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광장의 노래]
3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①-민주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세대별 그룹 인터뷰 키워드 분석
386세대 “자유” IMF세대 “비효율” 20대 “허세”
민주주의에 대한 극단적 견해차
일상의 민주주의 진전 막아
3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다 ①-민주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세대별 그룹 인터뷰 키워드 분석
386세대 “자유” IMF세대 “비효율” 20대 “허세”
민주주의에 대한 극단적 견해차
일상의 민주주의 진전 막아
우리 민주주의는 파산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이 우리에게 던진 최종 질문은 이렇게 수렴된다. <한겨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다각도로 분석해 봤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통시적 분석을 위해 세대별 그룹 인터뷰(FGI)를 진행했다. 1987년 6월항쟁을 겪은 386세대(40대 후반~50대 중반)와 97년 외환위기 직후 대학을 다닌 아이엠에프(IMF) 세대(30대 후반~40대 초반),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을 경험한 20대 등 한 그룹에 5명씩 15명을 세대별로 인터뷰했다.
‘민주주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냐는 질문에 386세대는 “자유”, 아이엠에프 세대는 “비효율”, 20대는 “허세”라고 답했다.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세대별로 크게 달랐다.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경험한 세대, 국가부도 위기라는 충격을 트라우마로 떠안은 세대, 고도성장이 끝나고 최악의 취업난을 겪는 세대의 민주주의관은 세대별 경험 차이만큼이나 간극이 컸다. 이렇게 격차가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경제뿐 아니라 정치 분야에서도 압축성장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복합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세 세대의 공통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일상의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불행하다’는 자각이 모든 세대를 관통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민주주의로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세대별 공통점과 차이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세대별 다른 경험이 민주주의 가치관의 차이를 불러오고 사회적 합의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민주주의가 일상에서 심화·발전하지 못한 채 허울로만 남았다. 이번 집중 인터뷰에서 빠진 60대 이상 ‘전후세대’를 포함하면 초라한 현주소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2017년 탄핵 촛불은 꺼져가는 한국 민주주의를 다시 소환해냈다. 이번에는 모든 세대가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민주주의 인식의 세대별 차이점과 공통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결과를 ‘소셜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아르스프락시아에 맡겨 분석해 봤다. 세대별로 등장하는 주요 열쇳말과 그 빈도, 연결 형태 등을 컴퓨터로 계산하고, 세대별 민주주의 경험과 특징, 사회적 결과를 분석했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3일과 17일, 1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본사에서 각 3시간씩 진행했다.
# 386세대: 비민주 폭력과 놓지 못한 기득권
386세대는 군부독재 시대에 저항하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얻어낸 경험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었다. 1970~8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내며 반인권적, 비민주적 폭력을 체험했다. “초등학교 등굣길에 주머니를 뒤졌는데 껌이 나왔다”고 선생님이 뺨을 때렸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책에 나오는 작가 황순원씨를 비판했다가 “대걸레 자루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했는데 황순원씨는 왜 일본 메이지학원, 와세다대학을 다녔냐고 질문했다는 게 이유였다. 학교 운영과 관련해 교문 밖에서 항의하려던 여고생들을 학생주임교사가 발차기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북한의 5호담당제와 다를 바 없는 이웃의 감시체제도 일상이었다. “72년 어느 날 시커먼 지프차가 와서 어머니를 연행해 갔어요. 우리는 막 벌벌 떨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유도)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나중에 신문에 났더라고요. 유언비어 유포죄라고. 무학이신 어머니가 마실을 가서 고구마 구워 먹으면서 ‘박정희 대통령 그럼 안 되지라’고 얘기했다가 동네 이장이 (경찰에) 이른 거예요. 구속돼 징역 8개월 (선고)받고 아버지는 구시렁구시렁 욕했어요, ‘여편네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잡혀갔다’고.”(53·농민)
독재정권의 폭압은 386세대의 저항의식을 일깨웠다. 특히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그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고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아직도 대통령이고 우리는 그런 걸 하나도 몰랐을 수가 있나” 반문하며 “소름 끼치도록 화가 나 ‘데모 안 하면 인간도 아니구나!’ 생각했다.” “대학 가면 데모하면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지만 결국 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무서웠다. “학교에서 잘리고 감옥에 간다”는 결심이 없으면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서울)시청에 내려 데모를 해야 하는데 무서워서 버스에서 내리지 못”해 죄책감과 패배감을 곱씹어야 했다.
