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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세월호 고정하는 망치소리가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와 겹치더라

등록 2017-04-15 10:09수정 2017-04-15 21:53

[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3주기, 엄마 6명이 쓴 일기
일러스트 김대중

▶다시, 4월16일입니다. 304명과 함께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3년. 엄마들은 오늘도 거리에 있습니다. 세월호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날의 진실은 아득하기 때문입니다. 엄마들은 세월호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진실을 말해주려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로 약속한 금요일에 돌아왔다고 믿습니다. 세월호가 돌아온 3월31일부터 엄마들은 세월호 곁을 지킵니다. 아이들의 고통을 품은 ‘죽음의 배’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입니다. 그러나 엄마니까 봐야 합니다. 엄마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15일간 세월호 곁을 지켜온 엄마 6명이 쓴 일기를 싣습니다.

아이들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한 금요일에, 세월호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3월31일 엄마들은 세월호를 마중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마들의 마중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애타게 아이들을 부르며 발을 동동거린 끝에 그제서야 철재부두의 문이 열렸습니다. 긴 뱃고동 소리를 내며 배가 다가왔습니다. 배는 처참했습니다. 녹이 슬고 찢겨지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이들이 만신창이로 돌아온 것처럼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해, 얼마나 무섭고 아팠니.’ 2014년 4월16일로 되돌아간 듯 고통스러운 신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엄마는 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을 기다리는 엄마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미안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월호가 돌아온 날부터 엄마들은 목포신항에 천막을 치고 길에서 잡니다.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세월호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들은 반별로 3박4일씩 교대로 선체조사 과정을 지켜봅니다. 아이들의 고통을 품은 ‘죽음의 배’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입니다. 그러나 엄마니까 봐야 합니다. 엄마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15일간 세월호 곁을 지켜온 엄마들 여섯 명이 공동일기를 썼습니다. 2학년 5반 이창현군 엄마 최순화씨, 2학년 5반 오준영군 엄마 임영애씨, 2학년 10반 권지혜양 엄마 이정숙씨, 2학년 5반 박성호군 엄마 정혜숙씨, 2학년 7반 이준우군 엄마 장순복씨, 2학년 6반 권순범군 엄마 최지영씨가 보내온 일기를 싣습니다. 정리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2학년 5반 이창현군 엄마 최순화씨
1~2분 만에 총리를 태운 차는 쌩하고 가버리더라

2017년 3월31일 금요일 비 오다 맑음

304명의 승객과 함께 그날의 진실을 안은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목포신항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버스 2대에 나누어 탄 70여명의 유가족들은 새벽 1시20분 안산 분향소를 출발해 목포로 향했다. 3년 만에 돌아오는 세월호를 보기 위해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박근혜 구속 소식은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가 순항이 될 거라는 확실한 메시지였다. 목포신항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이한 건 봄을 재촉하는 봄비와 황량한 아스팔트였다. 비를 피할 천막을 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노숙농성이 시작됐다.

세월호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안산에서 달려왔건만 해양수산부 직원은 세월호가 들어오는 철재부두가 사유지라는 핑계를 대며 유가족 출입을 막아섰다.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 마린호’가 출발한 시각은 아침 7시.

2시30분이면 목포신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해졌다. 세월호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포신항 철재부두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달려갔다. 들여보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고 결국 두어 시간 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사이 비는 그쳤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에 젖어 있던 철재부두를 말려주었다.

부두에 앉아 세월호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난 3년의 세월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1시가 안 돼 세월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긴 뱃고동 소리는 아픈 가슴을 후벼팠다. 세월호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엄마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궁둥이를 부두 쪽으로 향한 채 접안에 성공했다. 찢기고 갈라진 상처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세월호는 화이트 마린호에 길게 누워 있었다. 저런 배를 타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었구나.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수백 번을 외치고 기도했을 텐데, 왜 사람들도 하늘도 끝내 외면해버렸을까.

세월호는 알고 있을 것이다. 2014년 4월16일 그날의 비밀을 세월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비밀을 말해주려고 세월호가 돌아왔다. 박근혜를 구속시킨 금요일에 세월호가 돌아왔다.

