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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웁스구라]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나?

등록 2017-01-06 23:24수정 2017-01-08 10:37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마련된 민족중흥관을 찾은 시민들이 돔영상실에서 아시아 최초 하이퍼돔 시스템과 실사로 만든 박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구미/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 마련된 민족중흥관을 찾은 시민들이 돔영상실에서 아시아 최초 하이퍼돔 시스템과 실사로 만든 박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구미/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유신시대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대부분 줄줄 외우고 있을 이 문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대통령령으로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의 도입 부분이다.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한 20여년 동안 박정희 정권이 국민 전체의 머릿속을 개조하려 했던 역점사업의 하나였기에 교과서는 물론 어지간한 참고서 첫머리엔 어김없이 이 헌장이 인쇄돼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학생들에게 외우게 했던 것은 당연한 일. 1970년대에 학교 다닐 때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워서 선생님에게 혼난 학생들도 꽤 많았다. 그런데 난 40년이 지난 지금도 외우는 저 문장의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거의 외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위의 문장이 전체 문장의 4분의 1이나 될 정도로 긴 것도 있지만 선생님이 한 사람씩 불러서 외워 보라고 시킨 다음, 딱 저만큼의 문장만 거침없이 외우면 ‘통과’를 외치면서 합격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걸 외우라고 시킨 정부에 대한 선생님의 소심한 저항? 아님 귀차니즘? 난 전자라고 믿고 싶다.

기획팀장을 하는 후배 기자가 전국에 있는 박정희 우상화의 현장을 짚어보자는 아이템을 냈다. 처음 생각으로는 생가와 서울 신당동 주거지 말고 뭐 있겠나 싶어 시큰둥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전국 곳곳에 그를 우상화시킨 흔적은 생각보다 많았다. 생가는 물론이고 그가 3년간 하숙했던 곳, 군대를 전역한 곳, 설립 인가증에 도장을 찍은 학교 앞마당, 50년 전 단 하루 방문한 야산까지 어김없이 동상이 서고 표지석이 들어섰다. 지역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가리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털끝만큼의 끈만 닿는다면 갖가지 구실로 뭐든 만들어 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꼬여대는 호객꾼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방문객이 거의 없어 유지비만 잡아먹는 세금 공룡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또 866억원이 들어가는 테마공원을 짓는 곳도 있었다. 어린 시절 등굣길에 세워진 동상은 일본의 어떤 동상과 표절 시비까지 일었으니 이쯤 되면 막장 코미디다.

사진은 경북 구미시 생가에 자리잡은 민족중흥관의 대형 돔에 홀로그램으로 상영되는 박정희의 영상이다. 돔 스크린의 지름이 15m이고 높이는 10m에 이른다. 어지간한 광각렌즈로는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동양 최초의 하이퍼돔 시스템이라는 자랑질도 빠지지 않는다. 몇몇 방문객이 자리에 앉아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올려다보고 있다. 천장에 만들었으니 내려다볼 수 있나? 실사 같은 영상과 찬란한 업적이 현란하게 버무려져 모두 넋을 놓게 만들었다.

국민 전체의 머릿속을 하나의 논리구조로 통일시켜 어디서든 옆구리만 쿡 찔러도 좔좔 읊어댈 수 있게 만든 그 양반은 자신의 오른팔이 쏜 총탄에 사라졌다. 무려 37년이 지났다. 세상의 변화는 빛처럼 빨라서 사람이 손대지 않아도 자동차가 목적지를 데리고 가는 시절이다. 이 대명천지에 우리는 여전히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면서 새벽종이 울리면 초가집을 없애야 한다는 시절을 그리며 추억하는 모양이다. 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적 없는데 자꾸 그렇다고 우겨대고 그걸 못 외우면 벌을 내리는 사회라니.

올해는 박정희 탄생 100년이다. 얼마나 많은 이벤트가 벌어질지 모른다. 악착같이 안 떨어지는 그림자는 길기도 하다. 그렇지만, 올해는 6·10 민주화운동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진에디터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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