87년 6월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달성’했지만 그 후 30년간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지는 경험’을 되풀이하는 패배의 시간이었다. “보수 편에 마음이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막 되고. 근데 아니니까 화병이 날 것 같았어요. 몇 년 전 세월호 집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데 얼마나 쓸쓸했는지. 다른 사람들 보면 모두, 딴 세상에 사는 것 같고 나만 혼자 이러고 사는구나 싶고.”(49·주부)
한때 “민주주의를 이룩하자고 목숨 내걸고 싸웠지만” 일상의 민주주의에서는 매일 실패한다. “유교적 권위주의가 삶과 문화를 지배”하는데다 민주주의를 체화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집에서도 민주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아이들한테는 안 되는 게 있어요. 아빠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얘기를 들어요. 실생활에선 어려워요.”(51·회사원) “우리가 빈민주를 경험하고 민주주의를 이루자고 목숨 내걸고 싸우면서도 개인의 삶에서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고 권위적이에요. 반민주적인 사고방식과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53·농민)
이제는 내 손에 움켜쥔 한 줌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죄책감을 느낀다. “민주주의는 밥을 같이 나눠 먹는 건데, 똑같은 공간에서 어떤 사람은 유리창 안쪽 따뜻한 공간에서 풍요롭게 밥을 먹고, 어떤 사람은 유리창 바깥에서 추위에 떨며 라면을 먹고 있는 거잖아요. 헬조선을 외치는 20~30대가 그렇죠. 386세대는 계층 차이가 있겠지만 기득권 공간에서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든가 아니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54·회사원) “우리가 일을 적게 하면 돼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줄이면 돼요. 우리 직원들도 보면 주말 특근을 하는데 시간외 근무만 안 하면 (신입사원을) 더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절대 안 놔. 예를 들어 1억원을 받는 윗사람이 야근, 특근 안 하면 열 명을 더 뽑을 수 있어요. 민주화를 얘기하면서도 자기 것은 절대 내려놓지 않습니다.”(51·회사원) “부탄이 우리나라보다 잘살아서 행복감을 느끼는 게 아니잖아요. 너무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게 문제죠.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게 행복한 거고 그래야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내 노후에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 독립할 수 있을 거고. 아이들도 그러죠. ‘나는 이 대학에 왔으니까 이 정도는 누려야 해. 이 정도 직장을 못 가면 되겠어?’ 나 역시 은연중에 기대하고. 우리 아이들을 내가 이렇게 키웠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괴감이 듭니다.”(49·교사)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는 “386세대는 절대악인 독재정권과 싸우며 많이 희생했지만 그 이후 자신이 실현해낼 새로운 가치를 숙고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려면 새로운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저항하고 패배하느라 그 토대를 만들지 못했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갈림길에서 깊은 회한에 잠겨 있다.”
