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방 구석에 설치된 캠코더가 증언하는 모습을 내내 녹화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금 내더러 이 사람들헌티 그 야그를 하란 말이가?”
2013년 3월10일 백발의 일본인 교수가 2012년 뒤늦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마친 박숙이 할머니의 단칸방을 찾았을 때, 할머니의 첫마디였다. 그 앞에 정중히 무릎 꿇고 앉은 이는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이다. 그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의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찾아내, ‘업자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일본 정부에 1993년 8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학술적 논거를 마련했다. 여러 차례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요시미 교수는 조용히 기다렸고, 이어 할머니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하얀 종이 위에 위안소 막사를 그린다. “칸막이가 없었다고요?” 통역을 맡은 양징자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 전국행동 공동대표가 다시 물었다. “천을 늘어뜨려 대충 가려도 다 보인다. 그냥 다 트인 공간이야. 거기 처녀들을 모아 놓고….” 증언을 듣던 요시미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개별 공간 구분조차 없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이 워낙 희귀한데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을 데려다 얼마나 반인륜적으로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던 탓이다.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자기 몸의 곳곳을 짚어가며 그때의 아픔과 기억을 정확하게 증언했다. 그렇게 소환한 기억은 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당장 지금의 고통으로 할머니를 압도한다. 침착하게 증언하던 할머니는 순간 요시미 교수를 당시 일본군 장교로 혼동해 그를 향해 고함치고 비명을 지른다.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힘겨운 증언 채집이 끝난 뒤 요시미 교수는 무릎을 꿇고 할머니께 진심으로 사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평정심을 찾은 할머니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쪽 잘못도 아닌데. 내도 알지. 먼 데꺼정 와주어 고맙소.” 그렇게 서로를 향해 두 사람은 맞절을 하며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현재 한국 등 세계 9개국 14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지난 5월31일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위안부 관련 기록물 2744건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유네스코에 신청한 뒤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록물에는 일본군 위안부 실태를 담은 각종 사료와 피해자 증언록, 강제동원 증거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지난해 12월28일 피해자의 의사와 국민 정서를 무시한 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낸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가 민간단체에 의해 추진되어왔던 사안인 만큼 정부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예산 지원을 종료했다.
지난 6일 박숙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 할머니는 떠났으되 그의 삶은 기록으로 남았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할 이들이 그 역사를 제멋대로 덧칠하는 이때, 그 증언과 기록들로 역사의 길을 바로 비추는 것은 다시 남은 이들의 몫이다. 할머니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이정아 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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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겪은 고초를 설명하던 할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격해진 감정을 다독이고 있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박숙이 할머니가 자신이 끌려갔던 위안소의 구조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있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증언 채집이 끝난 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오른쪽)가 무릎을 꿇고 할머니께 사죄했다. 박 할머니가 당신 잘못이 아니라며 미소지어 준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할머니의 단칸방 들머리에 쓰여진 할머니의 손글씨 문패.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할머니의 방 한 가운데에는 장롱을 고쳐 만든 칠성당이 있다. 무슨 기도를 하시냐는 질문에 "매일 아침 나쁜 마음 먹지 않고 사람들에게 좋게 해다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지."라는 답이 돌아왔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7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6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참가자들이 6일 돌아가신 박숙이 할머니의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