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장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1987년, 2008년, 2016년의 광장을 경험한 10대에서 50대 6명에게 물었다. 광장 집단 인터뷰에 참석한 이들의 나이와 경험은 다양하지만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청춘’이었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김응교(54·숙명여대 교수), 김정한(48·출판사 어마마마 대표)씨가 1987년 6월항쟁을, 이연우(24·서울대 국악과), 김기한(32·창업)씨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안영(25·농업), 강지은(18·고교 3학년)씨가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증언했다. 1987년과 2008년 광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되짚다 보니 2016년 광장 그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2008년 촛불때 쓰레기만 줍다 돌아온 기억
-87년 광장과 2008년 광장을 비교하면?
김정한 87년 6월 이전엔 광장이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학내에서 집회해도 전경들이 덮치러 들어왔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 대통합이 이뤄졌듯이,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시민들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
김응교 80년대 초반엔 모이면 잡혀가, 한마디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야 했다. 운동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박종철 사건 이후 시민들이 자동차 경적을 빵빵 울리고, 건물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주며 시위하는 학생을 응원했다.
김기한 2008년에 경험한 광장은 분노와 좌절이었다. 기성세대가 왜 제대로 못 해서 이 지경을 만들었나 원망스럽고 열 받아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더 큰 좌절만 맛봤다. 어른들은 “대학생인데 왜 공부 안 하고 저런 데 나가냐”며 손가락질밖에 안 했다. 집회 참여자들이 쓰레기 버린다고 하도 (언론이) 욕해서 나는 구호 한번 외치지 않고 계속 쓰레기만 줍다 돌아왔다. 욕먹는 게 너무 싫었다.
이연우 2008년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광장에서 실제로 경험했다. 고등학생 때였다. 집회에서 자유발언하고 언론 인터뷰도 했다. 그 후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학생이 그런 얘기 하는 게 맞는지 생각 좀 해봐라.” “그런 데 왜 나가냐, 우리 엄마 아빠가 안 좋게 얘기했다”는 또래 친구도 있었다. ‘아, 내가 앞으로 살면서 자신 있게 내 의견을 말할 땐 트러블이 생기는 걸 감수해야 하는 거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대학에 들어와선 정치 얘기를 안 하게 됐다.
-집회에 나가면 주위 반응이 어떤가?
이연우 (중고등) 학생이 집회에 나가면 학생이 공부해야지, 대학생이 집회를 나가면 대학생이 취업해야지, 네가 운동권도 아니고 시민단체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발언을 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사회구조에 대해 비판하려면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운동권 동아리나 사회대 출신이 아니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 왜 나대냐, 잘 모르고 얘기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안영 너드(nerd·멍청하고 따분한 사람) 같다거나, 한량 같다고 본다.
김기한 2008년 촛불집회 때 <한겨레>에 나왔다. ‘왜곡보도, 발로 뛴 대학생에게 딱 걸려’라는 보도였다. 촛불집회로 문정동 로데오 거리 매출액이 떨어졌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는데 내가 직접 확인해봤다. 원래 비수기이고 광화문이랑 1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라 촛불집회와 전혀 상관없다는 걸 밝혀냈다. 그런데 대학에선 칭찬은커녕 손가락질했다. ‘서울대도 아니고 웬 유별이냐, 너무 튄다’는 거였다.
강지은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광화문 집회에 갔는데 엄청 탄압했다.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신문기사를 짜깁기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알려달라고 뿌렸다. 그때 친구들이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 “너 이러다 잡혀가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집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좀 무섭다는 반응이 많았다. (집회) 갔다가 잡혀가면 어떡하냐고 반대하는 부모님도 엄청 많았다.
`87년 6월 항쟁', `2008년 광우병 촛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 세대들이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에 모여 `광장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를 하기에 앞서 각 세대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맨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근혜-최순실 촛불' 안영(햐얀옷), 강지은씨 `2008년 광우병 촛불'세대인 이연우, 김기한씨 `1987년 6월 항쟁'세대인 김정한, 김응교씨.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빚 때문에 졸업 앞두고 자살하는 학생들
-광장이 왜 위험한 곳이 됐나?
