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켤레의 신발이 있다. ‘켤레’라고 부르기엔 짝이 맞지 않고 종류도 다르다. 왼쪽은 여학생이 신었던 신발이고, 오른쪽은 남성용으로 추정된다. 왼쪽은 누군가의 신발을 재현한 그림이며, 오른쪽은 누더기처럼 해진 신발의 실제 사진이다. 왼쪽의 주인은 확인됐으나, 오른쪽의 주인은 신원불상이다.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된 왼쪽은 정작 자신의 거처는 특정하지 못했고,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오른쪽은 오히려 눈에 띄어 건져졌다. 왼쪽은 특정인만의 신발이지만, 오른쪽은 자신을 입증하지 못하는 모든 신발(들)이다. 왼쪽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그림으로 남았고, 오른쪽은 발견돼 돌아왔으나 찾아갈 집이 없다. 둘 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에 오른 신발들이다. 왼쪽은 진윤희(단원고 2학년 9반)양의 돌아오지 않은 신발이고, 오른쪽은 발견(2014년 6월25일 지산면 보전리 해상)됐으나 귀가할 집이 없는 신발(진도군 관리번호 515번)이다. 두 짝의 신발이 세월호 2주기를 맞아 ‘어색한 한 켤레’를 이뤘다. 이 이야기는 정처 없는 신발들을 좇은 기록이다. 이것은 부유하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2년째 떠도는 신발처럼 2년이 지나도록 수습되지 않는 세월호의 그날에 관한 이야기다.
▶ 윤희의 2주기가 됐습니다. 참사로 희생된 이들 모두 2주기를 맞았습니다. 2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세월호 안팎과 주변 바다에서 건져 모은 유류품은 진도와 안산에 남았습니다. 유류품엔 주인의 흔적이 남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아이의 흔적이 남은 아이의 물건이 간절합니다. 그 간절함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유류품의 행방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참사의 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빠가 사준 윤희의 새 신발은 지금 어디쯤 가 있을까요.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참사 직후부터 확인된 이동경로를 쫓아 ‘세월호 유류품 분포도’를 그렸다. 가깝게는 객실 안에서부터 멀게는 가거도 남동 30마일 지점과 북쪽 진도대교 아래로까지 해류를 타고 흘렀다. 해경 등은 2014년 4월17일부터 공식 수색 종료일인 같은 해 11월11일까지 인양한 유류품들을 진도군에 넘겼다. 분포도는 인수 순서대로 진도군이 작성한 ‘세월호 유류품 공고대상 현황’(1162묶음 2천여점)을 토대로 했다. 발견 지점이 명시되지 않은 것들은 표시하지 못했다. 모든 유류품의 흐름이 드러나진 않지만 세월호의 눈물 범위를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돌아오지 못한 생명의 파편들’이 울돌목으로 빨려 들어가던 잿빛 새벽을 오직 장군만은 지켜봐주었을 것이다.
남해에서 몰려온 밀물은 293m의 협소한 바닷길을 통과해야 서해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울돌목(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 해협)을 지나면서 물살은 회오리가 되어 휘돌았다. 힘줄 퉁겨 올린 해류가 군내면 앞바다에서 떠돌던 ‘그것들’을 울돌목으로 몰아넣었을지 모른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격파(1597년 명량대첩)한 이순신은 417년 전만큼이나 거친 바다를 굽어보며 다만 동상으로서 말이 없었다.
이석구(58)는 울돌목에 놓인 다리(진도대교) 초입에서 건어물을 판다. ‘그날’ 이후 손님들이 산지를 물어왔다. “맹골수도”라고 답하면 손님들은 손에 든 미역·멸치를 놓고 가게를 나갔다. 304명이 사망·실종한 바다가 출처란 이유로 질 좋은 건어물이 재고로 쌓였다. 가게 밖에서 물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2014년 4월20일 이석구는 다리에 오르지 못해 우는 사람들을 봤다.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청와대로 행진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진도대교 앞에서 경찰이 막았다.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는 그들의 울음에 울돌목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이석구의 마음도 축축해졌다.
