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영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권력, ‘광장’ 이어 ‘원탁으로’
학습·토론 통해 질높은 판단 도출
밀실 결정 에너지정책 민주화 기여
참여 열기 비해 시간부족은 아쉬워
시민권력, ‘광장’ 이어 ‘원탁으로’
학습·토론 통해 질높은 판단 도출
밀실 결정 에너지정책 민주화 기여
참여 열기 비해 시간부족은 아쉬워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가 3개월에 걸쳐 진행됐고, 이제 그 결과도 나왔다. 나는 지난 13~15일 공론화의 최종 단계로 준비된 종합토론회를 가까이서 참관할 기회를 가졌다. 거기 모인 471명의 시민참여단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열의와 진지함으로 쟁점에 대해 학습하고 숙고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의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집중적인 숙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와 원전 축소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 결론이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론에 대한 찬성, 반대를 떠나 진지한 숙의 끝에 나온 시민참여단의 의견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번 신고리 공론화는 원전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관련하여 큰 의미가 있다. 통상적으로 공공정책에 대한 시민참여라고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시민들의 의견은 참고사항 정도로 치부되고 만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정책결정 과정에서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활용되었던 시민참여 중에는 사실상 관료와 전문가들의 정책결정에 ‘들러리’ 서주는 것으로 악용되는 사례들도 많았다.
나는 이번 공론화의 가장 큰 의미를 원탁에서 시민권력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번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에너지정책과 같은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실제로 부여받게 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이 잘못된 정치와 정책에 대한 참여욕구를 마음껏 표출한 촛불시민혁명이 있었기에 이렇듯 원탁에서 시민주권이 확보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인구통계적 대표성을 고려하여 무작위로 선발된 약 500명의 시민참여단의 사전 쟁점 학습을 위한 자료집과 동영상의 제공, 2박3일에 걸친 집중적인 학습과 숙의 그리고 그에 기반한 최종적인 시민의견 수렴을 핵심으로 하는 이번 공론화는 우리 사회에 숙의민주주의의 진전과 관련하여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경험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과연 에너지문제와 같이 중요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겠느냐고 힐난하던 일각에서의 비판에 맞서 원전과 같이 기술, 경제, 사회적으로 복잡한 이슈에 대해서도 시민들이 학습과 토론을 통해 이해하고 숙의할 수 있고, 단순 여론조사에서는 불가능한 질 높은 판단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시민참여단은 보여주었다.
이러한 숙의민주주의적 공론화의 경험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빈발하게 되는 사회갈등을 좀더 평화롭고 지혜롭게 해결하는 데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 참여민주주의를 넘어 숙의민주주의가 앞으로 확산, 심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이다.
또한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에너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 돌이켜보면 고리 1호기 원전 가동 이후 지난 40년 동안 원자력계와 정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물량을 동원하여 친원전 여론 형성에 힘을 쏟아왔다. 이번에 비로소 40년 만에 처음으로 시민이 중심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에너지정책에 대해 숙고하고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이 열린 것이다. 이 공론장은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에너지 소비자’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에너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숙고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좀더 능동적인 ‘에너지 시민’으로 재탄생하도록 했다. 요컨대 이번 공론화는 소수의 전문가와 관료에 의해 밀실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되던 에너지 정책결정의 민주화를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공론화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 역시 상당히 눈에 띈다. 2박3일간의 종합토론회에서 시민참여단이 보여준 뜨거운 학습 및 참여 열기에 비해 질의응답과 토론에 배정된 시간이 부족하여 숙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공론화위원회가 ‘기계적 중립성’ 원칙에 충실하게 따르다보니 시민참여단에 일반 시민이 아닌, 신고리 5·6호기 문제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지역주민과 미래세대의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못하는 문제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성찰과 해결책 마련을 통해 향후 우리 사회에 숙의민주주의가 활짝 꽃피우기를 기대한다.
지난 7월25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소 주최 '원전 문제 공론화 어떻게 할 것인가-과거 경험으로부터 배우자' 사회정책포럼에서 이영희 가톨릭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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