2017년 4월1일 토요일 맑음

기둥과 지붕만 있던 천막이 아늑한 잠자리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목포시와 목포시민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아스팔트 위에 팰릿과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고 사방을 막아 바람을 막으니 그럴싸한 거처가 마련된 것이다. 노숙 둘쨋날에 다가온 목포신항의 풍경들은 2014년 4월 팽목항, 진도체육관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출동했고 3년 만에 돌아온 세월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침 9시에 황교안 국무총리가 미수습자 부모들을 만나기 위해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분주해졌다. 미수습자 부모들을 만나러 목포에 왔다면 유가족도 만나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출입구로 몰려갔다. 세 개의 출입구 중 두 개의 출입구에서 총리를 만나기 위해 나누어 기다렸다. 할 말들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목포지역 정보관이 나왔다. 유가족 대표로 몇 사람만 만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서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1~2분 만에 총리를 태운 차는 유가족이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출구로 쌩하고 나가 버렸다. 50여분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기다렸는데 다른 출구로 도망치듯 가버렸다는 소식에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세월호 오전 참관시간(10~11시)은 황교안 소동으로 놓쳐버리고 오후 참관시간(3~4시)에는 집회가 계획돼 있었다. 오후 1시30분~2시30분으로 시간을 변경해 세월호를 보기 위해 들어갔다. 한 선체조사위원이 설명하고 질문에 답해주는데 화이트 마린호에 승선해 세월호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선장이 단호히 거절해 승선하지 못했다. 대신 바다를 향해 누워 있는 세월호의 반대편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남겼다.

오후 3시 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9명의 미수습자 수습, 선체조사 과정 공개, 세월호 보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진상규명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철조망은 염원을 담은 노란 끈들로 채워졌다. 여기 목포신항에서도 세월호의 역사가 쓰인다.

2017년 4월2일 일요일 맑음

침낭 안에 핫팩을 집어넣고 자자는 아이디어가 나와 첫날보다는 따뜻한 잠자리에서 노숙했다. 엄마들의 부지런한 수다에도 최대한 누워 있다가 아침밥 먹을 때 일어났다. 식당이 멀어 귀찮을 만도 한데 반찬 가짓수가 많고 맛도 좋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제 요구했던, 세월호 반대편을 보는 게 받아들여져 좀 떨어진 항구로 이동해 배를 타기로 했다. 한 번에 탈 수 있는 인원이 13명으로 한정돼 교대로 네 번에 걸쳐 나갔다. 아이들이 묵었던 객실 부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막상 가까이 가보니 시커멓게 녹이 슨 갑판이 전부였다. 4월15일 밤 아이들이 저 갑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며 환호했었는데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미 부분을 가까이 보려고 배가 방향을 조금 돌렸다. 3층, 4층 객실의 끝부분만 보였는데, 창에 쳐놓은 유실방지망이 뜯겨져 있었다. 선수 들기를 하다가 너울성 파도를 못 이겨 와이어가 파고들어간 선수 부분 6~7m의 상처도 선명했다. 상하이샐비지라고 적혀 있는 배에서는 크레인을 동원해 펄을 담은 포대를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대했던 객실 부분은 하늘을 향해 있어 헬기를 타야만 볼 수 있단다. 그렇다고 헬기를 태워 달랠 수도 없고…. 아쉬움을 남긴 채 오전 참관 일정을 끝내야 했다.

일요일이어서인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제보다 더 많아졌다. 오후 3시부터는 목포신항에서 목포역까지 5㎞를 걸어서 행진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뉴스에서는 이준석 선장의 여권 등 40여점의 유류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물뼈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놓고 온갖 추측들이 나왔지만 미수습자 수습 소식은 오늘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상태에서 발견이 되든 미수습자 부모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도록 예측한 장소에서 미수습자들이 수습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창현이가 아끼던 슬리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7년 4월3일 월요일 맑음

