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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촛불은 묻는다, 우린 박정희와 이별할 수 있는가

등록 2017-01-01 23:20수정 2017-01-03 10:13

[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
2017년은 6월항쟁 30주년이자
박정희 탄생 100주년 맞는 해
강남 땅투기·노동 탄압·지역주의
헬조선의 시원은 ‘박정희 시대’

2017년은 6월항쟁 30주년이자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두 사건의 중첩은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헬조선의 비틀린 시원을 찾아 나선 여정은 박정희라는 아이콘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6월항쟁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87년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체제였다. 재벌이 성장하고 정경유착이 시작됐으며, 땅 투기가 처음 생기고 새로운 계급, 격차가 발생했다. 반공주의와 노동 배제, 지역 차별이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 원칙과 상식은 무너지고, 법치의 이름으로 불법이 정당화됐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 박정희를 만난다. 우리는 박정희들인가. 그림 강영민 작가
2017년은 6월항쟁 30주년이자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두 사건의 중첩은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헬조선의 비틀린 시원을 찾아 나선 여정은 박정희라는 아이콘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6월항쟁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87년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체제였다. 재벌이 성장하고 정경유착이 시작됐으며, 땅 투기가 처음 생기고 새로운 계급, 격차가 발생했다. 반공주의와 노동 배제, 지역 차별이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 원칙과 상식은 무너지고, 법치의 이름으로 불법이 정당화됐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 박정희를 만난다. 우리는 박정희들인가. 그림 강영민 작가

“박정희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거잖아.”

“솔직히 87년 6월항쟁은 진짜 가끔 교과서에서만 잠깐잠깐 보는 거지.”

“어떤 의미에서는 6월항쟁이 더 의미가 컸다고 생각해요. 카톡에서 대통령 욕할 수 있는 건, 민주화가 돼서 그런거 아닌가.”

지난해 12월3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 20대 네 명이 마주 앉았다. 촛불, 광장, 민주주의를 한 바퀴 돈 그들의 얘기는 박정희라는 유령에 멈추었다. 역사상 가장 비싼 등록금을 내며, 대학 졸업과 함께 대출을 짊어지고 사회에 진출하는 20대는, 박정희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박정희를 ‘느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대학생은 박정희 관련 책을 탐독한다고 말했다.

#1971년, 강남

모두의 꿈이 건물주가 된 나라, 부서질 청춘의 꿈조차 콘크리트 건물인 나라. 가장 값비싼 땅 위로 값비싼 건물이 우뚝 서고, 부유와 풍요와 욕망이 넘실대는 서울 강남의 조물주는 박정희다. 제3한강교(한남대교) 남단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낮은 언덕들이 흩어져 있기는 했으나 끝이 보이지 않을 거대한 들판이 보였다. 지금의 강남이다. 1966년 12월28일 서울시와 건설부는 이 들판을 토지구획정리사업 예정지로 지정한다. 현대건설 사보 <현대> 1967년 9월호를 보면, 제3한강교 교량 공사 전에 한 평에 200원도 안 되던 압구정, 신사, 잠원 땅값이 공사 착공과 함께 치솟아 착공 1년 만에 평당 3000원이 됐다. 제3한강교 건설 이전에, 양도 차익을 남긴다는 의미의 토지 투기는 없었다.

제3한강교가 준공된 1969년. 이듬해인 1970년 5월 한 남자가 도시계획과장에서 국장으로 승진한다. 영동, 지금의 강남 개발 실무자로 들판을 밀고 산을 깎아 개발의 초석을 마련한 윤아무개(83)씨다. 그에겐 1995년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청와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 땅 투기에 나선 일이다. 그를 만나러 지난 12월12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으로 향했다. 제과점 파리바게뜨 문을 열고 들어선 노인은 검은 서류 가방에서 노트를 한 권 꺼냈다. 강남을 개발할 당시 일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여기까지 밀려나 비참하지요.”

윤씨는 자신이 지금 사는 용인을, ‘밀려난’ 곳으로 표현했다. 땅은 사람을 밀어내고 움직이는 생물이며 존재인가. 그가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1995년. 자신의 후임 국장이자, 훗날 서울시립대 교수가 된 고 손정목씨에게 청와대 대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 땅 투기를 했다며 거래 내역이 적힌 문건을 전한다.

