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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가 다 죽어 없어지길 기다리나”

등록 2016-05-13 20:12수정 2016-05-16 10:24

만령당은 사망한 소록도(전남 고흥군 도양읍) 주민들을 화장한 뒤 안치하는 납골당이다. 만령당 안엔 사망 10년 미만의 유골함이 둥근 벽을 따라 가득 차 있다. 한 해 50~60명씩 발생하는 사망자 유골을 모두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 만령당은 10년이 찬 유골은 매년 한 차례씩 뒤편 산소에 뿌려 합사한다. 봉분은 하나지만 소록도에서 죽어간 수백명의 한 많은 인생들이 깃들어 있다.
만령당은 사망한 소록도(전남 고흥군 도양읍) 주민들을 화장한 뒤 안치하는 납골당이다. 만령당 안엔 사망 10년 미만의 유골함이 둥근 벽을 따라 가득 차 있다. 한 해 50~60명씩 발생하는 사망자 유골을 모두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 만령당은 10년이 찬 유골은 매년 한 차례씩 뒤편 산소에 뿌려 합사한다. 봉분은 하나지만 소록도에서 죽어간 수백명의 한 많은 인생들이 깃들어 있다.
[토요판] 르포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5월17일이면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년이 됩니다. 일주일 전인 5월12일 일본은 1945년 이전 이뤄진 한국인 한센인들 강제격리에 대한 피해보상(590명)을 완료했습니다. 반면 1945년 이후 벌어진 단종·낙태에 대한 법원의 잇단 국가배상 판결에 한국 정부는 항소·상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소록도병원 한 세기’는 축하하기보다 아파해야 할 현재입니다. 누군가를 가두고 유지된 ‘청정 대한민국’이 합당한 책임을 지는 데서부터 ‘기념’은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임씨. 가로×세로×높이 20×20×20㎝의 상자에 있다. 이름은 정행(가명). 한(恨) 위에 한을 쌓고 다시 한을 얹어 한으로 퇴적된 4단 정육면체의 꼭대기에 그는 봉인돼 있다. 뼈 위에 뼈를 쌓고 다시 뼈를 얹어 뼈로 퇴적된 동일 크기의 상자들이 밑에서 그를 받친다.

일제강점기 강제격리 한센인들
일본은 청구인 전원 보상 완료
한국 법원의 국가배상 판결에
박근혜 정부는 항소·상고 반복

소록도병원 100돌 될 동안
섬 거주 원고 38% 세상 떠나
납골당 넘치도록 사망자 속출
“단종·낙태 책임 외면 말라”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많다

지난 1월7일(2016년 첫 사망자 정○○씨)부터 14개(5월4일까지)의 오동나무 상자가 앞뒤 두 줄로 층을 올렸다. 1월에만 7개, 2월 3개, 3월 2개, 4월 1개, 5월 1개의 상자가 ‘발생’하며 차례로 탑을 이뤘다.

상자들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구북리(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소록도 최초의 마을) 화장장 안에 있다. 바다가 몰아붙이는 북풍을 가장 먼저 받는 해안에서 국립소록도병원 ‘원생’으로 삶을 마친 주검들이 하얗게 소각된다. 원생들은 예외 없이 이 화장장에서 육신을 털어내고 뼛가루가 된다.

2006년부터 적게는 37명(2010년)에서 많게는 73명(2008년)이 매년 유골 상자를 쌓았다. 10년간 상자로 들어간 사람(616명)이 앞으로 들어갈 사람(2016년 3월 현재 543명 생존)보다 많아졌다. 소록도에서 사람이 말라버리면 소록도에서 흘린 눈물까지 마를 것이라 기대하는지 죽은 자들은 정부에 묻고 있다.

임정행은 1935년 9월20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나 2016년 5월2일 도양읍 소록도병원 309호에서 죽었다. 마비로 웅크렸던 늙은 몸이 가루가 되어 손바닥 두 뼘도 못 되는 나무상자 안에 욱여넣어졌다. 2011년 10월 제1차 국가배상(단종·낙태) 청구소송의 원고(6차까지 총 539명)였던 그는 2016년 생산된 14번째 유골 상자 안에 있다.