# 아이엠에프 세대: 권위적인 조직문화 체험과 자기성찰 결핍
아이엠에프 세대는 “민주주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보편적”으로 누려온 세대지만, 민주주의라면 “비효율”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말만 많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권력자의 의사로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일쑤다. 아이엠에프 세대는 매일매일 “성과”를 내도록 요구받는 ‘을’의 위치에서 권위적인 조직문화를 경험하고, ‘갑’의 위치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동권 출신이고 투옥 경험도 있는 직장 상사인데 조직 내에서 권력을 마구 휘둘러요. 전혀 소통하지 않죠. 신입사원들이 뭘 모르고 막 기운을 빼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그걸 매번 반복하는 게 짜증 나요. 그러니까 냉담해지죠.”(41·회사원)
“사람들을 다 아우르면서 다독이는 사람은 성과를 못 내요. 내더라도 엄청 느려요. 그래서 평교사로 퇴직하죠. 성과에 혈안이 돼 후배들을 달달 볶으며 점수를 쌓는 사람은 교감, 교장이 되고요.”(36·교사)
“처음에는 좋은 사장이 되려고 다양한 의견을 결론 날 때까지 들어줬어요. 일이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효율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일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는데 이젠 문제만 생기면 나한테 전화해대는 거예요. 경직돼서 결정을 못하는 거죠.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얘기하자니까 아무도 말 안 해요. 사내 교육을 만들어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였죠. ‘너희가 얘기를 안 한 죄다! 토요일에 다 출근해!’”(42·사업가)
“저는 비민주적이라고 (시민단체에서) 쫓겨났죠. 저는 일에 빠지면 배고픈 줄 몰라요. 잠도 안 자요. 후배들이 힘들어 죽겠다고 좀 쉬었다가 하자고 해도 제가 말을 안 듣는대요. 빨리 실적을 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니까요.”(42·인권활동가)
김도훈 대표는 “386세대가 학교와 독재정권에서 반민주를 경험했다면 아이엠에프 세대는 회사 조직에서 비민주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윗세대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주장하지만 아이엠에프 세대는 투표 말고는 민주주의 체험이 거의 없다. 개인의 가치가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과의 주체로 내몰리니까 공부(자기계발)를 통한 신분 상승, 인정 투쟁에 매달린다. 한마디로 내가 잘사는 게 중요한 세대다.”
“저항한 경험, 이겨본 경험이 없는 세대”이기에 이들은 “내 탓”에 익숙하다. 1996년 연세대 사건으로 학생운동의 명맥이 끊기고 97년 아이엠에프로 취업에 직격탄을 맞았지만 “좋은 시절에 태어나 누리지 못한 것은 온전히 너희 탓”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것, 좋은 회사에 취업하지 못한 것,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것, 내 몸이 누울 공간을 못 구한 것, 모든 게 제 탓인 거예요. 아무리 힘들다고 한들 밥을 굶어 봤니, 윗세대는 그런 식이죠. 저항하지 못하고 내 탓이오, 승복하고 말았어요.”(36·교사)
386세대와 20대 사이에 낀 세대로서 새로운 길을 발굴해야 한다는 자가진단도 나왔다. “우리 때는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어요. 조직이든, 능력이든, 네트워크든, 돈이든 사회적 잉여가 발생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 경로 자체가 차단된 느낌이에요. 20대는 학자금 대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정말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구실을 해야 해요. 내 삶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촛불 탄핵이) 어떤 정치인을 만들 것인가를 공부할 절호의 기회예요.”(37·작가)
“성과를 가장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이상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도대체 (기관사가) 무슨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싶은 거예요. 최고의 성과는 안전운행인데 그걸 보장하지 않잖아요. 사람 잘라서 이윤 올리면 공공의 이익인가요? 성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예요.”(41·회사원)
# 20대: 시간은 없고 돈은 필요하고
“교과서에서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배웠지만 “권리에 대한 교육이 아무것도 안 된 상태”라서 “민주주의를 몸소 겪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북한보다 평화롭고 돈 잘 벌면 만족하는 수준”이라고 말한다. 20대는 “나라의 주인이라기보다는 표 하나쯤”으로 무시된다고 여기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수능, 수능, 수능 그러다가 갑자기 대학에 와서 투표권을 얻었는데 어떻게 정치나 민주주의를 알겠어요. 어른들이 얘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되죠. 이 나라 교육 체제가 그렇게 돼 버렸는데.”(20·전남대 학생)
“민주화 항쟁 좋아요, 그런데 (민주주의) 시스템이 왜 이래요? 시스템을 만들고 보완하고 다 그 (윗)사람들이 한 일인데 한자리씩 잡은 뒤에는 딱히 그런 연구도 발전도 하지 않은 거 아닌가요? 운동하다가 사회로 들어간 사람들은 지금 시스템을 굴리는 것만 하지 뭔가 (사회변화에) 관심이 있나요? 386세대도 자녀 키울 때 그러잖아요. 스카이(SKY) 가야 해, 공부 열심히 해, 수능 잘 봐.”(25·회사원)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한 “쿨병이 심하다”.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허세”를 떠는 “먹고살 만한” “튀는 애”로 바라본다. “(학교) 과제도 많고 (아르바이트도) 바쁜데” “먹고살 만하니까” 한가한 소리 한다는 눈초리가 따갑다.
