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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상식 어긋난 백남기 사망진단서” 467명의 양심이 응답했다

등록 2016-10-02 18:11수정 2017-06-15 11:40

서울대 의대생 등 이례적 실명성명
“부끄러움과 자괴감 느낀다”

통계청, 대한의협 지침 구체적 살펴보니
직접 사인으로 죽음의 현상 기재하면 안돼
‘외인사’ 표시하면 가해자 지목해야하는 부담감

‘선배님들께 의사의 길을 묻습니다.’

서울대 의대 재학생 102명이 서울대병원이 발급한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지난 30일 실명으로 내놓은 성명의 제목이다. 1일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들이 후배들의 부름에 응답합니다’라는 졸업생 동문 365명의 실명 성명이 이어졌다. 현직 서울대 의대 교수도 이름을 올렸다.

서울대 의대 구성원들이 서울대병원 문제를 두고 외부에 공개성명을 발표한 사례는 거의 없다. 의대는 그 어떤 단과대보다도 위계서열이 강하기도 하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할 학생들과 현직 의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사망진단서 내용이 의문투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백씨의 사망진단서는 기본적인 원칙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병원”에서 배웠다는 자부심에 금이 갔다고 표현했다.

의협, 통계청 지침에도 위배 서울대 의대 재학생 102명은 성명에서 “물대포라는 유발 요인이 없었다면 고 백남기씨는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고인의 죽음은 명백한 외인사에 해당한다”며 “직업적 양심이 침해받은 사안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청한다”고 썼다. 이어 “직접사인으로 ‘심폐정지’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은 국가고시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기본적인 원칙”이라며 “이토록 명백한 오류가 단순한 실수인지, 그렇다면 왜 시정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의 요청에 먼저 응답한 것은 병원이 아닌 동문들이었다. 1일 발표된 동문들의 성명은 일부 서울대 의대 졸업생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초안을 작성해 서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고 백남기씨의 사망진단서는 통계청과 대한의사협회에서 제시한 원칙과 어긋난다”며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해 사망했다면 외인사가 된다”고 썼다.

두 성명서에 나온 통계청과 의협의 지침 내용은 이렇다. 2014년 통계청이 사망 관련 통계의 정확성을 위해 발행한 ’사망진단서 작성안내 책자’엔 △사망 원인은 의학적 인과관계 순으로 직접사인부터 기재 △증상 및 징후만 기재 금지 △구체적인 용어로 기재 △‘사망의 종류’는 선행사인 기준으로 선택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백씨의 사망진단서를 보면, 사망원인에는 네 칸중 위에서 세 칸이 각각 심폐정지, 급성신부전, 급성경막하출혈로 적혀있다. 직접 사인이 ‘심폐정지’라는 것인데, 통계청 책자엔 “호흡정지, 심폐정지, 호흡부전, 심장정지 등 사망에 수반된 현상만 기재하면 안되며, 구체적인 질병명을 사용하라”고 되어 있다. 사망종류는 ‘병사’, ‘외인사’, ‘기타 및 불상’ 가운데 ‘병사’에 표시를 했는데, 책자엔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해 사망했으면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병사’는 질병 외에 다른 외부 요인이 없다고 의학적 판단이 되는 경우만 선택하라고 했다.

의협이 지난해 3월 발간한 ‘진단서 등 작성·교부 지침’에도 비슷한 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데, 서울대병원이 ‘병사’를 쓴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지침엔 “외인사라면 다시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를 살펴야 하는데, 타살이면 가해자 또는 살인자를 찾아 벌해야 한다. 사고사라면 즉 자기 과실이나 천재지변으로 사망한 것이 확실하면 법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과실 때문에 사망하였다면 사정은 달라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병원 쪽이 병사라고 쓰면 더는 기재할 내용이 없지만, 외인사라고 적는다면 가해자나 과실 주체를 지목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는 것이다.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고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 앞에 백남기 농민 대책위 앞으로 전국에서 보내준 응원의 물품들이 놓여있다. 줄에 물품 송장들이 걸려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고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 앞에 백남기 농민 대책위 앞으로 전국에서 보내준 응원의 물품들이 놓여있다. 줄에 물품 송장들이 걸려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은폐·외부개입 의혹, 서울대병원 답해야 사망진단서를 둘러싼 논란은 담당 주치의인 레지던트가 유가족 쪽에 사망 원인 기재 등에 대해 “자신의 권한이 없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백씨의 딸 백도라지씨는 “사망 원인과 병명 등에 대해서 레지던트가 ‘부원장과 지도교수가 협의한 내용대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백씨가 응급실에 왔던 초기 컴퓨터단층촬영(CT·시티) 등 자료를 통해 이미 외인사임이 분명했다는 사실([단독] 백남기씨 응급실 CT영상 ‘외부충격 두개골 골절·뇌출혈’ 판정)이 재확인되며 논란은 커졌다. 병원 쪽의 실수라면 정정을 해야 하고, 고의로 했다면 외인사가 명백한 사안에 대해 은폐 의혹이나 다른 개입은 없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 주치의였다가 지난 5월 서울대병원 원장에 임명된 서창석 원장 등은 사망진단서 작성 경위 등과 관련해 14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다.

서울대 의대 졸업생인 현직 의사들은 백씨의 사망진단서 논란을 보고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졸업생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이준희 서울대병원 임상강사(정신건강의학과·2011년 졸업)는 “서울대병원은 다른 병원들의 기준이 되는 병원이다. 정치적 논란을 떠나 의사로서의 전문성에 비춰볼 때 병원 입장에서도 역사에 남을 일이라면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황승식 인하대 의대 교수(예방의학·2001년 졸업)도 2일 페이스북에 “사망진단서의 철학이 언급되는 시대는 퇴행의 시대”라며 “고 백남기씨 사망 원인 논란이 아무리 증폭돼도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글을 남겼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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