그는 강씨. 1925년 3월6일생. 이름은 한구(가명). 1943년 일본 순사가 소록도로 보내 강제격리(1935년 공포된 조선나예방령)시켰다. 일본이 통치하는 소록도병원은 치료시설과 구금시설의 경계가 없었다. 원생들의 강제노동으로 붉은 벽돌을 찍고 가마니를 짜서 전쟁 물자로 공출해 갔다. 원생들은 벌겋게 달군 인두로 이마에 낙인이 찍히거나, 도망가다 잡혀 감금실에서 두들겨 맞고 죽었다. 소록도병원 앞 오래된 소나무들의 “벗겨진 배때기”는 원생들이 전쟁터에 보낼 송진을 받느라 긁어낸 흉터였다. 그때 모은 송진이 광복 일주일 뒤 벌어진 ‘84인 학살사건’(자치권을 요구한 환자 협상 대표 84명 학살) 때 죽은 이들을 불사르는 연료가 됐다.

일제강점기에 강한구의 왼발과 다리는 대퇴부까지 잘려나갔다. 그가 소록도를 벗어난 건 평생 단 한 차례뿐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 강제격리 피해보상을 청구하러 일본에 갔을 때였다. 한국 변호사들이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도록 돕겠다며 소록도로 찾아왔을 때 그는 믿지 않았다. 자국 피해자들에게 배상(2001년)한 일본이 옛 식민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도록 법을 고쳤을 때(한·일 변호사들과 피해자들의 연대로 2006년 일본 의회 통과)도 설마 했다. 2016년 5월12일 마지막 청구인 9명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면서 일본은 모두 590명의 한국인에게 보상(800만엔씩)하거나 보상을 결정했다. 일본이 “사죄”를 언급했을 때 강한구는 ‘우리 정부’도 그럴 것이라 기대했다. 강제격리는 일본의 짓이었지만 아이의 뿌리를 뽑은 건(1956년께 단종수술) ‘우리나라’였다.

짐승의 시대는 계속됐다

소록도 구북리 해안 화장장 안에 보관된 유골함들. 올해 들어 5월4일까지 사망한 주민 유골 상자만 14개다. 만령당 안치 공간이 부족해 매년 10월15일(위령제)까지는 화장장에 보관된다. 유골함을 받친 수납함엔 생전 주민들의 병든 육신을 지탱해온 쇠붙이들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남았다.
소록도 구북리 해안 화장장 안에 보관된 유골함들. 올해 들어 5월4일까지 사망한 주민 유골 상자만 14개다. 만령당 안치 공간이 부족해 매년 10월15일(위령제)까지는 화장장에 보관된다. 유골함을 받친 수납함엔 생전 주민들의 병든 육신을 지탱해온 쇠붙이들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남았다.
그는 임정행. 한국 정부의 ‘강송’(한센 환자의 뜻과 무관한 강제이송으로 1980년대까지도 시행) 피해자다. 스무 살 때 눈썹이 빠지기 시작했고 스물일곱 살(1962년 6월)에 소록도로 끌려왔다. 녹동항(전남 고흥군 도양읍)과 500m도 안 되는 바닷길이 그에겐 평생 좁혀지지 않는 거리였다. 얼굴에 결절이 생겨 섬에 들어온 김순실(72·가명)과 강송 1년 뒤 혼인했다.

국가가 그들의 사랑에 메스로 개입했다. 일제가 시작한 정책(1936년 남녀 ‘별거제’를 ‘동거제’로 바꾸며 출산 금지)을 한국 정부가 계승했다. ‘독신사’에 살던 원생들이 ‘가정사’에서 합치려면 아이를 포기(2002년 4월에야 소록도병원 운영세칙에서 완전 폐지)해야 했다. 남자는 반드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고, 임신한 여성은 강제 낙태를 당했다. 소록도에서 결혼하려면 수술을 거부할 수 없었고, 수술을 받기 싫으면 소록도를 나가야 했다. 소록도는 고립된 지옥이었지만, 소록도 밖은 개방된 공포였다.