‘통곡의 다리’가 된 진도대교에서 두 달 뒤 한 남자가 투신(6월26일)했다. 세월호 가족 지원업무를 맡은 경찰이었다. 승진 누락에 따른 좌절 때문이란 말과 세월호 업무의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이란 이야기가 겹쳐 돌았다. 이석구는 진도대교 위에서 2년에 3명꼴로 생을 버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밀물은 녹진리 해안을 휘돌아 나리방조제(진도군 군내면 나리) 쪽으로 흘렀다. 경찰의 주검은 9일 만에 그물(진도대교에서 나리 방향 5㎞ 지점)에 걸려 어민의 눈에 띄었다. 그물로부터 2㎞ 떨어진 바다에서 해경은 검은색 운동화 한 짝(진도군 관리번호 519번·해경이 인양해 진도군에 인계)을 건졌다. 투신 4일 뒤였고, 발견 5일 전이었다. 세월호 희생자의 신발로 추정됐고, 이튿날 진도군으로 인계됐다. 주검과 신발은 같은 밀물에 실려 울돌목을 통과했을 것이다. 경찰의 신원은 밝혀졌으나, 운동화는 주인을 찾지 못했고, 그의 생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울돌목으로 쓸려 간 운동화 그 잿빛 새벽을 장군만 보았다 주검과 신발은 같은 물에 실려 울돌목을 통과했지만 운동화만 주인을 찾지 못했다
새것을 욕심내지 않던 윤희 부모는 새것을 입히고 들려 수학여행에 보내고 싶었다 윤희가 바다에서 나왔을 때 돌아온 것은 입은 옷뿐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윤희가 2년 동안 신었던 운동화(왼쪽)가 찍힌 사진. 아빠가 사준 새 신발과 색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밑창 닳은 낡은 운동화는 윤희의 사십구재 때 태워져 하늘로 올라갔다. 강재훈 선임기자
새 캐리어에 싼 새 옷
엄마(김순길·50)·아빠(진광영·54)는 딸에게 새 것을 입히고 새 것을 들려 수학여행에 보내고 싶었다. 2014년 4월9일 엄마·아빠는 대형마트 매장에서 캐리어를 샀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딸(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에게 보내 의향을 물었다. 윤희는 아이보리색 아메리칸투어리스터 제품을 택했다.
윤희는 새 것을 욕심내지 않는 딸이었다. 또래들처럼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수학여행 3일 전 엄마·아빠는 윤희를 데리고 가게에 들러 옷을 고르게 했다. 윤희는 바지 두 벌과 반팔 티셔츠, 카디건 하나를 샀다. 그날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이 있을 때 윤희가 가장 많은 옷을 가진 날이 됐다. 새 캐리어에 새 옷을 챙기며 윤희가 짐을 쌌다. 엄마가 지퍼백에 채워준 속옷과 양말, 세면도구를 새 옷 사이에 넣었다. 편히 입을 수 있는 동생 옷 몇 벌도 가져갔다.
4월22일 윤희가 바다에서 나왔을 때 딸의 캐리어는 뭍에 오르지 못했다. 딸의 돌아오지 않는 캐리어가 다시 볼 수 없는 윤희와 겹쳐 부모를 괴롭혔다. 추모공원에 윤희를 두고 온 날(4월25일)부터 마트에 갈 때마다 부모는 캐리어 매장을 피해 다녔다. 윤희에게 사준 제품이 전시돼 있어 쳐다볼 수 없었다. 1년 뒤 둘째가 현장학습을 떠났다. 엄마는 다른 매장을 찾아 다른 브랜드의 캐리어를 샀다.
나리방조제가 시작되는 곳엔 낮은 언덕이 있다. 봄이 오면 나리 주민 이정춘(55)은 언덕 흙을 일궈 호박 모종을 심었다. 3.5㎞의 방조제가 간척지와 바다를 경계 지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이랑을 세운 밭으로 육박해왔다.
진도대교에서 투신한 경찰이 신기리(군내면)에서 발견됐을 때 이정춘은 몇 년 전 바다에서 숨진 나리 어민을 떠올렸다. 그는 썰물에 쓸려 진도 서쪽과 남쪽 해안을 돌아 동쪽 금호도(고군면) 앞바다까지 떠내려갔다. 방조제가 만들어진 뒤 해류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이정춘은 생각했다. 조류의 변화가 무뎌진 방조제 앞과 달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방조제 저편의 유속은 더 빨라졌다.
2014년 7월12일 나리방조제 해안에서 신발 한 켤레(545번)가 인양됐다. 남학생용 흰 운동화가 세탁기로 돌린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밀물에 실려 방조제 앞까지 떠내려왔는지, 진도 남서쪽 해안에서 해류를 타고 북상했는지, 바다에 마모된 운동화만으론 알 수 없었다. 바다의 일을 인간이 단언할 순 없다고 바다에 기대 사는 이정춘은 믿었다.