1970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일개 과장이던 그를 차에 태워 용산 육군 헬기장으로 데려갔다. 헬리콥터는 과천, 사당, 서초, 양재, 압구정, 내곡동, 송파에 이르는 땅을 둘러본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시장은 윤 과장을 태우고서 한남동 유엔 빌리지로 향했다. 당시 실세였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집이다. 박 실장은 둘러본 땅 중 어디가 가장 유망할 것 같냐고 물었다. 박 실장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쪽 땅(지금의 강남)을 사 모으지.”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 모으고 땅값이 상승하면 되팔아서 갖다 바치면 되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높은 분 한둘과 서울시장, 당신만 아는 비밀일세.”

여든셋 노인 윤씨는 가끔 버스를 타고 강남에 나간다. 1971~72년 허허벌판을 사들이고, 팔고, 개발할 당시의 젊음이 깃든 땅이다. 지금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좌절의 땅이다. “내가, 영동(강남)을, 100평이라도 사야 했었던 건데 정치자금하고 관계 때문에 내 땅을 한 평도…. 지금 그 땅을 볼 때 심정이….”

윤 국장의 강남 투기는 72년 6월에 끝났다. 2016년, 그는 “비참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비참하게 하는가.

“박정희는 자신이 성취한 놀라운 성공으로 국가주의적 출세 욕망을 선동했지만 대중은 박정희의 욕망보다, 그의 출세를 욕망했다. 대중은 박정희의 말보다, 그의 삶에 매료당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스스로도 부정하고 싶었던, 박정희들이 양산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박정희와 근대적 출세 욕망>, 역사비평 2009년 겨울호, 황병주)

승용차가 흔하지 않던 시대, 사람들은 새벽에 집을 나와 걷고 걸어 말죽거리로 향했다.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수록 땅값은 500원, 1000원씩 뛰었다.

정부는 1973년 말부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재산세를 중과하겠다고 밝힌다. 그조차도 주거용 토지에 대해서는 세율이 낮았고, 토지의 범위가 극히 한정적이었다. 한국감정원 발표를 보면, 1963~77년 서울시 전역의 지가는 87배 수준으로 크게 상승했고, 강남 지가는 176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1972년, 계엄

역사상 최초의 투기가 잉태되던 때,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숨을 죽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강력한 도전을 가까스로 누르고 박정희는 3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기존의 44석에서 2배를 뛰어넘는 89석을 확보했다. 누적된 외채와 만성화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성장률은 1969년 13.8%에서 1970년 7.6%, 1971년 9.4%, 1972년 5.8%로 떨어졌다.

박정희는 1972년 11월 계엄령을 내렸다.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로 통과된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입법·행정·사법의 삼부 위에 군림하는 국가적 영도자로 모셨다.

유신헌법이 통과되기 5개월 전인, 1972년 6월. 청와대 사정특보인 홍종철이 동훈 비서관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에게 금융기관 편중대출 상황 보고를 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1년 전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나는 참 무서웠어. 군중이 혼란을 일으키면 결국 무력을 동원해야 진정이 되어요. 내가 4·19 때 부산계엄사무소장이었는데 그런 꼴을 보았어요. 내가 정복을 입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진정을 시켰어요. 만약 그 장충동에 북괴가 모략전을 펴서 경찰관 복장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해 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고.”(<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조갑제, 기파랑) 박정희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군중을 두려워했다.

2016년 겨울, 민중이 촛불을 들고 청와대를 감쌌다. 매주 토요일이면 한 남자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간다. 정화영(68)씨다.

광장에서 1975년 4월9일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 3시, 스물여섯살 정화영은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향해 달리는 호송 버스 안에 있었다. 구속집행 정지 상태로 출감한 뒤 재판을 받다가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재집행을 위해 끌려가는 중이었다. 버스 안에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경북대 선배 여정남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듣게 된다. 42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의 전율이 생생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캄캄해지는 절망감과 두려움에 온몸이 굳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1주일간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당한다. 여정남을 모르냐는 고문에 끝까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여정남을 부인함으로 죽지 않았다. 정씨는 좁고 어두운 감옥을 매일 밤 걸어나가 “마음으로 박정희를 죽였다”고 말했다. 1975년 출소한 정화영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이듬해 다시 투옥돼 1981년 출소했다.