단종·낙태를 해도 가정사가 부족하면 입주 순서를 얻지 못했다. 결혼 3년 동안 독신사 생활을 한 뒤에야 가정사를 받거나, 같이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기도 했다. 가정사 한 칸에 광목천으로 열십자 벽을 쳐 네 가정이 사는 경우도 있었다. 감금실을 개조해 가정사로 쓰기까지 했다. 1963년 1월 임정행도 단종수술을 당했다. 나라가 독립해도 짐승의 시대는 계속됐고, 그들은 짐승의 권리도 가질 수 없었다. ‘번식’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김씨. 임정행의 상자 오른쪽에 있다. 이름은 철규(가명·2차 소송 원고). 임정행보다 일주일 먼저 자리잡고 그의 상자를 맞았다. 1935년 9월5일 나서 2016년 4월25일 갔다. 그는 ‘이중 강송’을 당했다. 1956년 3월 소록도로 강송된 그는 정병숙(가명)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단종을 거부하다 정병숙과 소록도에서 쫓겨나 아들을 낳았다. 구걸로 연명하던 그들은 보건소 직원에게 붙잡혀 두 번째 강송됐다. 보건소는 아들을 떼어내 고아원에 맡겼다. 소록도로 되돌려보내진 김철규는 1974년 4월 단종당했다. “젊은 여자들을 병원 본관에 불러놓고 의자에 앉힌 뒤 의료부장이 애기 가졌냐며 자궁 속에다가 손가락 넣고 휘젓는 짓”(소송 진술서)까지 했다. 고아원을 나간 아들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아들을 산 채로 잃은 고통에서 그는 죽는 날까지 놓여나지 못했다.

일본도 하는 피해보상을 한국 정부는 거부했다. 정부가 일괄배상을 수용하지 않자 변호인들은 단종·낙태 피해자들을 모아 2011년부터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6차 소송까지 539명이 원고로 참여했고 1심 판결이 난 5차례의 소송에서 모두 배상을 인정(단종 3천만원, 낙태 4천만원)받았다. 정부는 항소했다. 3차 판결에서 고등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자 상고했다. 모두 박근혜 정부의 대응이었다. ‘강제수술을 당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치료시설로서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조처’(3차 소송에 대한 상고이유서)란 논리를 댔다.

그들을 가둔 ‘청정한 한 세기’

그도 김씨. 김철규의 상자 바로 아래에서 김철규를 받치고 있다. 이름은 정례(가명·79). 김철규보다 51일 먼저(3월5일) 상자를 쌓았다. 그는 이씨. 김정례 상자의 왼쪽 하단 꼭짓점과 오른쪽 상단 꼭짓점이 맞닿는 유골함의 주인. 이름은 길분(가명·86·2차 소송 원고). 김정례보다 열흘 먼저(2월24일) 상자에 뼛가루를 넣었다.

유골 상자를 받친 수납함 서랍엔 녹슨 쇠붙이들이 쌓여 있었다. 그들의 망가진 몸을 지탱한 뒤 연소되지 않고 세상에 남은 나사와 볼트, 보조 관절 등이었다. 자신의 뼈로 곧추서지 못한 몸의 통증을 뼛가루 묻힌 쇠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잘 있으셨능가?”

