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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강남 땅 투기 원조는 박정희였다

등록 2017-01-09 09:15수정 2017-01-11 20:33

[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아파트 새마을운동

강남 개발은 부동산 버전의 재벌 육성이자 정경유착이었다. 지난 7일 한강을 따라 늘어선 서울 강남구 압구정 일대 아파트와 그 뒤로 펼쳐진 고층빌딩의 불빛들이 밤을 밝히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강남 개발은 부동산 버전의 재벌 육성이자 정경유착이었다. 지난 7일 한강을 따라 늘어선 서울 강남구 압구정 일대 아파트와 그 뒤로 펼쳐진 고층빌딩의 불빛들이 밤을 밝히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정희 정권은 허허벌판 강남을 국내 최초의 신도시로 개발했다. 개발은 성공적이었다. 1963~77년 사이에 서울시 전역의 지가는 87배 수준으로 크게 상승했고, 강남지역의 지가는 176배가량 폭등했다. 정권은 앞장서 개발을 밀어붙였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새마을운동 “잘 살아보세”라는 표어처럼, 아파트를 사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부동산 투기 대열에 올라탄 사람들은 중산층이 됐지만, 그러지 못한 다수에게는 ‘헬조선’이 열렸다. 강남발 투기 열풍이 번지면서 전 국토가 투기장이 됐다. 헌법에도 명시된 ‘쾌적한 주거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정부가 이를 돈벌이용 투기 수단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강남 개발은 부동산 버전의 재벌 육성이었다.

#아파트 새마을운동

박정희 정권이 강남 개발을 밀어붙임과 동시에 1970~71년 땅 투기로 수백억원의 매매차익을 남겨 대선자금으로 썼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청와대 대선자금 마련을 위한 땅 투기 정황의 중심에 1970~72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윤아무개(88)씨가 있다. 윤씨 뒤를 이어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일했던 고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보면, 윤씨는 당시 청와대 지시로 강남구 토지의 2%인 24만여평을 매매해 18억원(현재가치 약 324억원)의 차익을 남긴 뒤 청와대에 바친 것으로 나온다. <한겨레>는 윤씨를 만나 책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폐쇄등기부등본 등을 통해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추적했다.

윤씨는 1968년 서울 풍납동, 방이동을 올림픽 후보지로 미리 선정한 인물이며, 지금의 강남에 해당하는 영동지구개발계획을 1970년에 세우고 집행한 주인공이다. 서울시 도시계획상에는 1960년대부터 올림픽대회 후보지가 논의돼 왔다.

윤씨는 영동개발계획이 발표되기 11개월 전인 1969년 12월, 김현옥 서울시장의 안내로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들른다.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집이었다. 정권 실세였던 박 실장은 윤씨에게 강남 땅을 사들여 차익을 본 뒤 바치라고 지시한다. 2주일 뒤 김 시장이 알려준 대로 고태진 제일은행 전무실을 찾아간다.

“윤씨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신분이던 1970년 1월께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 (…) 당시 제일은행 본점은 신세계 백화점 서편 지금의 제일지점 건물이었다. 고태진 전무실은 서울시장실보다 더 으리으리한 방이었다. 조심조심 찾아온 용건을 말하는 윤 과장에게 고 전무가 책상서랍에서 꺼내준 것은 적금 통장 한 개였다. 원금 3억원짜리였는데 예금한 지 햇수가 많이 지나서 이자가 누더기로 붙어 있었다. 윤씨는 이 자금을 통장 또는 A통장이라 적고 3억4138만6983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번째 자금공급은 이렇게 시작됐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10쪽, 손정목) 이때 윤씨가 고씨로부터 받은 돈의 현재가치는 약 70억원에 해당한다.

자금이 부족할 때는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자 쌍용그룹 창업자를 찾아가 자금을 받았다고 훗날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에게 밝힌다.

