠시 미루고 패자와 판을 정리하면서 복기한다. 결정적인 수는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두었고, 무엇을 잘못 두었는지. 그러면 패자는 자신의 패배와 상대방의 승리를 인정한다. 가히 신의 경지에 들어선 인간의 게임이다. 좁은 판 위의 수는 우주만큼 넓고 그 철학은 바다처럼 깊다.
지난 9일부터 자타공인하는 바둑계의 최강자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다섯 차례에 걸친 바둑 대결이 있었다. 이미 체스나 퀴즈에서 인간에게 승리를 거둔 인공지능이 드디어 바둑에서도 도전장을 내민 순간이라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었다. 예상과 달리 결과는 이 9단의 완패였다. 현대과학이 총동원돼 한 사람의 두뇌와 대결을 했으니 질 수도 있다.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왔을 뿐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복기를 하지 않았다. 이세돌은 내가 왜 졌는지를 알고 싶어했는데, 지고 이겼으면 끝이라는 기계는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하던 대로 승패가 결정난 바둑판에서 안타까운 돌만 매만질 뿐이었다. 돌을 던졌던 패자를 어루만질 수 있는 아량도 예우도 없었다. 패배를 승복하고 싶어도 감정 없는 알파고는 그럴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번 경기에서 가장 안타깝고 마음 아픈 순간이었다.
사진은 3패 뒤 4국에서 불계승을 거둔 이세돌 9단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활짝 웃고 있다. 누구보다 승리를 많이 한 그였지만 세 판을 내리 지고 처음으로 한판 이겼을 뿐일 텐데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이긴 이유도 설명하고 알파고의 능력도 인정하면서 말이다. 마지막 판은 스스로 흑을 쥐고 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알파고가 백으로 더 잘 두기 때문이란다. 모든 것을 계산하는 인공지능으로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마음이다. 한 판을 이기고도 웃을 수 있는 것, 뻔히 불리함을 알고도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것,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위대한 이유다.
윤운식 사진에디터석 뉴스사진팀장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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