장인심(78·2차 소송 원고)이 화장장에 쌓인 오동나무 상자의 이름들을 살피며 한명 한명 인사했다. 그도 낙태를 당했다. 몇 개월 된 태아였는지, 아들이었는지 딸이었는지, 그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소록도의 충성스런 건설대”로 30년 이상 길 닦고 선창 만들며 “꾀도 부릴 줄 몰랐던” 그의 남편도 강제 단종됐다. 당시 낙태된 태아는 포르말린 액체에 넣어 전시됐다. “임신 8개월째 강제 낙태된 이웃의 아이를 간호사들이 포르말린 병에 넣지 못해” 결국 살렸다. 그 아이가 장인심의 마을에서 “귀엽게 자라 육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한정연(가명·사망)은 소록도에서 두 차례 임신했고 두 차례 낙태를 당했다. 임신 6개월 넘어 낙태된 사내아이가 “응애 소리를 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산에 두고”(2013년 생존 당시 진술) 왔다.

박복현(가명·사망)이란 사람이 있었다. 소록도병원 연구원으로 일했다. 의료인이 아닌데 검시실을 맡아 사망 환자들을 해부했고 단종·낙태수술을 도맡아 했다. 임정행도, 한정연도, 장인심도 그가 수술했다. 한국만(가명·사망)은 그에게 두 차례 단종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아내가 임신을 하자 재수술을 당했다. 그의 아내도 박복현이 낙태했다. 그에게 수술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허리 통증으로 평생 괴로워했다. 한국만은 일상생활을 전혀 못한 채 방에서 기어다녔다. 강선봉(77·2차 소송 원고)은 소록도 내 의학강습소(원생들에게 의료기술을 가르쳐 원생들을 치료하도록 한 편법 교육기관) 출신이다. 그도 박복현에게 단종수술을 받은 뒤 그를 도와 원생들의 정관을 잘랐다. “수술대에 누워 있을 땐 삶을 포기하는 심정이었는데 거꾸로 다른 사람을 수술할 땐 길들여진 짐승처럼 ‘이렇게라도 살아야 되는구나’ 싶었다.”

5월17일이면 소록도국립병원 개원(1916년) 100주년이 된다. 29돌까지 일제강점기였고 71년간은 한국 정부의 시간이었다. 29년간이든 71년간이든 소록도는 한센인들을 위한 섬이 아니었다. 그들 아닌 모든 자들을 위한 ‘천(賤)국’이었다. 소록도병원 100돌은 한센인들을 가둔 대한민국이 ‘청정한 한 세기’를 경축하는 날이다.

“우리 정부가 맞나”

한센인 주검은 하루도 이 땅에 머물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검시실 해부대 위에서 헤집어진 뒤 사망 당일 소각된 역사가 오래였다. 사후 24시간이나마 육신을 유지한 세월은 길지 않았다. 뼛가루를 모시는 ‘만령당’(소록도 납골당) 안에 오동나무 상자가 빽빽했다. 만령당이 비좁아 망자들은 화장장 안에서 서로의 유골함을 떠받치며 1년(매년 한 차례 만령당 안치)을 버텨야 한다. 2016년 사망한 임정행, 김철규, 김정례, 이길분은 화장장에 있다. 2016년 전에 죽은 강한구, 한정연, 한국만은 만령당에 있다. 매년 10월15일 위령제 때 화장장 유골함은 만령당으로 옮겨져 10년 된 유골을 밀어낸다. 밀려난 유골들은 뒤쪽 산소에 한꺼번에 뿌려진다. 살아서 ‘한센인’에 빼앗긴 그들의 이름이 죽어선 뼛가루 속에 합쳐져 사라진다.

그들은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기다리다 죽었다. 강한구는 2013년 2월 그의 일생을 변호사에게 진술(2012년 1월 제2차 소송)했다. “내 나이 89살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한 많은 인생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왔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국 정부의) 조속한 보상이 이뤄지길 바란다.” 일본으로부터 사과받고 보상받은 그는 한국 정부로부턴 어떤 사과와 배상도 받지 못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 지 7개월(2013년 9월20일) 만에 그는 오동나무 상자 안에 들었다.

국가배상소송 원고 중 소록도 주민은 86명이다. “식민 지배한 일본도 사과하고 보상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상고까지 할 수 있나. 우리가 다 죽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인가.”(강선봉) 86명 중 33명(38.3%)이 세상을 떠났다.

소록도/글·사진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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