나리 앞바다에서 신발이 발견되기 석 달 전 세월호 폐회로텔레비전(CCTV)은 윤희의 모습을 기록했다. 4월15일 저녁 7시8분 친구들과 객실로 이동하는 윤희가 영상에 잡혔다. 윤희의 왼손은 휴대전화를 들었고, 오른손은 새로 산 캐리어를 끌었다.
윤희를 앗아간 바다는 윤희의 휴대전화와 캐리어도 삼켰다. 윤희가 구조를 기다리며 무엇을 했는지 엄마·아빠는 알 수 없었다. 같은 반 친구가 찍은 사진으로만 윤희는 ‘마지막’을 보여줬다. 기울기 직전의 객실 안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은 윤희로만, 딸은 그날을 남겼다.
세월호 유품들이 바다 위로 뿌려졌다. 해류에 쓸려 진도 전역으로 흩어졌다. 배는 침몰한 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데 배가 놓친 유품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표류했다. 세월호 부모들은 찾지 못한 유류품들을 “잃어버린 내 자식들의 살점”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살점을 떼어갔는지 바다 외엔 아는 존재가 없다.
벽파리(고군면)에선 검은색 나이키 슬리퍼(541번)가 떠올랐다. 갈색 푸마 운동화(542번)와 남색 에어워크 운동화(543번)도 건져졌다.
벽파는 명량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진도대교(1984년 준공)가 놓이기 전까지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섬사람들의 관문이었다. 다리 건설로 ‘도항 인구’를 빼앗긴 벽파는 항구의 기능을 잃고 적막했다. 오직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의 현장으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벽파리 어부 이양술(67)은 평생 벽파에서 무언가를 건지며 살았다. 12살 때부터 54년간 벽파 바다에서 배를 탔다. 돔, 농어, 전어, 오징어, 간제미 등을 건져 삶을 이었다. 그는 “항구 앞에서 빠져 죽은 처녀, 엄마, 아버지”도 갈퀴에 걸어 건져 냈다. 신발들이 떠다녔을 해안을 바라보며 이양술은 마른 입술을 다셨다. 그는 술을 마신 날이면 항구에 서서 황량한 바다로 눈길을 뿌렸다. “여긴 더 이상 건질 건더기가 없다”며 이양술은 돌아섰다.
벽파항 해안을 따라 남하한 썰물은 고군면 가계해변에 닿는다. 매년 음력 2월 그믐이 되면 달이 바닷물을 당겨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바다(폭 40m에 거리 2.8㎞)를 쪼갠다. 사람이 걸을 땅까지 내주던 진도 바다는 2014년 ‘신비의 바닷길’ 축제(3월30일~4월2일)가 끝난 뒤 2주 만에 세월호를 삼킬 만큼 깊어졌다. 두 달 뒤인 6월15일 하늘색 운동화 한 짝(441번)이 축제의 여운이 남은 해안으로 흘러들었다.
세월호가 소환한 옛 역사
윤희 엄마는 ‘윤희의 흔적’을 갈망했다. “살아 돌아왔다면 아무것도 못 찾아도 괜찮지만” 윤희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윤희가 느껴지는 걸 하나라도 더” 갖고 싶었다.
가족협의회의 ‘팽목항 당직’을 맡아 진도에 내려갔을 때 그는 유품(진도군청 보관)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에게 미안해 그는 마음을 삼켰다. 새로 찾은 유류품들이 진도군 누리집에 올라올 때마다 윤희 물건인지 확인했다. 낱개로 흩어진 유류품은 눈에 잡히지 않았다. 엄마도 머리에 새기지 못했을 만큼 윤희의 짐들은 ‘너무 새 것’이었다. 딸에게 입히고 싶어 사준 새 옷들이 딸을 가렸다.
참사 전날 찍힌 시시티브이 영상에서 윤희는 새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설 때 윤희는 낡은 운동화 대신 새로 산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엄마가 사준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윤희는 2년 넘게 신었다. 딸의 하나뿐인 신발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는 사실을 엄마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수학여행 전에야 아빠가 새 신발을 사왔다. 엄마 몰래 숨겨둔 비상금을 헐어 아빠는 아식스 운동화를 윤희에게 선물했다. 사주는 대로 말없이 쓰던 윤희가 모처럼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엄마·아빠는 캐리어를 살 때처럼 매장의 신발 몇 개를 찍어 윤희에게 전송했다. 아빠가 사온 것보다 수수한 디자인을 윤희는 선택했다. 새 옷을 담은 새 캐리어를 끌고 새 신발을 신은 윤희가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가 윤희를 불러 가슴에 안았다.