박종규 지시로 강남땅 되팔아 대선자금 수백억 바쳐

#국고 관리자 고태진

“울산 상업은행 출신 인물 중 금융인으로 가장 출세한 사람이 고태진씨다. 고씨는 울산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해방 후 1953년 대전지점장, 1957년 진주지점장, 1961년에는 심사과장을 거쳐 부산 중앙동지점장이 되었는데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이후락씨가 울산 출신의 금융인 중 국고를 맡길 인물을 찾게 되는데 이때 고씨가 발탁되었다. 이후락 실장의 지원 속에 제일은행 전무가 되었다.”(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손정목씨는 지난해 5월 88살을 일기로 숨졌고, 고태진씨는 2003년 별세했다. 고씨에 대한 기록을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지역 역사학자인 장 이사는 울산에 거주하는 고씨의 차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2015년 지역 일간지에 이 내용을 실었다. 윤씨가 청와대 경호실장 지시로 고씨를 찾아가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윤씨는 이 돈을 어떻게 굴렸을까. 윤씨가 강남구 토지의 2%인 24만여평을 매매해 당시 18억대의 차익을 남겼다고 손씨는 <서울…>에 적었다. 이 책은 2003년 발간돼, 올해까지 7쇄를 찍었다. 윤씨가 손씨에게 털어놓은 땅 투기 비화를 언론에 직접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윤씨는 1966년 도시계획과장, 1970년 5월 도시계획국장에 오른다. 1974년 서울시를 퇴직하고 쌍용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에는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경주·월성·청도 지역의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는 “영동(강남) 지역 개발 경험을 살려 경주를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다시 역사 밖으로 종적을 감췄다.

윤씨가 국장이 된 1970년 11월 영동지구 개발 계획 전모가 발표됐다. 당시 강남은 나날이 과밀화하는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발전을 위해 중앙정부가 적극 나선다는 취지로 개발됐다. 영동 제1지구(472만평)에다 제2지구(365만평)를 합해 서울시가 1972년까지 837만평을 개발하는 데 총 167억원 투입 계획을 세웠다. 60만 인구가 거주하기 위한 새 시가지였다.

강남이 서울에 편입된 시점은 1963년 1월. 서울 편입 목적이 신시가지 구상만은 아니었다. 서울시가 1966년 1월 초순 ‘강남 개발 구상’을 발표했지만 이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65년 서울시 인구는 150만명이었는데 다리가 2개뿐이었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나라로서, 전시 상황에 국민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의식이 팽배했다. 1966년 1월19일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면서 땅값이 꿈틀댔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신사동 일대 땅값은 한 평에 200원. 1년이 지나자 1평에 3000원으로 뛰어올랐다. 본격적인 개발은 경부고속도로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 건설 중인 제3한강교 남단을 경부고속도로 기점으로 한다는 결정이 1967년 11월 떨어진 것. 3년 뒤인 1970년 11월이 돼서야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발표됐다.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70년 강남개발 지휘한 윤씨

개발계획 발표 11개월 앞두고
김현옥 서울시장과 경호실장 집서 만나
강남땅 사들이라는 지시 받아

‘국고관리’ 고태진 제일은행 전무가
윤씨에 땅 살 종잣돈 든 통장 건네
이후 김성곤 쌍용회장도 자금 대

박정희 정부가 부동산 투기 억제로 정책을 바꾼 시점은 1973년 말부터다. 이미 투기 광풍이 한 차례 지나간 뒤였다. 그조차도 주거용 토지에 대해서는 세율이 낮았고 조세 중과 대상이었던 토지의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재무부는 투기 억제세에 의한 과세 대상 지역을 확대하고 공제율을 5% 인하함으로 투기를 억제하기로 했다.”(<매일경제> 1973년 12월5일치)

#1972년 유신을 부른 71년 대선

“이 사람(김대중)과 비교해서 국민들이 나를 대접하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민주주의가 역시 약점이 있어.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선거 바람이 잘못 불면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 그랬을 때 과연 이 나라가 일관성 있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할지 의심스러워. 그래서 내가 심각하게 걱정을 해. (…)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505~6쪽, 조갑제) 박 대통령의 지독한 불안은 1972년 유신으로 이어졌다.

윤씨가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4만평을 매매한 시절은, 박정희가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과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때다.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간신히 당선됐다.

윤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해 12월12일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으로 찾아갔다.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전직) 공무원으로서 <한겨레>와는 인터뷰하면 안 된다”고 했다.