20대의 중심 가치는 돈이다. 공익보다 사익을, 노동보다 자본을 추구하며 ‘돈의 노예’를 자청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그런 사람들만 높은 데 가는 건지, 친구들과 술 먹으며 이야기해 봤는데요. 사익 안 챙기고 공익만 추구할 수 있냐니까 한 명도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집에 돈이 많아지고 좋은 차 타고 하면 개인으로선 행복해지시니까요.”(24·대구대 학생)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게 생각하는 것도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먹고살기 힘드니까 고성장을 바라는 사람이 꽤 많아졌고” “쌀밥을 먹게 해준 경제성장 때문에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시각도 있다. “일베가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도 먹고사니즘”과 관련이 깊다. 87년 6월항쟁과 박 전 대통령의 성과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박정희가 더 뚜렷하고 선명한 거 같다”는 답변이 줄을 이었다. “솔직히 6월항쟁은 진짜 가끔 교과서에서만 잠깐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도훈 대표는 “386세대가 정치적 폭압을 겪었다면 20대는 경제적 폭압을 견뎌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윗세대가 정립하지 못한 개인의 가치에 돈이 자리했다. 등록금도 비싸고 월세도 올라 아르바이트를 늘리니까 시간까지 부족해졌다. 돈과 시간이 없으니까 삶은 피폐해졌다. 최악의 세대다.”
# 박근혜 탄핵 촛불 이후
이번 탄핵 촛불 국면에서 각 세대는 민주주의 의미를 다르게 발견하고 있었다. 386세대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되새겼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가 짧지만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겪으면서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을 외치며 광장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을 만나며 “한풀이가 다 됐다” “우리나라 국민이 바보가 아니구나” “뒤로 후퇴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갈 길을 가는구나” 하는 벅찬 희망으로 가슴이 뛴다. “역사의 흐름은 땅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항해하는 배와 같아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끔은 풍랑을 맞아 흔들리고 거꾸로 갈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전진하고 있는 거죠.”(49·교사)
아이엠에프 세대는 2008년 광우병 촛불과 비교하며 “훨씬 더 희망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아쉬움을 털어놨다. “박근혜를 찍어서 미안하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내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속았대요. 속고 싶으니까 속은 거지, 분명히 많은 징표가 있었는데. 개개인은 반성하지 않고 무조건 권력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41·회사원) “실력 있는 민주주의, 공부하는 민주주의가 돼야 하는데 지금은 즐기고 신나고 쪽수로만 대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어요.”(42·인권활동가)
20대는 낙관과 비관이 엇갈렸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구나, 또 발산하려고 모였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저쪽에서 끝까지 버티면 어느 순간 지쳐버리지 않을까, 엄청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까 불안해요.”(19·숙명여대 학생) “촛불집회를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몇 명이나 이 사태를 알고, 자기 신념에 따라서 나온 걸까 싶어요. 그냥 (광장에) 나가면 ‘깨(어 있는) 시민’으로 보이니까 (나온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요).”(26·충남대 학생) “시스템 개선이나 제도 개선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아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부끄러워 (광장에) 나왔지만 그 부끄러움을 다 태우고 나면 들어가 버리겠죠.”(25·회사원) 2017년 촛불 광장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의미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이후 일상의 민주주의를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실현할 방법은 87년 6월항쟁 때처럼 여전히 안갯속이다. 우리는 광장의 승리에 도취해 새로운 민주주의 가치를 합의하고 내면화하는 데 또 실패할 것인가. 민주화 30년,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갈림길에 서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