어젯밤 많은 부모들이 안산으로 떠난 빈자리엔 휑하니 이불만 남았다. 썰렁한 모습은 진도체육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진도체육관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지만 아이가 돌아오면서 하나둘 빠졌다. 나중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 아이만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맨 나중에 남는 사람이 나이면 어떡하지 하며 절망했다. 그때 마음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역시 부지런한 엄마들의 수다에 일찌감치 잠이 깼다. 화장실을 가려고 천막 밖으로 나갔을 때 온통 안개로 뒤덮인 하얀 세상에 놀랐다. 5m 앞도 볼 수 없었다. 인천항을 출발하던 2014년 4월15일 저녁 안개가 저랬을까? 출항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날 밤 인천항을 뒤덮은 짙은 안개는 출항하지 말라는 신호였을 텐데, 선원들도 출항하지 말자고 선장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는데, 왜 유일하게 세월호만 출항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른 아침의 짙은 안개는 한낮 더위를 예상케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더위가 시작됐다. 바람을 막기 위해 사방을 막은 천막이 한낮에는 온실이 돼버렸다. 천막들을 다 걷어올리고 바깥 바람이 들어오게 하니까 견딜 만해졌다. 월요일인 오늘부터는 3박4일씩 교대가 이뤄지는 날이다. 지난 3월31일에 왔던 사람들은 임원들과 몇 사람만 남고 안산으로 올라가고 각 반별로 2명씩 목포신항에 남아 세월호 선체조사 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 안산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한 버스가 목포에 오후 1시쯤 도착해 같이 점심을 먹고 그 버스는 다시 오후 3시에 목포를 출발해 안산으로 향했다. 나도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2학년 5반 오준영군의 엄마 임영애씨
심정 묻지 마세요, 눈으로도 묻지 마세요

4월3일 월요일 맑음

이제서야 왔다. 지난 3월23일 세월호가 해수면 위로 올라올 때부터 빨리 보고 싶었다. 아이들의 살해 현장이 뭐가 그리 빨리 보고 싶었을까. 그래도 엄마니까 봐야만 했다.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흔적을 남기고 간 죽음의 배일망정 엄마는 보고 기억해야만 한다.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아 억울하게 죽어간 304명과 그리고 다른 희생자들까지.

소리라도 미친 듯이 지르고 싶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본다. “저 배에 사람이 있습니다. 제발 구해주세요. 304명 모두 살아서 돌아오게 해주세요.” 전 국민이 기도했던 그날의 기도들을 떠올리며, 아홉 명의 미수습자를 찾아달라는 간절한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4월4일 화요일 맑음

심정 묻지 마세요. 얼마나 아플까. 눈으로도 묻지 마세요. 아픔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 되는데. 말하지 않아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소생할 수 없는 중환자를 면회 가듯 오전에도 오후에도 세월호 배 바닥만 보러 갔다 왔다. 준영이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고, 얼마나 무섭고 아팠냐고 묻다가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숨을 쉬다가도 문득 가슴이 뜨끔해 손으로 입을 막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에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미안해진다.

4월5일 수요일 비

오후 3시부터 오늘 작업을 브리핑한다고 해서 부두에서 기다렸다. 점점 파리해져 가는 세월호 바닥을 보며 마음이 상해갈 즈음, 뒤늦게 작업총괄자가 나왔다. 그는 다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믿으라고 말했다. 믿을 만한 근거는 없고 주먹구구식 설명은 여전했다. 실패할 경우 대책이 있냐는 질문에 책임 회피성 발언만 이어갔다.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는데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작업이 어려울 것 같다는 기사가 떴다. 3년 내내 이런 식으로 우리는 배제당하고 우롱당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기분은 나쁘다. 그래도 사람을 찾을 때까지는 속으로 삭여야겠지. 우는 것도 억울해하는 것도 조금 더 참아보자.

4월6일 목요일 맑음

어젯밤 밤새 작업하는 소리는 내일 아침 어떤 소식이 들려올까 궁금증을 더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제발 작업이 성공하기를, 안전하게 무사히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오기를. 그래서 준영이 친구 네 명, 선생님 두 분, 아빠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 아홉명 모두 찾고 세월호가 품고 있는 진실도 밝혀내기를. 먼 훗날 준영이를 만났을 때 엄마가 준영이에게 들려 줄 이야깃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고 다시 안산으로 갈 준비를 했다.

모듈 트랜스포터 1차 테스트가 실패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내가 다시 목포에 왔을 때는 육상에 거치되어 있는 세월호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본다.

2학년 10반 권지혜양 엄마 이정숙씨
세월호 난간에 남학생 바지가 걸려 있네

4월6일 목요일 맑다가 비

며칠을 고심하고 오고 싶어했던 곳. 지혜가 어떤 배를 타고 갔는지 궁금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게 갔는지 알고 있어 보고 싶지도 않을 배. 그렇게 오매불망 인양해달라 부모들이 피켓도 들고 울고불며 국회로, 청운동으로, 광화문으로 미친 듯 뛰어다니고 해양수산부에 떼도 써서 3년 만에 올라온 배. 그 배를 보러 왔다.