윤씨는 인터뷰를 거절하면서도 몇 가지 질문에는 답을 했다. 손 교수에게 투기 거래 문건을 넘겼다는 것과 본인이 정치자금을 조성하다 곤욕을 치렀음을 인정했다. 강남 개발 당시 기억을 책으로 내기 위해 노트에 글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대선자금이 아닌,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개인 땅 투기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아니, 아니. 그렇게 소소하진 않아, 그 사람들은. (박종규 살았던 한남동) 유엔빌리지 20평 응접실에는 외국에서 가져온 호피, 도자기 그런 거 꽉꽉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 김현옥 서울시장도 군인 출신이니까 제2서울 개발 아주 잘 알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그 사람들이야 워낙 크게 놀았으니까. 김대중이하고 박정희 대통령하고 출마할 때 그때 돈을 안 갖다주는 거야, 장관들이. 박종규(청와대 경호실장)는 영동 개발(로 자금 만들어서 줬는데)인데.”

윤씨는 투기를 위한 계약 시 가명을 썼지만, 등기는 가명으로 할 수 없었다. 모든 부동산을 실명으로 등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농지개혁법 규정에 의해 한 사람이 3정보(㏊) 이상 농지 소유가 금지돼 있었다. 조아무개, 조아무개의 부인 윤아무개, 박아무개 이름이 쓰였다. 부동산 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 세법이 1967년 11월 법제화됐다. 당시는 등기 이전이 되고 난 뒤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야만 거래를 집계해 세금 고지서가 발부됐다. 2, 3년이 지나야 발부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1972년 도시계획국장을 그만둔 뒤에도 세금 문제가 불거졌다.

“(땅) 세금 문제도요, 정치해놓고 다 끝나니까 다 책임이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그니깐 처음에는 오정근이가 국세청장 할 때, 그다음에 청와대가 전화해서 (내 앞으로 나온 세금을) 없애버리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청와대가 국세청에) 전화 안 해주는 거야. 나중에 이경식이가, 청와대 비서실 담당(비서실장 보좌관)이 귀찮다고 오지 말라는 거야. 결국 무마는 됐어요.”

“아이고, 그, 아이고, 그래서, 내가 오죽 답답하면 전두환 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까. 근데 떨어졌지. (나도) 배신감 들었겠지.”

강남은 대한민국 최초의 새도시였다. 박정희 정권은 극비리에 강남 개발을 추진하면서 땅 투기를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72년 5월 반포지구 항공촬영 사진.(왼) 2017년 1월 현재 서울 서초구 반포지구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국가기록원 제공
강남은 대한민국 최초의 새도시였다. 박정희 정권은 극비리에 강남 개발을 추진하면서 땅 투기를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72년 5월 반포지구 항공촬영 사진.(왼) 2017년 1월 현재 서울 서초구 반포지구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국가기록원 제공

#현대차, 한전, 봉은사

“한전 부지(7만9342㎡)를 고액에 매입하게 된 배경이 뭡니까?”(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각 기업 상황에 따라 꼭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그렇게라도 투자하는 것입니다. 투자 금액은 상대적인 것이고, 입찰에서 그 정도는 내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정진행 현대차 사장)

대기업 총수 9명이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 참석한 지난해 12월6일,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에 128억원을 낸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정진행 사장이 하태경 의원의 질의에 답했다. 현대차는 쌓아둔 사내유보금 114조원을 특혜성 땅 투기에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터였다.

논란이 된 한전 부지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도 윤씨가 등장한다. 한전 부지는 원래 서울 삼성동에 자리한 봉은사가 대대로 소유한 땅이었는데, 1970년 조계종과 ‘윤태진’이 계약서를 체결해 한전으로 넘어오게 된다. 윤태진은 윤씨의 가명이다.

현대차는 2014년 9월,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감정가의 약 3배인 10조5500억원에 매입했다. 정부가 1970년 이 땅을 사들인 금액은 5억3000만원. 정부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현대차는 한전 부지에 사옥은 물론이고 호텔, 전시장, 공연장 등이 함께 들어서는 개발계획을 세우고 있다.

봉은사가 국가기록원을 통해 입수한 상공부의 대외비 문건 ‘상공부 예하 주택조합 대지 해결방안’을 보면 “상공부 장관이 서울시장에게 매입 의뢰하고 서울시장은 도시계획과장(윤아무개)에게 1970년 1월12일 지시하라”는 내용이 있다. 윤 과장은 그해 5월 도시계획국장으로 승진한다.

이 문건에서 나타나듯이 1970년 1월 이낙선 상공부 장관은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상공부가 이전할 부지를 매입하라고 공식적으로 의뢰한다. 서울시장은 당시 도시계획과장 윤씨에게 비밀리에 매입을 지시했다. “종합청사 건설계획이 누설되는 경우 영동지구 지가의 폭등 등 부작용으로 인하여 서울시의 영동지구 개발계획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윤 과장이 조계종 총무원과 계약을 체결하기 불과 6일 전이었다.