윤희가 껴입은 교복 재킷이 엄마는 덥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조끼만 입을 때도 윤희는 재킷을 벗지 않았다. 시시티브이 영상에서도 윤희는 재킷을 입은 채였다. 윤희가 차가운 바다 속에 있었을 때 엄마는 딸이 재킷을 즐겨 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밀물에 휩쓸린 학생용 슬리퍼 한 짝(565번)이 벽파리에 접한 내산리 해안에 닿았다. 성인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등산화 한 짝도 내산리 앞바다에서 나왔다. 예로부터 ‘전란의 섬’ 진도 해안엔 무엇인가 자주 떠밀려왔다.
“원래부터 여그 있었응께 우덜은 그런 줄 알제.”
내산리 내동마을에서 괭이로 밭을 고르던 할머니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가리켰다. ‘왜덕’(倭德)이란 산(山)으로 불렸으나 경사가 완만한 비탈밭에 가까웠다. 밭인지 모를 산에 심긴 것은 채소도 나무도 아닌 무덤이었다.
“옛날엔 여그까지 바다였다제. 왜군 시체가 여그까지 떠밀려왔다니께.”
명량에서 죽어 내산리 해안까지 흘러온 일본 수군을 내동마을 사람들이 건져 산에 묻었다. 2006년 일본군 후손들이 산을 찾아 제를 올리고 마을에 감사를 표했다. 잃어버린 몸과 주인을 알 수 없는 유품들이 바다를 떠돈 역사가 진도에 있었다. 세월호가 역사를 현실로 소환하고 있었다.
신발은 집으로 돌아오기 가장 힘든 유품이었다. 온전히 한 켤레로 떠다니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 짝을 잃고 홀로 발견되거나 발견된 뒤에도 다른 짝과 구별되지 않았다. 학생들 실내화로 쓰였을 슬리퍼들은 같은 상표만 수십 개가 인양됐다. 한 짝만 구조된 운동화·슬리퍼들이 짝 없는 운동화·슬리퍼들과 섞여 ‘슬픈 무더기’를 쌓았다.
딸을 잃은 윤희 엄마는 직장을 그만뒀다. 윤희 아빠는 석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항암치료를 받던 할머니는 윤희를 잃고 병이 악화돼 지난해 3월 윤희 곁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활달하고 친구가 많았던 윤희의 동생은 말수를 잃었다. 윤희를 잃은 뒤에도 가족들은 계속 무언가를 잃고 있었다. 신발이 떠돈 경로는 세월호 가족들이 ‘계속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잃어버린 자식들의 살점” 세월호 유품들은 해류에 쓸려 진도 전역으로 흩어졌다 배는 침몰한 자리에 꼼짝 않는데 배가 놓친 유품들은 표류했다
생전 갖지 못한 윤희의 방으로 올 초에야 돌아온 빈 캐리어 아빠가 사준 새 신발은 아직 수습되지 않는 세월호 진실처럼 정처 없이 2년째 떠돌고 있다
고 진윤희(단원고 2학년 9반)양의 어머니 김순길씨가 경기도 안산 고잔동 집에 새로 꾸민 윤희의 방에서 올해 초 되찾은 윤희의 여행가방(캐리어)을 열어 보이고 있다. 6년째 김씨 가족과 살고 있는 고양이 ‘콩이’가 내내 김씨와 윤희의 가방 주위를 맴돌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년9개월 만에 돌아온 캐리어
배중손(몽고군에 저항한 삼별초 수장)의 동상(임회면 백동리)이 내다보는 바다 저편에 굴포리(임회면)가 있다. 6t짜리 어선 ‘제2만성호’ 선장이 엔진을 걸고 굴포 바다로 출항했다. 그의 배가 방파제 너머로 나아갈 때 귀항하는 어선들이 그의 배와 엇갈렸다.