막상 오니 맘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오후 2시에 문재인 의원이 와서 가족이랑 같이 브리핑 듣는다 해서 현장으로 들어갔다.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처럼 만신창이가 돼 올라온 배를 보니 아이들의 고통이 더 와닿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몰려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해수부가 브리핑하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넉넉잡아 1년이면 인양할 수 있는 걸 3년 만에 올린 정부, 해수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유가족인 내 맘이 이런데 미수습 가족은 얼마나 맘이 찢어지고 정부 쪽에 일하는 자들을 죽이고 싶을까.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또다시 2014년 4월16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고 넘 고통스럽다. 그래도 함께하는 부모들과 붙잡고 울고 또 울어 맘이 많이 진정이 됐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아픔을 달래주며 다시 한번 살 기운을 준다. 이래서 사람과 사람의 연대가 중요한가 보다. 슬픔을 잠시 미룬 채 맘들이랑 리본 만들면서 울고 웃었다. 늦은 저녁시간이 되니 낮기온이랑 많이 달라졌다. 자식 같은 전경들이 추위에 떨며 근무하는 모습이 맘이 아파 따뜻한 차랑 간식을 전해주려고 몇 엄마들이랑 철조망을 한바퀴 돌았다. 다들 자식 같은 마음에 이야기도 나눴다. 2년 전에는 전경들이랑 몸싸움도 하고 했는데 지금 이 시간에는 서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넘 좋았다. 그땐 왜 그렇게 악을 쓰며 싸움을 했는지. 내일도 힘든 하루가 되겠지만 그래도 울다 웃음으로 하루를 보내야겠다.

4월7일 금요일 맑음

오전 7시에 참관하러 들어갔다. 비 온 다음 날씨라서 화창했다. 봄햇살이 따가워 눈이 부셨다. 어제와는 다르게 배가 선명하게 너무 가깝게 와닿았다. 진짜 괴물 그 자체였다. 너무 잘 보여서 앞면, 옆면 다 둘러봐도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3년 동안 짠 바닷속에 있다 보니 너무 많이 부식됐다. 오늘도 어제처럼 눈물과 짜증이 계속 났다. 그래도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지켜보았다. 어디가 입구였지?

배가 인양되고 많은 정치인이 찾아오지만 관광지인 양 웃으며 기념촬영하고 난리다. 우리 부모들 앞에서 제발 그런 행동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박지원 의원 등이 몰려왔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데, 목포시 공무원들이 첫날 유가족 천막을 치우려고 해서 몸싸움했던 이야기를 했다. 옆에 있던 목포시장이 말이 끝나자마자 천막은 불법이라고 쏘아댔다. 그런데도 시에서 다 지원했다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아니었으면 세월호가 목포에 올 수도 없었단다. 옆에 있던 박 의원도 내가 잘 모르고 잘못 말하는 것이라며 핀잔을 줬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공무원들은 변한 게 없다. 국민 말은 무시하고 자기들 입장만 강변한다. 지금 하는 행동들이 예전 박근혜랑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싶다. 유가족 말을 들으러 왔으면 가족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 순간만큼이라도.

4월8일 토요일 맑음

오늘은 아침부터 대학생들이 서울에서 관광버스 3대를 대절해서 유가족들을 만나러 내려왔다. 손편지를 쓴 메모지로 대형 세월호 리본을 만들어왔다. 너무나 예쁜 마음에 안고 울면서 서로 달래면서 사진도 찍고 리본도 같이 앉아서 만들었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것 같아 한 분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너무 좋았다. 생존자 김동수씨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촬영차 왔다. 리본을 만들고 있는데 동수씨가 울분에 차 목소리 높였다. 난 순간 시민들이랑 다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달려갔다. 그건 아니었지만 딸과 부인이 옆에서 울고 있어 너무 안타까웠다. 딸은 무슨 죄이며 부인은 무슨 죄인가. 저렇게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나. 딸을 다독여주며 함께 옆에서 동수씨를 응원했다. 목포에서 3일을 지내보니 2014년 4월16일 때랑 너무 똑같았다. 위선의 공무원이나 언론들이 그랬다. 소신은 없고 윗사람 섬기는데 급급하고, 짜깁기 기사, 눈치보기 기사가 넘쳐난다. 가족의 마음을 읽어 쓰지 않는다.