그가 사야 할 땅은 서울에 상공부 건물을 지을 10만평. 흩어진 땅이 아니라, 한데 모여 있는 부지여야 한다. 윤 과장은 봉은사가 대대로 소유한 땅을 주목했다.

손정목씨 책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윤 과장은 봉은사 땅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봉은사에 접근한다. 조계종 총무원은 뒤늦게 윤씨의 신분을 알고 상공부 청사건설위원회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윤씨가 애초 계약한 금액은 한 평에 4300원, 10만평에 총 4억3000만원이었다. 상공부가 계약 주체로 바뀌면서 계약금액도 5억3000만원으로 뛰어올랐다.

애초 상공부 및 산하기관인 대한석탄공사, 대한광업진흥공사, 한국전력, 포항제철 등이 들어설 부지였으나 계획이 틀어졌다. 한국전력만 1977년 이전 등기를 마치고 1982년 12월31일 옮겨왔다.

봉은사는 이 부지 매각 건으로 1970년 9월 청와대에 탄원서 한 장을 보낸다. 당시 조계종은 이 땅의 매매 건으로 분란을 겪는다.

“존경하옵는 대통령 각하, 1970년 9월27일 본 종단은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봉은사 토지 약 10만평을 상공부에 매도하고 총무처로부터 공무원 교육원을 매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하온데 봉은사 토지가 정부에 완전 이전(70. 9.30)된 지금 서울 동부 세무서는 동 매매에 대한 투기 억제세 84,533,700원, 과태료 8,453,370원, 계 92,987,070원을 부과하고 이를 납부하지 않는다 하여 천년 고찰인 봉은사의 사사지마저 압류하고 오는 71년 12월21일 공매 처분하기로 공고하고 있습니다.”

‘XY문건’ 땅 등기부 확인해보니 중앙정보부도 등장

#XY문건 속 대치동 쌍용아파트

“그가 연희동에 있던 나의 일터에 서류 보따리 하나를 들고 찾아온 것은 1995년 초여름이었다. 그 보따리 안에는 내가 기대했던 용역보고서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전혀 정리가 안 된 채로 뭉쳐놓은 부동산 매매 관련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토지 매입·매각 계약서, 등기부등본, 여러 가지 메모, 서류 납입 영수증 등 강남의 토지 매입 매각과 관련된 서류 중 약 80%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서류를 성질별로 나누고 날짜순으로 정리하여 ‘XY문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 윤아무개는 그런 무거운 비밀을 20년이 훨씬 넘도록 혼자의 가슴에만 묻은 채 우스갯소리를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살아온 것이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06~107쪽)

윤씨가 마지막으로 서울시를 퇴직한 시점은 74년 2월.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윤씨가 72년 한직인 한강건설사업소 소장으로 전출되기 전부터 청와대 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투기를 한다는 소문이 팽배했다고 손씨는 전한다. 손씨는 윤씨 후임으로 도시계획국장으로 일할 때 대강의 윤곽을 파악했다. 윤씨가 서울시를 퇴직한 지 21년이 지난 1995년 여름, 대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남 땅 투기를 했다며 당시 매매 문건과 메모 등을 들고 서울시립대 교수였던 손씨에게 찾아오면서 박정희 정권의 강남 땅 투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손씨는 이 거래 문건을 ‘XY문건'이라 이름 붙이고 분석했다.

현대사학자, 또는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손씨의 책을 다수 인용해 논문 등을 작성했다. 그러나 해당 문건을 보았다거나, 윤씨를 만났다는 이는 없다. 손씨의 유족들도 ‘XY문건'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손씨는 생전에 소유한 책과 기록을 모두 서울시립대에 기증했다. 이 책들은 현재 서울시립대중앙도서관 ‘손정목 문고’에 보관돼 있는데 여기서도 XY문건을 찾을 수 없었다.

윤씨도 해당 문건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손정목에게) 자료를 넘겼다는 것은 아니고, 달래서 가져갔죠. 그렇게 (책에) 쓸 줄 몰랐죠. 다 가져갔어요. 복사도 안 했지. 그러니까 그 친구는 (문과 출신) 문학가고 우리는 (공대 출신) 기술자고. (둘 다 경주중학교) 고향 친구고. (나중에) 돌려달라고 하니까 없어졌다는데, 뭐라 그래? 손정목이 시립대 교수 할 때 찾아가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바보였지, 말하자면.”

