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문화체육관광부 등 12개 부처가 지난 8일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접수된 피해 사례에 대해 관련 기관에 ‘2차 피해 방지 및 가해자 징계’를 요청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민간 기업이 후원·주최하는 공연의 경우 구속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프리랜서 등 고용 형태가 다양해 일률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18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부분 프리랜서로 활동하거나 소속 조직이 없는 문화예술계 특성상, 성폭력 가해자를 징계하고 피해자 보호 조처를 시행할 ‘관련 기관’은 전무한 형편이다. 배용재 시인의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롱센텐스’ 이신호 활동가는 “학교나 회사 등 일반적인 조직의 경우 피해자들이 내부 고발부터 하겠지만, 문화예술계는 피해자들이 안전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구나 조직이 없었다”며 “기댈 곳 없는 환경에 성폭력 피해가 누적되다 일거에 터져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성폭력에 대한 제도적 대처가 미비하다 보니 이에 문제제기를 해도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분리시키는 등 최소한의 조처도 기대하기 힘들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방혜영 활동가는 “성폭력 문제가 불거져서 가해자가 극단을 나와도, 다른 극단에서는 계속 기용이 된다. 가해자와 같이 작업할 수밖에 없는 동료 배우들을 생각하다 보면 피해자는 결국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문화예술계 성폭력 근절 대책이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선 문화예술인들을 포괄할 ‘공공 조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문단_내_성폭력’ 문제가 불거진 지난해 2월 문체부와 한 간담회에서 ‘공공부문에 예술계를 포괄하는 전담 기구를 설치하고, 소관 부처는 문체부가 맡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여연은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고용 형태 등을 감안할 때 정부 대책의 수준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개입할 기준이나 근거를 사법·행정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대책에서 예술 교육과 관련한 성폭력 방지 대책이 없는 것도 미흡한 점으로 꼽힌다. 미투 증언으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배우 조민기·조재현, 연출가 오태석, 사진작가 배병우 등은 모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고발이 나왔다. 우롱센텐스 정민재 활동가는 “문화예술계에는 고등학교에서 나를 가르쳤던 강사가 나중에 대학교수가 되고, 심사위원이 되는 등 지속적인 위계 관계가 유지된다”며 “예술학교 등 교육 현장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예술계 활동가들은 무엇보다 문화예술계 특성을 반영한 중장기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문화예술계 특별 신고·상담센터를 100일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10년이 넘게 반복된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100일이라는 한정된 기간 안에 얼마나 드러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100일 이후에도 계속될 장기적인 제도 운영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