오후 3시 브리핑에서, 테스트 결과 모든 리프팅빔을 5㎝ 정도 드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내일 만조 시간인 점심때 세월호를 들고 육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시간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팽목에 있는 분향소를 찾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3주기 맞이 대청소를 하기 위해 몇몇 엄마들이랑 갔다. 청소를 하는데 또 한번 슬픔이 몰려왔다.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닦으면서 이 무슨 팔자가 자식 제사상을 차리고, 기뻐할 생일 음식을 눈물로 차려야 하나. 3년이 지났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흐른다. 그래도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청소해주러 간 기분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매번 느끼지만 시민분들께 참 많은 힘을 받고 있다. 가족들이 노숙한다고 건강에 좋은 과일과 맛있는 식사를 정성껏 해주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시민의 힘이었다. 힘을 합쳐 진실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

4월9일 일요일 맑음

오늘은 배가 육상 위로 올라온다고 했다. 다들 아침 일찍 분주히 씻고 아침밥을 먹고 집 나간 자식 기다리듯이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배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에 항만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라도 봐야 한다며 뛰어나갔다. 아직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배가 움직이고 있다.

참관 시간에 들어가보니 세월호 난간에 남학생 바지랑 캐리어 한개가 걸려 있었다. 어떤 물체가 창문 사이로 언뜻 비쳤다. 또다시 울컥해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배 속에서 도와달라며 소리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데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졌다.

오늘은 배가 올라오는 바람에 햇빛에서 하루종일 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마음이 착잡하고 있는데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 온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까지 안철수는 우리한테 그렇게 호의적인 정치인이 아니라서 반갑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유세 운동하러 온 느낌도 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은 모든 일을 뛰어나게 하는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을 섬기는 평범한 대통령을 뽑고 싶다.

4월10일 월요일 맑음

서둘러 아침밥을 챙겨먹고 부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근거리에서 볼 수 없고 먼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앉아서 육상에 올라온 배를 바라보면서 한 시간을 보냈다. 억울함과 비참함이 몰려온다. 지혜와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복도로 뛰어다니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반듯이 앉아서 기다리며 구조대가 오리라 믿었던 아이들. 그 모습이 선하다. 생존자 김성묵씨도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미수습자를 찾고 선체 조사해서 울 애들을 왜 구하지 않고 그냥 가게 내버려두었는지 우리 부모들이 밝혀서 책임자를 처벌하고 말겠다.

삼풍백화점 희생자 가족들이 오늘 찾아왔다. 정말 죄송하다고 자신들이 끝까지 싸우지 못해 많은 학생들이 죽었다고 했다. 세월호 부모들은 대단하다고 손을 잡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왜 그때 끝까지 싸우지 않고 일을 이렇게 키워놓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우린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다짐한다. 끝까지 싸워서 책임자 처벌을 시키고 다시는 이 땅에 억울함,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이 상처를, 죽을 때까지 아파할 이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도록 하고 싶다.

2학년5반 박성호군 엄마 정혜숙씨
무언의 편지를 담아 세월호 안으로 보낸다

4월10일 월요일 맑음

세월호 거치와 수색이 속히 진척되길 간절히 바라며 부모들이 목포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차창 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파노라마처럼 차창에 펼쳐지며 지나가니 잔인했던 그해 봄, 그날의 봄꽃 같아 아린 가슴을 더욱 후벼파고든다. 꽃봉오리보다 더 고왔던 아이들을 삼켜버린 봄조차 야속해서 부모들은 눈을 감아버리고 버스 안은 침묵만 흐른다. 목포시에 들어서니 노란 플래카드가 봄꽃보다 더 노랗게 거리를 물들이고 반기는 듯했다.

부모들은 그제서야 침묵을 깨고 탄성을 질렀다.

고개를 돌리니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월호를 옮겨왔던 반잠수 선박이 빈 모습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거대한 괴물 같고 흉물스런 세월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나오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버스는 신항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항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철조망이었다. 가로막힌 철조망이 현재 상황을 먼저 대변하는 듯했다. 유가족 천막에서 유가족들이 오는 유가족들을 반갑게 맞아주며 늦은 점심을 차려주었다. 정 많은 시민들의 안타까움을 담은 정성스런 음식들이 천막 바닥에 차려졌다. 가족들은 꾸역꾸역 울분도 삼키고 꾸역꾸역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도 삼키며 이름 모를 분들의 고마운 정성을 삼켰다.