윤씨가 1970년 2월부터 약 1년간 12억8000만원을 들여 사들인 강남 땅은 24만8368평. 강남구 전체 면적의 약 2%다. 이 땅을 1971년 1월 중순부터 매각했다. 윤씨는 18만평을 매각해 18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마련한다. 당시 서울시가 영동 지구 개발투입자금으로 계획한 167억원의 10%를 넘는 금액이다. 마지막 남은 땅은 6만5000여평. “이 땅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에게 넘겨졌다”고 책은 윤씨 입을 빌려 기록했다.

손씨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자 전 쌍용그룹 회장인 김성곤씨에게 넘어간 부지 6만5000여평 가운데 5만8805평의 지번 목록을 공개했다. 모두 57개의 지번이다. 지번 이전 등으로 확인되지 않은 14개를 제외하고 43개의 폐쇄등기부등본과 구등기를 확인했다. 이 땅의 대다수는 1971~72년 사이에 김성곤이 소유했던 국민학원과 구암학원으로 들어갔다. 매매일도 거의 동일했다. 다양한 지번의 땅들이 72년 8월31일, 72년 9월1일에 집중적으로 거래됐다.

대치동 쌍용 아파트 부지도 이 거래에 포함된다. 현 주소로 대치동 59-6번지와 그 일대에 조성된 대치동 쌍용아파트는 7호선 학여울역과 바로 붙어 있는 역세권 아파트다. 현재 시세는 32평에 약 13억원. 1983년 3~11월에 완공된 아파트로 재건축 기대감이 높다.

이 아파트 부지의 폐쇄등기부등본과 구등기를 보면, 쌍용건설은 81년 4월7일, 81년 12월29일, 82년 2월2일, 82년 2월23일 순차적으로 이 땅을 매입했다. 쌍용건설에 땅을 판 주체는 학교법인 구암학원과 국민학원. 모두 쌍용 김성곤 회장이 사실상 소유했던 법인들이다. 두곳의 공익법인을 통해 땅을 사들여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두 공익법인이 이 땅을 사들인 시점도 72년 9월1일 전후로 같고, 매도인도 박아무개씨로 같다. 박씨는 70년 11월1일과 3일 이 땅을 매입한다. 박씨-국민·구암학원-쌍용건설로 이어진 거래는 일사천리로 이어진다.

양재동 266-5, 262-6번지 일대 폐쇄등기부등본에는 윤씨의 실명이 등장한다. 1970년 6월10일 정아무개씨가 조아무개로부터 땅을 매입하고, 이 땅은 76년 3월12일 상공부 산하 남서울 주택조합연합에 넘겨진다. 윤씨는 80년 3월10일 다시 이 땅을 매입했다가 불과 9개월 뒤인 80년 12월30~31일 임아무개씨에게 넘긴다. 윤씨는 상공부 땅이 임씨라는 개인에게 넘어가는 하나의 다리다. 중앙정보부가 매입한 땅도 확인됐다. 현 주소로 대치동 2번지는 국민학원(72년 9월1일)-중앙정보부(78년 11월27일)- 서울특별시(83년 1월10일)로 넘어갔다.

대치동 쌍용아파트 부지와 양재동 266-5번지 등은 손정목 교수가 책에 기록한 XY문건을 검증 차원에서 확인해본 것이다.

박정희 정권 수뇌들
투기 통한 대선자금 조성 합작

현대차가 고액에 산 한전부지도
70년 윤씨가 상부의 매입지시로
신분 속이고 봉은사와 헐값 계약

윤씨가 서울시 퇴직 21년 지나서
후임이었던 손정목 시립대교수에
땅거래 문건들 넘기며 세상에 알려

강남 24만평 차익 상납한 윤씨
“지금도 강남 지나면 울화통…
그때 내가 100평이라도 사놨다면”

#그에게는 강남 땅이 없다

윤씨는 강남에 단 한평의 땅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오랜 기간 입을 다물었다.

-청와대 땅 장사에 이용됐다는 것 때문에 억울했을 것 같은데 서울시를 그만두고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나.