참사 직후 그도 해경의 요청으로 추자도·독거도 주변을 수색했다. 다른 마을 어부들과 해역을 교대한 뒤엔 굴포 해안을 훑었다. ‘제2만성호’가 찾지 못한 운동화가 2014년 6월12일 굴포 앞바다에서 인양됐다. 관리번호 408번을 받았다. 임회면 바다 위로 544번(7월10일) 신발과 546번(나이키·7월11일) 운동화가 짝 없이 올라왔다. 빨간색 백팩(656번·8월15일)도 그 바다에 있었다.
굴포에서 운동화를 건진 다음날 윤희의 캐리어가 세월호 4층 SP-2 객실에서 발견됐다. SP-2 객실은 2학년 9반 22명이 묵은 다인실 방이었다. SP-1에 자리를 얻지 못한 1반 7명과 10반 21명이 같이 배정됐다. 정원 8명을 초과했다.
SP-2 객실에서 최소 14개의 유류품이 수거됐다. SP-1과 SP-2 객실 사이에도 5개가 갇혀 있었다. 414번 검정 숄더백(트레이닝복 등 2개 물품)은 SP-2 객실에서 윤희 캐리어와 같은 날 나왔다. 선체 수색이 진행되면서 SP-2 객실의 유류품도 잇따라(7월4일→7월7일→7월22일) 진도군에 인계됐다. 교복 치마(533번), 티셔츠(534-4번), 슬리퍼(534-5번) 등 6개 유품이 7월4일 한꺼번에 접수됐다.
이튿날엔 윤희 가방과 동일 상표의 캐리어(536번)가 물 밖으로 나왔다. 19개 품목이 검은 캐리어 안에서 펄에 비벼져 있었다. 성별을 구분하기 쉽지 않은 주인은 회색 반팔 티셔츠 2장, 갈색 트렁크 팬티 1장, 가슴에 보이(BOY)를 새긴 갈색 반팔 티셔츠 1장, 앞면에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가 적힌 자주색 긴팔 티셔츠 1장, 몸통과 팔이 회색과 검은색으로 채색된 반팔 티셔츠 1장, 검은 얼룩이 빠지지 않은 교복 조끼 1장, 갈색 교복치마 1장, 청바지 1장, 트레이닝복 바지 1장, 교복 와이셔츠 1장, 수건 3장, 클렌징폼 1개, 간식으로 먹었을 과자 4봉지를 캐리어에 담았다. 남녀 학생의 물건이 분류 과정에서 섞였을 수도 있었다.
윤희의 캐리어는 6월16일 진도군으로 넘겨졌다. 진도군은 캐리어에 419번을 붙였다. 윤희와 같은 날 발견(4층 선수 좌현)돼 다음 번호(420번)를 받은 검은색 아디다스 가방에선 유리 깨진 손목시계가 나왔다. 바닷물에 부식된 시계는 4월17일 오후 4시39분에 멈춰 있었다. 윤희 부모의 삶도 깨지고 부식돼 그 시간에 정지해 있다. 윤희의 캐리어는 진도군 유류품 컨테이너에 1년7개월간 보관돼 있었다. 윤희의 캐리어가 물 밖으로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를 타고 팽목방조제(지산면 송호리)를 통과하면 지산면 마사마을 선창에 닿는다. 800m 거리에서 팽목항을 마주본다.
조도(진도군 조도면)에서 시집온 김춘분(가명·69)은 마사에서 40년을 살았다. 밭에서 대파를 심고 있던 그날 그의 머리 위로 헬리콥터가 요란하게 날았다. 마사 선창으로 달려가 팽목을 넘겨다봤다. 항구로 죽음이 실려 오고 실려 나갔다. 파도에 묻혀야 할 곡소리가 파도를 뚫고 김춘분의 귀에 꽂혔다. 기석이, 영국이, 영만이, 진영이. 마사마을에서 어선을 가진 4명의 남자가 모두 배를 띄워 수색을 도왔다.
“한성호(1973년 1월 침몰·61명 희생)가 엎어져 까부라진 곳”도 지산면이었다.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1995년 6월)도” 지산면 이웃(가학마을)의 딸이 살아 나오지 못했다. 진도에 살면서 사람 죽는 일을 예사로 봐온 김춘분도 “팽목이 유명나버린 날”이 2주기를 채우자 “오메오메”를 입안에 가두지 못했다.