1089일 만에 느리게 느리게 애를 태우며 땅 위로 올라오던 세월호가 궁금해서 찾아오신 시민들로 철조망 밖은 꽉 차 있었다. 3시가 되자 하루 두 번 세월호를 보러 제한구역을 넘어가는 시간이라 알려준다. 수많은 인파를 비집고 노란 옷의 세월호 가족들과 몇몇 취재진만 선별해서 철조망 안쪽으로 들여보내졌다. 온 국민의 관심사는 안중에도 없는 해수부와 정부의 만행은 비겁함으로 여전했다. 치미는 울화를 꾹꾹 눌러삼키며 들어선 철조망 안은 고요했다. 임시 컨테이너가 즐비한 골목을 지나 미수습자 가족들이 머무는 컨테이너도, 선체조사위 사무실도 눈에 들어왔다. 컨테이너 골목을 지나자 세월호가 100m쯤 떨어진 지점에서 멈추라는 수신호가 전달됐다. 주황색 가이드라인이 처져 있고 경계선을 그은 끈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선수 먼저 올려진 거대한 세월호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너덜너덜 찌그러지고 긁히고 찢기고 녹슬고 곳곳에 구멍이 난 채로 누워 있었다. 1090일째가 되는 오늘은 그 어디에도 작업하고 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괴물스럽고 끔찍한 세월호를 눈앞에서 보니 더욱 착잡하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탄식이 절로 나오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가족들은 무언의 편지를 담아 세월호 안으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제발 돌아와줘.”

“제발 돌아와주세요.”

“제발.”

간절함은 서성거림으로 탑돌이를 하듯 말없이 오고 간다.

4월11일 화요일 비 온 뒤 갬

밤새 몰아친 비바람에 한숨도 못 잔 가족들의 얼굴엔 핏기조차 없다. 아침이 되자 다행히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친다. 눈을 뜨자마자 시작된 간절한 기다림은 묵묵히 손에서 손으로 쉼없이 노란리본이 되어 담겨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엄마 아빠 따로 없다. 자르고 오리고 붙이고 줄을 꿰고 잠자는 시간과 식사시간 그리고 세월호를 보러 철조망 경계선을 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이 노란리본 만들기로 채워진다. 위대한 시민들은 팽목에서도 광화문에서도 목포에서도 묵묵히 자원봉사자가 되어 유가족 곁을 지켜준다. 부모들이 만든 리본은 자원봉사자분들의 손을 거쳐 방문하는 이들의 가슴에 나비처럼 안긴다.

오늘도 세월호를 보러 오시는 시민들로 목포신항은 인산인해다. 노란 옷을 입고 앉아 리본을 만드는 자식 잃은 부모들에게 수시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오고 간다. “미안합니다.” “힘내십시오.” 하나같이 목멘 목소리들이다.

“감사합니다.” “시민들의 힘으로 배가 올라왔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끝까지 함께해주세요.” 응답하는 가족들 목소리도 목이 멘다.

죄 없는 시민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아몰랑 누구와 꼭 닮았다.

1089일 만에 뭍으로 오른 처참한 세월호의 무게마저 오락가락 애간장을 녹이더니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091일 만에 찢어지고 으스러진 채 완전히 육상에 거치됐다. 오늘은 모듈 트랜스포터를 완전히 빼내고 밖으로 흘러내린 진흙과 유류품을 모으는 작업이 진행됐다. 뭔가 작업하는 움직임이 눈에 보이니 답답했던 마음에 한가닥의 초조함이 가시는 듯했다. 육상에 올라왔으니 오늘부터 진짜 시작이다. 세척하고 방역하고 그래야 미수습자를 찾을 수 있다. 당장이라도 두 손 두 발 걷어붙이고 아이들을 찾고 싶은 심정을 눌렀다. 선체에서 빠져나온 물건과 옷가지들이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세월호의 밑바닥을 쳐다본다. 어제보다 더 녹슬고 형편없어지는 세월호를 바라본다. 또 다시 시작된 희망 고문에 속아줘야 하는 기막힌 신세에 한탄이 이어진다. “얼마나 오래 이어질까.” “얼마나 더 이용당해야 가족들을 찾을까.” “얼마나 더 오래 버텨야 진상규명이 이뤄질까.” 한숨과 함께 오늘도 또 탑돌이는 이어졌다.