김정한 97년 외환위기가 계기였다. 80년대엔 4년 내내 운동하고 학점이 2점대여도 대기업에 갔다. 그러나 98학번부턴 아버지가 회사에서 잘리거나 망한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왔다. 현실적인 목표가 뚜렷했고 대학 내내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넘어서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고.
김응교 등록금이 엄청나게 비싸져서 대학생들이 4년 내내 아르바이트와 숙제의 노예가 됐다. 대학 다니면 빚이 1000만, 2000만원이 생기는데 갚을 길이 없으니까 대학 졸업할 때 자살하는 친구도 있다. 기성세대가 술자리에서 20대들을 자기중심적이라고, 기회주의자라고 흉보는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안영 아버지 세대의 민주화운동 얘기를 들어보면 어딘가 모르게 벽이 있다고 느꼈다. 로망이 있다고 할까. 지금은 생계와 불확실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는구나 싶다. 그러나 2016년 광장에선 완전히 깨졌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너나 할 것 없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정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친구들 단체 카카오톡 방이 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의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 얘기하면 친구들이 몰려들어요”
-2016년엔 달라졌나?
강지은 우리 반에서도 이제 정치 얘기를 시작하면 친구들이 몰려서 얘기 많이 한다. 세월호 때는 엄청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조용해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엔 다들 엄청 관심을 갖고 있더라.
김기한 지금은 다 같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나. 반면 2008년엔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랑 이명박을 비판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갈라져 있었다. 내 또래도 그랬다.
이연우 이제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고등학교 때 가졌던 문제의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어떤 계기로든 한 번이라도 사회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낼 기회가 생기면 그걸 잃지 않는 것 같다.
김응교 (광장에서) 전경의 태도가 바뀌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니들과 같이 서 있는데 밤 10시30분이 되니까 전경이 그러더라. “뒤에서 밀라고 해요. 어머니 다쳐요, 조금만 빠져주세요.” 뒤에선 계속 “밀어” “밀어” 하는 지시가 들리는데 전경들이 그냥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병장(수경) 같았다. 그렇게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나만의 민주주의를 계속 해야죠”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지은 촛불 이후에 교육감을 내 손으로 뽑고 싶다. 교육감 선거를 하면서 내 한 표가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알고 싶다.
안영 언론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껏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권력과 힘에 흔들리지 않는, 공신력이 있는 언론이 많아지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국민이 지금처럼 표현해 (언론에) 국민 무서운 걸 알려야 한다. 나부터 계속 (광장에) 나갈 것이다.
이연우 (시민적) 감도라고 해야 하나. 2016년 광장은 무뎌져 가던 나의 감도를 일깨우는 좋은 집회였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국악 전공자로 일하면서 나만의 민주주의를 계속 생각할 것이다.
김기한 직접민주주의를 더 활성화해야 한다. 광장 촛불도 중요했지만, 국회의원에게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고 18원 후원금을 내는 것도 국회의 탄핵 가결에 한몫했다. 인터넷을 활용한 국민투표도 이제 가능하다고 본다.
김정한 최근 국정조사에서 재벌들이 쫙 나온 걸 보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보수 연합의 중심은 누구인가 생각했다. 자본인 듯하다. 재벌이 돈 주고 정치인을 에이전시로 부리는 거 아닌가. 법인세 인상을 막는 것은 보수 정치인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자본이 있는 거 아닌가. 자본의 힘을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김응교 2016년엔 정권교체가 아니라 ‘시대교체’가 목적이 돼야 한다. 촛불이 광화문 광장에서 벗어나 일상과 동네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어떤 정치인이 나와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꿈꾸는 자유로운 ‘단독자’를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10여년 전 한 집회에서, 남양주에서 막일을 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옷 안쪽에 품고 온 양초를 나눠주면서 평생 잊지 못할 한마디를 했다. “프랑스 혁명도 100년이 걸렸대요.” 더듬더듬하던 그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