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인양 중인 세월호의 기름 유출을 막기 위해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 세월호 사고 해역에서 동거차도 주민들과 해양경찰관들이 오일펜스와 중질유 부착제를 설치하고 있다. 진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저기 가운데 튀어나왔잖아 그게 스태빌라이저야. 그 옆에 계단이 보이고.” “그래? 그럼 아까보다 좀더 올라온건가?”
23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 야산, 안산 단원고 세월호 희생 학생 아버지들이 인양 작업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세월호 인양 가족 감시단의 활동이 지난 2015년 9월부터 시작됐으니 벌써 1년6개월째 매일 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 1072일만인 전날 저녁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세월호 인양 작업을 하나라도 놓칠까, 이들은 더욱 긴장한 모습이었다. 육안으로 인양 현장의 재킹바지선은 4~5㎝ 정도의 작은 형체로 보였지만, 망원렌즈를 통해서 보면 충분히 크고 가깝게 보였다. 망원렌즈를 단 카메라는 인양작업을 24시간 녹화하고 있다.
처음엔 1개였던 숙식을 위한 천막이 이제 3개로 늘었다. 그래서일까. 세월호 가족 감시단은 이날 동거차도를 찾은 기자들을 반기지 않았다. “남들 안 올 때 와야지, 잔치 난 것도 아니고.” 평소의 무관심에 대한 서운함 섞인 질타에 기자들은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날 가족 감시단은 8~9명 정도인데 반해 취재진의 수는 30여명에 달했다.
야산에서 인양 현장이 바라보이는 바닥 중앙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돌덩어리들로 대형 세월호 추모 리본 모양이 만들어져있다. 고 김관홍 잠수사의 주도로 유가족들이 함께 만든 것이라고 했다. 또 주변 나무에는 304명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노란 리본이 수십 개 묶여 있었다. 바닷바람은 찼지만, 햇살은 따스한 날씨였다.
고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50)씨는 새벽에 부랴부랴 팽목항을 거쳐 이날 아침 동거차도로 들어왔다. “기뻐하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그저 허탈합니다. 유가족들이 단식도 하고, 국민들도 세월호를 인양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지난 세월 동안 이렇게 바로 할 수 있는 인양을 왜 안 했는지 원망스럽습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1.3㎞ 남짓 떨어진 동거차도에 오면 돌이킬 수 없는 세월호 참사가 더욱 안타까워진다. 김씨는 “여기 오면 항상 저 아래 바닷가로 내려간다. 그러면 참사 현장이 더 가까이 보인다. 구명 조끼를 입고 있던 아이들이 배 밖으로 나오기만 했으면 둥둥 떠서 여기까지 와서 살 수 있었을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매일 한 차례, 최근에는 하루 2~3차례 인양 현장 모니터를 위한 10인승 소형 선박 ‘진실호’를 운전하는 세월호 생존학생 아버지 장동원씨도 “이렇게 동거차도가 가까운데…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지시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배 밖으로 나오기만 했어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영오씨는 세월호의 영구보존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월호 절단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세월호를 온전히 영구 보존하는 게 우리 가족들의 바람이다. 안전 교육장에서 10시간 강의하는 것보다 인양된 세월호를 보는 게 안전에 관한 산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 임건우군의 아버지 임영재씨는 “인양 작업이 순조롭게 신속하게 진행되길 바란다”며 “무엇보다도 미수습자들이 얼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말했다.
이날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탑승한 무궁화23호에 합류해 현장 인근에서 인양 작업을 지켜본 길바닥 저널리스트 박훈규(43)씨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새벽 4시47분에 세월호가 떠올랐을 때 ‘조금만 더 기다리자’라며 오열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전날부터 같은 배에 탔던 이승구(44) 독립피디는 “어젯밤 8시50분 인양 작업이 급물살을 타게 될 때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 전화가 많이 왔는데, ‘만약 인양했는데 아이들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의 가혹한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거차도/김규남 기자, 진도/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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