2학년 7반 이준우군 엄마 장순복씨
눈물만 흘리지 말고 값진 세상 만들어야지

4월12일 수요일 날씨: 바람 부는 맑은 날씨

동생들이 왔다.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다. 그땐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들이었는데,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단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 손잡고 있던 아이들이지만 상처가 남아 있을 텐데. 아이들이 가까이 세월호를 보며 형아라고 넌지시 부른다. 그렇게 부르다 그냥 울어버린다. 그 긴 시간을 참았던 아이들.

동생들은 2박3일 머물다가 갔다. 올 때보다 더 의젓해졌다. 리본도 함께 배워서 만들고, 심부름도 잘해주고. 늘 하는 말, 남아서 지켜준다고 한다. 다음에 현장학습 시간을 더 많이 내서 오겠다고 약속한다. 기특하다. 잘 자라만 다오.

이곳은 바쁘다. 오는 분들한테 드릴 노란리본도 부모들이 직접 만들고 3주기 기억식에 쓸 근조리본에도 옷핀을 꽂는다. 아이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저녁 늦게 리본 작업을 끝내면 남아 있는 과일을 꺼낸다. 이곳에서 상주하며 살림을 맡은 영석 엄마가 리본 만드느라 아픈 손가락으로 오렌지를 깐다. 즐거운 시간이다.

늦은 밤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가 경찰에게 따뜻한 커피를 준다. 괜찮다고 하지만 받아줘서 고맙다고 엄마들이 되레 인사한다. 한번 만나고 싶은 내 아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내 아이 챙겨주는 것만 같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소리가 잠이 들 때까지 귀에 맴돈다.

4월13일 목요일 날씨: 바람 부는 햇살 비침

오전 10시.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 소리, 쇠 자르는 소리가 들린다. 더 힘든 건 바닥에 고정물을 박는 망치 소리다. 그 소리에 머리가 어지럽다. 그때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들이 발버둥치며 외치는 소리,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와 겹친다. 해경이 창문을 깼다면.

펜스를 더 가까이 치고 컨테이너로 막아 세월호를 못 보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 뭘 은폐하고 덮으려는 것인지. 사실을 하나도 숨기지 말고 세상에 다 밝히고 알려야 하는데.

“가슴이 아프네.” “이 사람들이 다 간 사람들인가.”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이쁜 강아지들이.” “눈물 나서 못 쳐다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만히 옷깃으로 눈물을 닦는다. “우리나라는 망했어, 망했어.” 아이들의 예쁜 얼굴이 있는 사진을 보며 말씀하신다. 요즘 많은 분들이 이곳 목포신항을 찾는다. 유독 눈에 띄는 분들이 어르신들이다.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오신다. 지나가는 길에 꼭 들러야 하는 하나의 목적지가 됐다. 아무렴 좋으렴. 모르는 많은 분들이 우리 아이들의 진실을 먼저 알리고 있다. 이 억울함을 같이 나누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죽음에 눈물만 흘리지 말고 변해서 값어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고운 옷을 입고, 먼 길을 지팡이 짚고 허리 굽혀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오늘도 노란리본과 스티커를 건넨다. “이게 뭣이요?” “차량 스티커예요. 경운기에 붙이고 농기구에 붙이는 거예요. 꼭 붙여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저 너머로 말씀하신다. “너무 젊고 다들 이쁘네.”

2학년 6반 권순범군 엄마 최지영씨
3년 만에 돌아왔구나, 약속했던 금요일에

4월14일 금요일 날씨 맑음

2014년 4월16일, 우리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세월호 배를 타고 떠난 지 3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기로 했던 그 금요일이었다.

오늘은 이곳 목포신항에 배가 온 지 15일째 되는 날이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날아갈 것만 같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작업이 빠르게 진행될 텐데 걱정이다. 엄마들은 길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잠을 자며 하루에 2번 배를 보기 위해 목포신항으로 들어간다. 오전 10시, 오후 3시에 한 시간씩 볼 수 있다.

어제부터 세월호 세척 작업을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원래의 배 색깔이 드러난다. 어찌나 바람이 세차게 불던지, 배를 세척하는 물살에 조개껍데기가 내가 앉아 있던 자리까지 날아왔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바닷속에 있으면서 조개껍데기들이 붙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순범이가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 그동안에 우리가 겪어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터질 듯 또다시 아픔이 밀려온다. 순범아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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