지산면은 맹골수도(참사 해역)의 해류를 가장 먼저 받았다. 2014년 6월26일 마사 앞바다에서 청바지(493-1)와 신발(493-2)과 상의(493-3)가 발견됐다. 윤희 캐리어가 진도군에 인계되고 열흘 뒤(6월26일)였다. 지산면 보전리 해상에서 찾은 검은 운동화(515번·6월25일)는 누더기가 돼 있었다. 세월호를 삼킨 맹렬한 물살이 신발을 해체하며 지산면으로 몰아붙였는지 모른다. 파도에 찢기고 갉아먹힌 시간의 공포가 신발의 형상에 압축돼 있었다. 너덜너덜한 신발이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사진으로 찍은 듯했다.
세월호의 깜깜한 객실처럼
그 캐리어가 보였다. ‘416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가 진도군에서 인수(지난 1월24일)해온 유류품들을 안산합동분향소 앞에 풀어놓았다. 엄마의 눈에 아이보리색이 들어왔다. 바퀴 이음새마다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윤희 것이길 애타게 바라면서도 윤희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빨리 찾아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엄마는 주저했다.
엄마가 캐리어를 열었을 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거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잠금장치가 해체된 듯했다. 캐리어 밖으로 개흙이 쏟아졌다. 윤희의 옷 대신 도착한 개흙을 털어내며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다. 캐리어에 챙겨간 물건들 중 돌아온 것은 윤희가 물속에서 입고 나온 동생의 옷뿐이었다. 수학여행을 끝내는 데 1년9개월이 걸렸다.
참사 소식에 진도로 내려간 엄마가 4일 만에 돌아와 현관문을 땄다. 윤희가 벗어둔 낡은 운동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밑창 닳은 신발을 끌어안고 엄마는 한참 울었다. 사십구재 때 태워 하늘로 보냈다.
전남 707호가 오가는 조도 해안에서 2014년 7월18일 푸마 운동화 한 짝이 발견됐다. 전남 707호는 조도면이 관리하는 행정선이다. 조도의 36개 유인섬 중 식수가 부족한 16개 섬을 오가며 먹는 물을 공급한다. 참사 당일 이 배는 해경으로부터 이준석 선장과 선원을 인도받아 진도로 실어 날랐다. 지난해 11월엔 세월호 유가족들이 배를 타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선체 실지조사를 지켜봤다.
세월호 4층에서 윤희 캐리어가 인양되기 이틀 전 5층 우현에서 남색 가방(529번) 하나가 구출(2014년 6월11일)됐다. 효자손 1개와 반바지 1장, 작은 약병 하나와 급여통장이 가방에서 나왔다. 물에 젖어 찌그러진 통장에 참사 6일 전 마지막 급여(3월치 370만1700원)가 찍혔다. 통장의 주인은 이준석 선장이었다.
참사 2주기를 맞는 팽목항에서 덤프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진도항 배후지 종합개발사업’으로 항구는 분주했다. 덤프트럭이 내는 엔진소음 사이로 수백 개의 노란 깃발(‘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이 바람에 나부끼며 맹렬하게 퍼덕였다. 윤희 캐리어가 바다에서 올라온 날 팽목항 해양에선 아동용 운동화(417번) 한 짝이 나왔다. 둘은 같은 날 진도군으로 넘겨졌다.
윤희는 수학여행을 떠날 때까지 자기 방이 없었다. 지난해 윤희 부모는 집을 옮기면서 윤희 방을 꾸며줬다. 살았을 때 갖지 못했던 자기만의 방으로 윤희 대신 텅 빈 캐리어만 돌아왔다. 캐리어에 실려 귀가하길 바랐던 윤희의 아식스 운동화는 정처를 알 수 없다. 울돌목을 통과한 519번 운동화처럼 그물에 걸렸을 수도 있다. 545번 신발처럼 간척지 앞바다에 고요히 떠 있을지도 모른다. 541번 슬리퍼처럼 적막한 항구 앞에서 늙은 어부의 눈길을 기다릴 수도 있고, 515번 운동화처럼 해류에 찢기며 지산리 앞바다까지 흘러갔을 수도 있다. 지명이 특정되지 않는 망망한 바다 위를 떠돌거나, 세월호의 깜깜한 객실에 여전히 갇혀 있을 수도 있다. 뭍으로 올라와도 정체를 확인받지 못한 ‘신발 무더기’ 틈에 윤희의 신발도 짝을 잃고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수습되지 않는 세월호의 진실처럼 윤희의 신발도 2년째 떠돌고 있다.
진도/이문영 박기용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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