“(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안 찾아갔어. 그때, 마, 운명이라 여겼지. (1971~75년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나를 잘랐겠지.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 아냐. 김종필이 책 안 읽어봤어? (쌍용건설 회장이자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한테 와서 빨갱이 (기록을) 지워달라고 했다고. 거기 보면 나와요, 김종필이 김성곤이를 굉장히 싫어했던 거. 김성곤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나를 좌경으로 봤겠죠.” <김종필 증언록>을 보면, 김성곤이 남로당 재정위원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자신을 잘랐다고 말하지만, 후임 국장인 손정목씨는 상공부 주택단지용 토지 때문에 윤씨가 72년 도시계획국장에서 한강건설사업소 소장으로 밀려났다고 전한다.

당시 정황은 이러하다. 이낙선 상공부 장관이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상공부 주택단지용 토지를 구입해 달라고 1970년 상호 합의를 했다. 합의 이면에는 상공부 주택단지용 토지를 서울시에서 개발하는 영동 1, 2구획정리지구에 넣어준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 영동구획정리 1, 2지구 계획 내용이 확정발표됐을 때 보니, 합의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다. 윤씨가 구입한 상공부 주택단지용 29만3766평 가운데 11만3245평이 구획정리지구에 포함되지 않은 것. 서울시로서는 돌산이었기 때문에 공사비가 많이 들어 구획지구에 넣기 어렵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윤씨는 서울시를 떠나 1974~75년 쌍용건설 이사를 지냈다.

“나는 뭐, 생활 자체가 (국회의원) 선거 치르고 쫄딱 망했지. 살기도 어려운데 뭐. 손정목이가 (책) 쓰니까 나도 한번 써봐야 되겠다 싶어서. 정치자금 땅에 관해선 소소한 이야기 많아. 나는 망했어. 쌍용건설 갔던 게 잘못이지. 김성곤이 (박정희 정권에서 70년 10·2 항명파동으로) 쫓겨나고 1975년 죽고 나니까 (김성곤) 아들이, (내가 아버지) 친구니까. 아버지가 발령낸 사람(인 나를) 바로 쫓아내데.”

-도시계획국장으로 지낼 당시 강남 땅을 개발할 때와 지금은 천지개벽일 텐데.

“내가 만약 땅 샀다면 (그때) 쫓겨났겠죠. 지금도 후회스러운 것이, 내가 평당 4000원 주고 살 때 제일 먼저 산 땅이 어딘지 알아요? 청주대학교 이사장의 땅을 4000원에 10만평 샀어요.(김준철 청주대 이사장은 1996년 감사원 감사에서 학교 땅 16만㎡를 불법 상속하거나 매각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때 산이었어요. 그게 테헤란로의 중심가가 됐어요. 마지막에 병신 같은 이야기할 게요. 다 (사고팔고) 하고 나서, 2000평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건데. 청와대가 땅 남았는 거 없냐고 해서, 없다고 해도 (그들은) 몰라. (그런데) 여기 있습니다 했더니, 쌍용에 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줬어. 그런 관계…. 아이고, 그 이야기 하면 울화통이 터져서, 지금도 (강남) 지나가다 보면…. 그때 내가 막 모른 척하고 100평이라도 샀으면 먹고살 거 아니에요. 요 꼬라지 해서 여기 먼 데 와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그런 이야기 하면, 하이고, 나 말 시키지 마. 미친다. 그래, 여기까지 와가지고, 꼬라지가 부끄러워서 안 만나려고 한 거야. 강남은 개발을 왜 이렇게 했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있는데, 나 갈라요. 미안해. 찻값은….”

이후 윤씨에게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윤씨는 만남을 거절했다. 지난해 12월21일 마지막 전화통화에서 손씨의 책 내용을 인용하겠다고 했더니 “정치자금과 나는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윤씨와의 이전 대화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고 보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인터뷰를 싣는다.

그는 강남 신화를 설계한 실무자였다. 강남의 교육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를 누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입성하려는 풍토와, 아파트를 사고팔아 차익을 누리지 않으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아파트 새마을 운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관권, 금권에다 지역감정까지 동원한 끝에 95만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한 71년 7대 대선 정치자금을 만들다 버려진 인물이다. 지금은 강남 땅을 사지 않았던 것을 지독히 후회하는 개인이다. 그는 ‘박정희들’을 만들었고, 그 또한 우리 안의 박정희들이다.

박유리 정은주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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