#1961년, 쿠데타, 삼성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1년 5월16일 새벽 남산 케이비에스(KBS) 방송국에 도착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아나운서와 방송 기술자들을 찾아다녔다. 주조정실에 불이 켜졌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쿠데타가 성공했음을 알리는 글을 읽기 시작한다. 대한민국과 박정희의 만남이 성사된 날이다.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은 1961년 6월27일, 박정희를 만나 나눈 대화를 회고록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 구금돼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 박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 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박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박정희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을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풀어주지. 이제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호암자전>, 이병철)

삼성 최초의 노조인 제일모직 노조 설립을 주도한 고 나경일씨는 생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남긴 구술록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근데 이병철이는 그때 인자 고거(제일모직 노조) 시작할 무렵에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일본까지 와 있었어요. 미국에서 일본에 건너와 갖고 국내 정세 전망하고 있었다고. 위에서, 동경에서 어떤 지시가 내려오냐 하면은 ‘안 돼. 내가 죽어도 그런 건 못 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경영하는 기업에 절대로 노동조합 구성 이런 거 할 수 없어.’ 그래 우예 하겠어, 왕인데 왕의 명령이 그렇게 떨어졌는데 저희가 뭐 왕의 명령을 거스르면 지 목이 달아나는데.”

나경일은 1960년 12월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노동 탄압은 한 기업의 문화를 넘어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나경일로 시작된 노동자는 산재로 백혈병을 앓다 숨지고도 4년이 지나서야 산재가 인정된 황유미씨, 에어컨 실외기를 달다 추락사한 삼성전자서비스센터의 파견 노동자로 이어졌다.

1961년 어떤 부류의 국민은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그해 11월14일 창설된 개척단원들이다. 부랑인이라 불리던 집 없는 사람, 주먹깨나 쓰는 깡패, 국가가 불량하다고 정의한 이들은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모집돼 전국 간척지나 개척지로 흩뿌려졌다. 전두환이 만든 삼청교육대의 전신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께, 영화 보면 포로들 잡아서 머리 뒤에다 손을 올리잖아? 그렇게 해서 내려. 머리를 든다든가 손을 내렸다가는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이라고 쓰인 야구 빠따로 삭 조져대는 거여. 그거 한 대씩 맞으면 팍팍 소리 나면서 머리가 팽팽 돌아. 그게 ‘사회정화사업’이나 똑같은 거여. 박정희 대통령이 무슨 본보기를 보인다는 게 우리들같이 만만한 놈들한테 보여준 거야.”(<5·16군정기 사회정책-아동복지와 부랑아 대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011년 12월, 김아람)

#2017년, 대한민국

욕망이라는 초고속 성장 전차를 탄 대한민국은 2016년 가을,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헬조선’에 종착했다. 출석을 하지 않고도 학점을 챙기고, 든든한 뒷배가 있으면 교수가 학생의 과제를 대신하는 나라. 국민 304명이 수장당한 시간에 대통령은 강남에서 청와대로 미용사를 불러 올림머리를 하고 여전히 7시간 동안 무얼 했는지는 사생활에 부치는 나라. 대통령이 대기업을 압박해 수백억을 강탈해 문화·체육재단을 세우는 나라.

1979년 10월26일, 박정희는 선혈을 콸콸 흘리는 비극적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유령이 됐다. 유신헌법의 초안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촛불 강이 흐르는 광화문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2월1일 백아무개씨의 방화로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에 불이 나 추모관을 모두 태웠다. 지난해 11월13일 경북 구미시에선 이틀간 박정희 전 대통령 99주기 탄신제가 열렸다. 우리는 죽은 박정희를, 살아 있는 박정희들을 매일 마주한다. 광장을 수놓은 수백만 촛불이 묻는다. 우리는 박정희와 이별할 수 있는가.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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